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 박이문 | 인문학과 철학을 통한 근본적이고 고차원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다
환경철학은 지적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한 한가롭고 사치스런 활동이 아니다. 환경철학은 인간의 실존적 삶은 물론 생물학적 생존과 뗄 수 없이 연결된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p622)
병도 주고 약도 주는 과학기술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눈부신 발전과 성장으로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편리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질병, 빈곤, 기아에 시달리고 있지만, 한 세기 전과 비교했을 때 그런 사람들의 수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여러 이유 중에서 과학기술을 1순위로 지명한다 해도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인류 문명의 꽃을 활짝 개화시키면서 많은 사람을 기아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시키고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으며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에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태계 문제를 일으킨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 역시 과학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도 재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막연하게만 느껴지고 일부 지식인에 의해서만 거론되던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태계 문제들이 지금은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의 지구적인 문제로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과학기술을 버리고 중세, 혹은 그 이전의 원시적인 사회로 돌아가야 할까?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듯 자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대안적 통찰』은 그럴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이 생태계를 파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학기술을 사용한 것은 인류의 선택과 의지였지 과학기술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며 이미 과학 문명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안락함과 편리함, 풍요로움에 길든 현대인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원시적인 과거의 삶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이 의사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도구로 쓰이지만, 살인자에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흉기가 되듯 과학기술 역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의 번영과 생존, 그리고 풍요를 약속하는 훌륭하고 믿음직스러운 동지가 될 수도, 혹은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멸로 몰아넣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일으킬 수 있는 지옥의 화신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인류는 결코 지속할 수 없고 무모해 보이는 자연에 대한 약탈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자행했고, 그 무시무시한 대가를 예상함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인간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만 보고, 그것들의 가치를 오로지 인간의 가치 실현을 위한 도구로만 파악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세계관이 식민주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했듯,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을 위해서라면 자연에 대한 착취와 약탈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해롭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종의 멸종 등 자연에 대한 파괴적인 모든 행동을 허용하거나 최소한 눈감아 준다. 즉 인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자연중심주의적이고 생태중심적인 세계관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만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를 통해 박이문은 역설한다.
<너구리들과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있지만...> |
‘실천적 문제’라는 거대한 장벽에 맞닥트린 인류
21세기의 문명사적 문제이자 인류의 화두는 환경보호와 생태계 보전이라는 저자 박이문의 주장에 아직도 반감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는 다른 생명은 제외하더라도 인류라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생명체의 행복과 생존, 그리고 번영에 직결되어 있으며, 서서히 기후변화의 무서움을 실감해가는 우리로서는 매우 절실하기까지 하다. 그런 인식을 반영하듯 환경보호와 생태계 보전에 공감의 뜻과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도, 크고 작은 환경보호 단체들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라는 인류 최대의 위기 앞에서 무력적인 존재임을 깊이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무력감은 우리의 삶이 여전히 친환경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 사회와 지역은 여전히 환경보호보다는 지역개발을 우선시하며, 우리 국가 정책에서도 여전히 환경보호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실천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우주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전에 선행된 가치에 대한 인간의 포괄적 비전과 신념을 세계관이라고 규정한다면, 앞서 거론한 실천적 문제는 우리의 세계관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세계관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 면에서 생태중심적인 세계관은 하나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클라우스 레게비, 하랄트 벨처 지음, 윤종석, 정인회 옮김, 한울아카데미)에서도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방안으로 ‘문화 혁명’이라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거론할 정도로 기후변화와 생태계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야로까지의 확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를 일으키는 물리적인 원인과 그 영향력은 과학기술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떠한 의도로든 과학기술을 사용한 주체는 인간과 그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 조직일 뿐만 아니라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것 역시 인간과 인간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대중적인 문제로 확산했지만, 그 인식이 실천적 방안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문명의 이기 앞에서 나약하게 주저앉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무절제한 탐욕과 편안함에 길든 나태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 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과 비판적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교육과 인문학적 소양, 윤리적 가치관이 과학과 과학기술의 의미를 자연과 인간 사이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비판하기에 부족함을 의미한다. 이 한 권의 책으로 그 부족함을 전부 메워줄 수는 없을지라도, 기후변화와 생태계라는 언뜻 보면 기술적이고 실재적인 문제로 보이는 것들을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화두로 끌어올림으로써 보다 근본적이고 고차원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글들이지 않은가 싶다.
마치면서...
반복되는 논지도 많고, 집요하게 언어적 개념부터 정리하려는 분석 철학적인 면이 강해 지금껏 철학 분야를 접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좀 어렵고 지루한 면이 조금은 있었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지적 만족감으로부터 솟구치는 뿌듯함이 강하게 뇌세포를 흥분시키는 책이다.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의 요지대로 이제 기후변화나 생태계 문제는 과학기술에만 전적으로 매달려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어떤 목적으로든 과학기술을 도구로 사용하고 문명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안락함과 편안함에 중독된 우리의 탐욕스러운 마음과 안일한 정신이 얼음물을 뒤집어쓰듯 확 깨는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근검절약이 일상화되고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신인류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기후변화와 생태계 문제뿐만 아니라 자원, 기아, 빈곤, 에너지, 인구, 테러, 난민 등 인류의 고질적인 문제들의 해결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현재의 인류는 지구를 좀먹은 ‘암세포’로 기록될 것이고, 한때 찬란했던 인류의 문명은 지구를 침몰시킨 ‘타이타닉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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