1984년, 여름(Summer of 84, 2018) | 당신의 이웃은 살인범?
<맨 왼쪽 데이비가 이 사달의 발단이다> |
얼핏 제목만 보고는 1980년대 제작된 고전 공포영화로 오해할 수 있지만, 「1984년, 여름」은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영화다. ‘1984년’이란 설정은 감시 카메라와 휴대전화 등의 IT 기기를 이용한 과학 수사가 없는, 그래서 범인 잡기 게임에서 행동으로 단서를 쫓는 노동이 절대적인 고전적인 추리물을 완성하고 싶은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모험심이 인디애나 존스 못지않게 흘러넘쳤던 당신의 10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영화 속 10대들의 철없는 위험천만한 모험에 식은땀에 살짝 절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동참하고 있을 때, 문득 난 그때 그 시절 여름에 무얼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든다.
<탐정 몽크에서도 랜달, 여기서도 랜달> |
영화는 연속된 10대 소년 실종 사건에 지역 사회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 무모하다고 비난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종잡기 어려운 (데이비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네 명의 십 대 소년이 연쇄살인범을 추적한다는 맹랑한 이야기다.
소년들이 일을 벌인 이상 범인은 십중팔구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범인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어떠한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잡아끌고 와 그들 곁에 대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그들은 10명 이상의 소년을 납치 • 살해한 범인으로 다름 아닌 자신들의 이웃을 지목한다.
그들의 판단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저 특별한 여름을 보내고 싶었던 유난히 모험심이 강했던 소년들이 벌인 한낱 촌극으로 끝날 것인가?
<소년들의 표적이 되는 이웃> |
「1984년, 여름」 줄거리를 보면 짐작하겠지만, 뜸 들이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이런 줄거리의 영화에서 소년들이 지목한 사람이 범인이 아닌 경우가 있었던가? 아니 범인이 아닐 수가 있던가?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에 달린 것이니 관객에게 감자 주먹을 날리는 그런 결말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결말도 그럴까?
설령 소년들이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정말로 나는 범인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난 영화를 위해 살인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 이 세계의 단출한 관행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말고.
<소년 탐정물이라도 예쁜 처자가 안 나오면 재미가 없지> |
쌍안경으로 이웃집 소녀를 훔쳐보며 유치한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거슴츠레한 눈으로 아무 남성이나 유혹하는 잡지 모델들을 위해 기꺼이 정충 샴페인을 터트려대는 풋풋한 10대 소년들의 범인 쫓기 놀이를 보면서, 아무런 임팩트 없이, 아찔한 모험 없이,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고만고만한 과거를 회상해본다. 후회가 한 수레를 채우고 그 위에도 후회가 냅다 들어서면서 신나게 탑을 쌓다가 보기 좋게 무너지니 우울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나의 우울한 심정이야 어찌 되었든, 묘한 것은 영화 내용보다 구호가 더 으스스하다는 것.
연쇄살인범들조차 누군가의 옆집에 살고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누군가의 옆집에 연쇄살인범이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렷다.
이웃이 살인마일 수 있다고 주의시키는 이 영화의 친절함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까? 아니면 가뜩이나 대화가 없는 현대인의 퉁명스러운 이웃 관계에 의심의 먹구름을 한층 더 깔아준 영화를 저주해야 할까? 알 수가 없다.
이 모든 사달의 발단인 데이비의 집요함은 결국 결과를 보게 되지만, 소년들은 ‘희생’으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만약 데이비 일당이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느슨한 진행이 다소 불만스러울 수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소년 시절과 그때 이루지 못한 모험을 향한 동경을 품을 수 있다면, 아무쪼록 실망하지 않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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