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의 야회 | 가노 료이치 | 비장함에 반하고 비감함에 취하다
Original Title: 贄の夜会 by 香納諒一
미나미가 죽고 자신이 살아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다니, 그에게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일로 생각되어 견딜 수 없었다. 전혀 상정하고 있지 않던 예상외의 사태다. 어째서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제물의 야회』, p75)
“그 녀석이, 미나미가 없는 인생은 시시해…….” (『제물의 야회』, p649)
여타 추리소설에서는 좀처럼 맛보지 못한 비장함으로 홀딱 반하게 만든 『환상의 여자(幻の女)』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자마자 바로 찾은 가노 료이치(香納諒一)의 또 다른 작품 『제물의 야회(贄の夜会)』. 무려 6년이라는 집필 기간이 말해주듯 저자 가노 료이치의 모든 것이 담겼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닌 『제물의 야회』는 질풍처럼 내달리는 텍스트 사이사이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언뜻언뜻 내비침으로써 단순한 추리소설로 남기를 과감히 거부한다. 문명의 시대를 비웃는 듯 잊을만하면 벌어지는 엽기적인 범죄, 도려내고 도려내도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부정부패,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존재 목적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경찰 업무, 범죄 피해자나 그 가족들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챙기려는 몰상식한 언론, 살인을 즐기는 살인마와 직업적으로 살인하는 살인청부업자가 바라보는 죽음과 살인에 대한 심리적 제반 사항, 그리고 청소년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대처 문제 등 범죄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심리적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격을 높이고 있다.
그렇다고 『제물의 야회』가 추리소설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오지랖 넓게 나서기만 함으로써 진짜 재미를 놓친 것은 아니냐고 의심한다면 그야말로 헛다리 짚은 것이다. 명실상부한 하드보일드 스타일답게 고통과 범죄에 대한 거칠고 세밀한 묘사는 비정한 분위기를 냉정하게 발산하면서도 때론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거부감이 들게 할 정도로 과감하다. 또한, 추리소설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범죄자와 범죄 동기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풍부한 미스터리는 두말하면 잔소리고, 여기에 수프에 후춧가루를 뿌리듯 살짝 가미된 범죄 성향에 대한 심리 분석도 볼만하다. 마지막으로 작품에서 일어난 갈등들을 깔끔하게 없애는 대신 일말의 미해결을 남겨둠으로써 미해결된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 각성을 요구하고, 끝까지 미스터리로 남은 인물에 대해선 비감한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등 과감한 마지막 한 수를 두고 있다.
<한 발의 총알에 담긴 각오 같은 비장함이 느껴지는 소설> |
전에 읽은 『환상의 여자』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마음속을 텅 비우는 듯한 허전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비감함이다. 『환상의 여자』에서는 5년 만에 우연히 재회했지만, 재회의 기쁨을 누릴 짬도 없이 바로 그날 살해된 옛 애인의 가닥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과거사를 좇는 삐딱이 변호사가 등장했다면, 『제물의 야회』에는 한 냉혹한 살인청부업자가 순전히 위장 차원에서 결혼한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집요한 복수가 등장한다. 연인, 혹은 아내와 헤어지고 또다시 새로운 연인을 맞아들이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요즘, 과거는 과거에 묻고 죽은 사람은 마음속에 묻은 채 세월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에겐 두 주인공의 작태가 궁상맞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은 사랑, 혹은 집착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면서도 개운치 않은, 그렇다고 확실하게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묵직한 뭔가가 끈적끈적하게 녹아들어 있다. 사랑이지만 마냥 달콤하지 않고 슬픔이지만 마냥 쓰지 않은 그 뭔가가 두 남자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고, 이 두 남자를 동정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나로선 그들에게서 지독하게 풍기는 비감함에 취한다.
프로답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돈을 받고 사람을 죽여왔던 그가, 그저 편리하게 신분을 위장하고자 결혼한 한 여자의 죽음에서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그토록 복수심에 불타오를까? 그리고 경찰이 그보다 먼저 용의자를 체포할 것인가? 아니면 아내를 잃은 살인청부업자의 분노로 달아오른 뜨거운 총알이 먼저 용의자의 심장을 향해 발사될 것인가? 광기와 총명함의 구분을 넘어서는 지능적인 범죄자를 추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칠맛 나지만, 한 범죄자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살인청부업자가 다투는 양산도 놓칠 수 없는 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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