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 999 – 극장판 | 안녕, 우리 청춘의 환영이여
<999의 승차권은 얼마일까?> |
TV판(TVA)이고 극장판이고 「은하철도 999」 시리즈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언제쯤이면, 아니 나이를 얼마나 먹어야 이 희세의 작품을 염산 한 통을 다 마셔도 뚫릴 것 같지 않은 가슴 먹먹한 감동 없이 담담하게 감상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난 마음이 새싹처럼 여린 소녀처럼 눈물을 찔끔거리며 「은하철도 999」를 봤다. 돌아오질 않는 청춘의 환영을 애석해하며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경험할 수 없는 우주여행을 안달하며 다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흘린다.
영화 감상을 다 끝마칠 때쯤이면 이렇게 흘린 눈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피라미가 헤엄칠 정도로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청춘의 환영 속에만 존재하는 그녀> |
상영 시간이 짧은 만큼 극장판이 다루는 주제는 TV판보다는 협소하다. TV판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약점과 인간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 등을 묘사하고 있다면, 극장판은 ‘유한한 생명’과 ‘무한한 생명’이라는 먼 미래에 대두될 새로운 가치관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유한하여서 가치가 있다는 사람의 주장과 무한한 것이 가치가 있다는 기계 인간의 주장.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린 것인가?
<데츠로는 왜 기계 몸을 포기할까?> |
사실 이 문제는 「은하철도 999 극장판 2」에서 더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극장판 1에서는 가볍게 화두를 던지는 정도에서 끝난다고 할까나?
아무튼, 지금의 나는 36.5℃라는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므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는 쪽에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만약 내가 기계 인간이 되었을 때도 그럴 수 있을까?
<인류의 오랜 숙원인 불로장생을 실현한 기계 인간> |
사람과 기계 인간, 사람과 사람에 가까운 인공지능을 갖춘 안드로이드, 혹은 사람과 유전자 변형 인간이 공존하게 될 먼 미래에는 반드시 풀어나가야 할 문제가 바로 도덕적 경계선 문제다.
만약 내가 기계 인간이 되었을 때도 기계 인간 편이 아닌 사람 편을 들 수 있을까? 내가 기계 인간이 되면 나의 도덕적 판단은 예전처럼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나와 같은 기계 인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나? 사람과 기계 인간 중 둘 중 하나만을 구할 수 있을 때 누굴 먼저 구해야 하나?
<데츠로와 파우스트, 스타워즈의 루크와 다스 베이더를 보는 것 같다> |
유한하니까 가치가 있다면 먼 훗날 등장하게 될 무한한 생명을 얻은 기계 인간 • 유전자 조작 인간 • 안드로이드 등은 가치가 없으니 보이는 대로 파괴하고 죽여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을까? 지금은 그렇더라도 먼 훗날 인류의 절반 이상이 기계 인간이나 유전자 조작 인간 같은 변형된 인간으로 대체되었을 때도 생명의 유한성을 찬양해야 할까?
아직은 전 인류가 미지근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므로 우리는 데츠로를 악에 맞서는 영웅으로, 그리고 기계 제국을 건설한 프로메슘을 악당으로 간단하게 치환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인공 신장, 유전자 조작, 기계 신체 등의 일반화로 순수한 인간 혈통이 사라지게 될 먼 훗날의 후세들은 「은하철도 999」를 어떤 마음으로 감상하게 될까? 이 낡고 낡은 고전에 감동하여 기계 신체와 인공 신장을 해제함으로써 무한한 삶을 포기할까?
아무튼, 일본의 모든 것을 부정해도 「은하철도 999」 시리즈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대작 중의 대작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만약 내가 일본인과 양국의 문화 콘텐츠를 가지고 어느 쪽이 우열한지를 언쟁을 벌일 때 일본인이 ‘우리는 은하철도 999가 있는데 한국에는 뭐가 있느냐!’라고 공격해온다면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는 그런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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