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 칼 세이건 | 오랜만에 내리 두 번 읽다!
내리 두 번 읽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뒤표지를 덮으려는데, 오른손이 톱니바퀴에 뭔가 걸린 시계추처럼 갑작스럽게 멈춘다. 양장본 특유의 두툼한 판지가 천근추(千斤墜) 무공으로 버티고 있는 걸까? 절대 그럴 수는 없으리라. 아마도 뒤표지를 넘길 수 없었던 이유는 연병장으로 향하는 남자 친구의 시무룩한 등을 바라보는 여자 친구의 아쉬운 마음처럼 이대로 작별을 고하기에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누이 말했듯 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읽어도 질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번 읽을 때마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운 감동, 새로운 감흥, 새로운 여운을 준다. 여기서 ‘두 번 세 번’ 읽는다는 말은 연달아 읽는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막상 그런 좋은 책을 만나더라도, 즉 ‘나중에 꼭 한 번 더 읽어야지’라고 마음먹게 만드는 그런 훌륭한 책을 만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나날이 새로운 책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신나는 세상에서 ‘새로운’, ‘최신’을 추종하는 사람의 속물근성을 고려하면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그래서 나중에 꼭 다시 읽겠다는 오늘의 다짐이 제아무리 태산처럼 견고해 보이더라도 인생의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내리리라는 것을 직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사정이 이러하다면 뒤표지를 덮는 손이 자식의 관뚜껑을 덮는 부모님의 손처럼 천근만근 무거워진다고 해도 이해할 만하다. 한편으론, 그리고 씁쓸하게도 내 나이는 내일을 자기 편한 대로 기약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은 나이도 아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어느덧 벌써 그렇게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재다가는 결국 또다시 내일로 마냥 미루게 될 것 같아, 칼을 뽑은 사무라이가 무라도 썰 듯 일말의 망설임 없이 한 번 더 읽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연달아 읽은 것은, J.M. 쿳시(J. M. Coetzee)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이후 정말 오래간만이다. 그런데, 이 뜻하지 않은 기회에 10여 년 전에 쓴 리뷰를 보니, 강산이 변하는 동안 ‘글쓰기’ 성향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물론 졸렬한 필력은 변함없지만 말이다.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한 권의 책?
책 내용이 어려워서 두 번 읽은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연과학 전도사이자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칼 세이건(Carl Sagan)의 책이다. 그것도 그의 마지막 저서. 아마도 자연과학에 관심이 지대한 독자라면 칼 세이건의 책은 최소 한 번 이상은 읽어봤을 것인데,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한참 전이지만,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Shadows of Forgotten Ancestors)』를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책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두 번 연달아 읽었을까? 왜 통례를 깨고 그래야만 했을까? 성의 없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수학 문제를 풀듯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저 비가 오면 우산을 펴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듯 그저 내 마음이, 내 의지가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면 설명이 될까? 칼 세이건도 인정했듯 세상만사 모두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잘 굴러가지 않는 뻑뻑한 머리에 WD-40를 처발라 굴릴 대로 굴린 다음 어설픈 대답을 짜내는 대신 (약간은 파렴치할지라도) 칼 세이건이 남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달필에다 설명도 자상한 데다 풍부한 상상력까지 담은 과학책은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도 뜨겁게 만든다.
칼 세이건은 이 말을 아서 찰스 클라크(Arthur Charles Clark), 줄리언 소렐 헉슬리(Julian Sorell Huxley),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 등 다른 사람의 책을 칭찬하는 용도로 사용했지만, 사실 그의 책이야말로 ‘달필에다 설명도 자상한 데다 풍부한 상상력까지 담은’ 대표적인 과학책이다. 지식에 대한 갈증을 명쾌하게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고력을 함양시켜 준다는 점에서 칼 세이건의 책은 독보적이다. 이런 책이야말로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한 권의 책으로 꼽을만하다.
과학적 사고와 경신(輕信)의 시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고전이다 보니) 과학에 대한 새로운 지식, 혹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대단한 학설이나 이론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단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 그리고 일명 칼 세이건이 ‘헛소리 탐지기’라고 지칭한 과학적 사고 방법과 그 과정에 대한 통찰과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책이다. 칼 세이건이 대중에게 요구하는 과학적 사고 방법의 핵심은 의심할 줄 아는 정신과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성이다. 그는 모두가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연 합리적 회의주의가 되기를 바란다.
말도 간단하고, 실행하기도 간단할 것 같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마녀사냥, 노예제도 등 모두가 인정하는 인류의 흑역사부터 악령, ESP, 채널링, 버뮤다 삼각 지대, 미확인 비행 물체, 미스터리 서클, 외계인에 의한 납치, 아틀란티스 대륙, 점성술, 심령술, 광고 등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화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공개적으로, 혹은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는 경신(輕信)의 예는 무수히 많다.
칼 세이건은 이러한 사례들의 무수한 의문점과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인류가 회의주의를 상실하고 경신이 횡행하면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경고한다. 또한, 종교, 마녀사냥, 악령, 외계인 납치 등으로부터 사람이 무언가를 경신하게 되는 심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이유와 그 공통 기전도 고찰한다.
21세기에 마녀사냥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고?
현재의 교육은 과학의 결실만을 가르치고 그 과정이나 방법은 어렵다거나 현실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한다. 그뿐만 아니라 선생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꺼리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질문하는 학생도 없다. 그저 암기하고 암기하는 단순 학습만이 있을 뿐이다. 이로써 ‘배우고 묻는다’라는 ‘학문(學問)’의 요체는 설 자리가 없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질문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쓸데없고’ ‘괘씸한’ 짓이다. 국가와 지배층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시키는 일만 잘하는 약간의 기술을 가진 노예를 원한다. ‘생각’, ‘사고’, ‘개발’ 같은 것은 소수의 엘리트로도 충분하다. 국가나 기득권자에게 있어 회의주의적인 사고는 기존 질서와 권력에 도전하는 본성을 자극하므로 굳이 양성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는 것보다 암기하기가 쉽다. 믿고 의존하기는 더더욱 쉽다. 그리고 사람은 감정적으로 끌리는 것, 감정을 자극하는 것, 자신에게 좋게 느껴지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성향이 있다. 어떤 일이든 중도에 경로를 변경하기보다는 그대로 유지하기가 쉽듯 생각이나 가치관, 신념을 바꾸기보다는 그대로 밀어붙이기가 쉽다(그래서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고집이 세지고, 이러한 성향을 굳어지는 뇌가 더 가속한다. 뇌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것이리라). 한마디로 매사 물고 늘어지며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마음도 편할 것이고 몸도 편하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진화 심리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성향이 진화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시대와는 지금은 다르다. 달라도 매우 다르다. 마녀사냥, 십자군, 노예제도, 제국주의, 인종주의, 홀로코스트, 문화대혁명, 대약진 등 일련의 역사적 암흑기는 무엇이든 쉽게 믿는 경신의 대가가 생각보다 매우 크다는 것을 경고한다. 마녀사냥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고 그 방법도 많다.
자신의 신념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은 잘못이라고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자신은 선한 동기에 따라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은 악한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고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신은 자신에게만 말하고 신앙이 다른 자들에게는 말하지 않는다고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전통적인 교리에 도전하거나 날카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고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자기 믿음대로만 살고 행동하면 만사가 올바르게 돌아가리라 절대적으로 믿는다면…(『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p606)
마녀사냥 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은 아무리 과학적인 시대이고, 문명적인 시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처럼 말이다. “21세기에 마녀사냥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라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당 정권’이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들어선 한국을 보면, 그리고 중국의 새 황제 시진핑의 권력욕과 푸틴과 이스라엘의 만행, 그리고 여전히 전쟁 특수를 포기하지 못하는 미국의 위선을 보면 칼 세이건의 경고는 결코 예사로 넘길 수 없다.
경신(輕信)의 시대는 여전히 진행 중
온라인 게임인 원신(原神, Genshin Impact)에 등장하는 수메르 지역 사람들은 ‘허공’ 단말기라는 것을 사용한다. 신이 선사한 온갖 지식에 접촉할 수 있는 이 단말기는 작금의 인터넷 같은 정보 매체이자 정보 창고라고도 할 수 있는데, 수메르 사람들은 매사 허공에만 의존하다 보니 오히려 상상력과 회의주의가 억제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꿈도 못 꾸고, 예술도 감상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른다.
분명 인터넷이 지식 창고인 것은 맞지만, (창고에 있는 잡동사니들이 모두 유용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창고에 있는 지식이 모두 진실이고 사실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게시글의 조회수와 댓글 수, 혹은 유튜버의 ‘좋아요/구독자’ 수를 보고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따져보려고도 하지 않고 쉽게 믿어버린다. 구글 역시 ‘조회수’와 ‘댓글 수’가 많은 ‘인기 글’을 ‘좋은 글’이라고 판단하고 검색 상위에 노출한다. 편리한 교통 때문에 걷는 일이 적어진 것처럼 ‘검색하는 사람’은 많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지고 있다.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입맛에 맞는 정보만 검색하다 보니 확증편향은 더더욱 심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편견과 선입견으로 똘똘 뭉친 외골수가 되어간다. 책을 읽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일부러 산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각을 게을리하면 남의 말을 쉽게 홀린다. 경신(輕信)의 시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터넷으로 유포되는 지식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또는 악의적인 목적으로 유포된 지식인지, 선한 목적으로 유포된 지식인지 분별하는 것은 결국 사용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누군가의 사기 행각에 말려들지 않도록, 혹은 누군가의 선동질에 놀아나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지니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만큼 똑똑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렇게 조악하게나마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내리 두 번 읽게 된 이유가 조금씩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 같다. 그것은 깊이 생각할 거리를 주고, 충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고,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분별력을 양성할 수 있는 생각의 벡터를 뿌리내리는 데 있는 것 같다. 생각할 거리와 더불어 그 방법까지 친절하고 세밀하게 설명해 주는 칼 세이건의 달필은 명불허전이다.
과학을 맹신해서는 안 되지만, 과학의 성과와 가능성을 부정해서도 안 된다. 과학 없이는 지금 같은 안락하고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불완전성과 오류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진리에 끝없이 접근할 수는 있어도 결코 도달할 수는 없음을 시인하는 과학이야말로 기아, 기후변화, 전쟁, 에너지, 생태계 등 인류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임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치면서...
끝으로 앤 드리앤(Ann Druyan, 칼 세이건의 부인)과 칼 세이건의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집에 독서를 취미로 가진 부모나 형제가 있다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된다. 만약 주변에 책 읽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나 같은 별종을 제외하면) 졸음과 싸우는 힘겨운 노력까지 해 가면서 책을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다. 어렸을 때부터의 꾸준한 독서가 성공적인 삶으로 이어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헛소리 탐지기‘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상관관계를 인과 관계로 혼동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칼 세이건의 어린 시절에 책이 없었더라도 우리가 아는 칼 세이건이 되었을까?’ 하는 상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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