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랜드(Greenland, 2020) | 재난은 가정 문제 해결사
<생존자를 결정하는 국토 안보부 전화, 한국은 누가 전화해줄까?> |
수북한 수염이 다부져 보이는 존은 건설 기술자다.
“오라, 하늘을 뚫어버릴 듯한 초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오늘날, 혜성과 맞장을 뜨는 大재난을 당한다면 건물이 붕괴하는 일은 일상다반사니 존 같은 기술자는 사람을 구조하고 사회를 복구하는데 요긴하지. 이 녀석 나중에 큰일 하겠구먼.”
<공룡들도 저렇게 하늘을 쳐다봤겠지?> |
그런데 존과 그녀의 아내로 보이는 앨리슨과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 새 학기 초 같은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이혼 직전까지 갔다가? 혹은, 이혼했다가 어쩐 일로 다시 만난 분위기다
“오라, 재난영화에 빈대처럼 들러붙는 빌어먹을 신파극이 또 오늘의 주요 볼거리겠구나, 제기랄.”
<BTS에 열광하는? 그게 아니라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 |
존과 앨리슨의 아들로 보이는 소년은 알고 보니 당뇨가 있는 만성질환자다.
“오라, 손발이 멀쩡하고 그 흔한 비타민조차 안 먹는 건강한 사람들도 곧 무더기로 죽어 나갈 판에 꼬박꼬박 귀한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이 녀석 때문에 사달이 나도 된통 나겠구나.”
<이 영화를 보느니 성탄절에 어떤 케이크 먹을까를 더 고민해라> |
「그린랜드(Greenland)」도 여타 재난영화처럼 재난이 가정 문제 해결사로 등장한다. 왜, 왜, 왜 재난영화에는 가정 문제가 약방의 감초라도 되려는 것처럼 반드시 끼어들어야 하는지, 왜 재난영화의 주제는 ‘재난’이 아니고 가족 상봉과 화해에 초점이 맞춰줘야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평소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고만고만한 가정 문제를 차일피일 질질 끌다가 ‘재난’의 지원을 받아 기적처럼 해결하는 것이 교과서처럼 되어버렸다. 재난 지원금으로 금반지 산다고 하는 것보다 더 짜증스러운 레퍼토리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멀뚱히 하늘을 올려다봤을 공룡을 뒤통수에 총알을 박듯 멸종시켰던 운석이 6,600만 년 전에 일으켰을 파괴적인 장관을 기대했건만, (영화 속 장면이 아닌 오직 내 상상 속에서만) 무고한 사람들이 화염에 휩싸이고, 열풍에 휩쓸리고, 쓰나미에 삼켜지고, 희박한 산소에 질식해 죽어 나갈 때 바다에 갈긴 내 오줌만큼이나 희박한 생존 가능성을 얻어낸 눈꼴신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봐야 했던 난 후회막급하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불러올 수도 있었던 재난 중의 재난이 고작 가족 상봉의 들러리가 되어야 한다니, 혜성으로서도 체면이 서지 않고 (내 상상 속에서) 무참히 희생된 사람들 앞에서도 면목이 서지 않는다. 오랜만에 혜성 형님께서, 그것도 핵탄두로 저지당하는 불쾌함을 겪지 않은 온전한 모습으로 행차하신다니 큰 한 방을 기대했건만,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볼거리가 풍성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특수 효과에 쏟아부을 돈이 부족해서 그랬었나 하고 속 편하게 생각하련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일격에 쓰러진 공룡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뭔가를 기대했다가 꼬꾸라지듯 낙담하는 짜증만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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