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감의록 | 작가 미상 | 유교적 이상주의 사회가 그려낸 판타지
『홍루몽』과 비교되는 『창선감의록』
도서관에서 뭐 색다른 것 없나 하고 살펴보다 오래간만에 한국 고전소설로 눈길을 돌려보았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나온 「한국고전문학전집」 중 ‘가장 많은 필사본으로 읽혔던 당대 최고의 인기소설’이라는 뒷면 표지 문구가 눈에 띄어 선택한 작품인 바로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 『창선감의록』은 아직도 작자가 누구인지, 또 창작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작품이다. 다만, 창작 시기는 조선 후기 정도에 만들어진 작품인 것으로 짐작하는 것 같다.
문학이 일찍 발달해 작품 다수가 고전으로 전해져오는 유럽과는 달리 문학을 그리 권장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소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하기에 『창선감의록』은 더욱 소중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중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홍루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래도 작품 길이가 훨씬 길고 등장인물만 500명이 된다는 『홍루몽』이 『창선감의록』보다는 훨씬 이야기 규모도 크고, 『창선감의록』에서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 남녀 간의 사랑이나 질투 등 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등장한다.
『창선감의록』이 중국소설 『홍루몽(紅樓夢)』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창선감의록』이 『홍루몽』을 모방해서 창작되었는지는 글쎄다. 두 작품의 창작시기도 비슷한 것 같고,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 가문의 장자가 아닌 차자(次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과 역시 그 차자가 출세해서 공적을 쌓아 가문의 부흥을 이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가보옥에게 임대옥과 설보채, 화진에게는 남채봉과 윤옥화 등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두 명의 미녀가 관계된다는 점 역시 같다.
그러나 (『홍루몽』은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각 작품의 주인공인 가보옥과 화진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가보옥은 많은 누나와 가문의 부귀공명에 둘러싸여 자라면서 학문을 등한시하고 풍류를 즐기는 한량이었다가 후에 집안의 몰락을 보고 출세를 결심하는 인물이고, 화진은 작품의 시작부터 부모에 대한 효와 형에 대한 우애, 그리고 공부에 대한 집념이 대단한 인물이다. 비록 두 작품에서 다른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점이 상당한 부분 존재하는 것과 조선시대가 중국의 문화적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고려해보면 『창선감의록』은 『홍루몽』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담고 탄생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선감의록』을 읽고 고전의 매력에 더욱 빠지고 싶은 독자에게는 『홍루몽』을 보면서,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역사와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한 시대소설
『창선감의록』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명나라 세종(世宗: 재위 1521~1567)이다. 이 시기 명나라의 역사적 중요 인물로는 엄숭(严嵩)이 있는데, 작품 속에서도 그 역사의 이미지 그대로 등장한다. 또한, 주인공 화진의 조상은 역시 실존 인물인 명나라 개국공신인 화운장군의 후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렇게 『창선감의록』은 실존 인물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 역사와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해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인물의 등장뿐만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이 돌아다니거나 거주하는 장소나 지리까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효와 형제애가 강하고 총명하고 어진 화진이 심술궂은 어머니 심씨와 나약하고 어리석은 형 화춘, 그리고 화춘의 첩 음탕한 조씨와 화춘의 악독하고 방탕한 두 친구 범한과 장편이 온갖 음모로 화진과 그의 두 아내를 괴롭히지만,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 효행과 공적으로 허물어져 가는 화씨 가문과 나라를 다시 살리고 현명하고 예쁜 두 아내와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라고도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 사건의 흐름은 고전소설치고는 매우 복잡하다. 특히 인물 관계가 그러한데, 단순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펼쳤다가는 조금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친절하게 옮긴이는 책 앞장에서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등장인물 관계도까지 그려주고 있다.
<林安泰古厝夕陽之紅樓夢 / 林承燁 / CC BY-SA> |
유교적인 도가 실현된 이상사회, 그리고 ‘신민(新民)’과 ‘친민(親民)’
『창선감의록』은 다양한 창작 기법을 사용하는 근대나 현대의 소설과는 달리 작품이 말해주는 확고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바로 충효(忠孝)를 행하는 사람은 복(福)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권선징악적인 유교 이념이 확실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유교적인 도가 실현된 이상사회를 완성하려는 작가의 의지에도 작품에는 당시 유학자들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화진이 처남 윤여옥의 꾀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져 성도로 유배를 가다가 만난 장수 유성희와 며칠을 같이 지내다 유성희가 화진과 헤어지면서 건넨 말을 보자.
“송나라 때 정이(程颐)는 촉 땅으로 좌천되었을 때 『이천역전(伊川易傳)』을 저술하여 주역의 이치를 크게 밝혔습니다. 장준(張俊: 금나라와 싸워 중원 회복을 도모했던 재상)과 범진(范鎭: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했던 북송의 신하)도 모두 촉 출신으로 남송 조정의 훌륭한 신하가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도 촉 땅에 머무르신 일이 좋은 결과를 맺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우선 정이는 조선후기 신흥종교인 주자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학(大學)』이 원래 『예기(禮記)』의 42편이었을 때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과 친한 데 있으며(在親民) 지극한 선에 지(止)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 善)."였다.
이렇게 원래 ‘백성과 친하다(親民).’로 되어 있던 원문을 정이, 정호 형제와 주희가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은 『전습록(傳習錄)』 「서애록(徐愛錄)」에서 주자학자들이 친민(親民)을 마음대로 신민(新民)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윤휴도 신민이 아니라 친민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신민(新民) 친민(親民)의 차이는 매우 크다. 역시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 나오는 윤휴의 말을 들어보자.
“친(親) 자를 정자(程子: 정호·정이 형제를 높여 부르는 말)는 마땅히 신(新) 자여야 한다고 했다. 민(民)은 자기 자신 이외의 천하를 말한다. 어진이(仁人)의 마음이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자기가 영달하고 싶으면 남을 영달 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新)은 잘못된 옛 습관을 고치고 선한 쪽으로 가게 하여 제각기 자기 밝은 덕을 밝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공자가 ‘자기 몸을 닦고(修己)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고 말한 것과 맹자가 이른바 ‘사람들 모두가 제각기 자기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모신다면(親其親長其長)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그 말이다. 혹자는,‘대인의 길은(大人之道) 어버이를 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親親而仁民) 것으로서 중국을 한 사람으로 여기고, 사해를 한 가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친(親)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학독서기』)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위의 책에서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 소장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는 김장생과 그 이후 서인들은 이이의 개혁정신을 엿 바꿔 먹고, 오로지 예(禮)만을 강조한다. 서인들은 왜란 이후 야기된 백성의 신분상승 욕구를 신분제 제도의 강화와 철저한 통제를 통한 보수적이고 반개혁적인 방법으로 억압하려고 했다. 그래서 예송논쟁에 그렇게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송시열에 의해서 다져지고 완성되어 결국 주자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神)이 되었고 주자학은 종교가 되어 조선시대 후기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안석은 중국 송(宋)나라 때 신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개혁적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정치 사상가다. 백성을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본 정이의 업적을 높이 사고, 왕안석의 개혁을 반대했던 인물을 훌륭한 신하라고 하는 걸 보면 『창선감의록』의 저자가 누구였든 간에 백성을 위한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송시열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시대’하면 떠오르는 그렇고 그런 고리타분한 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창작 연도로 짐작되는 조선시대 후기는 신분제 사회가 점차 무너져가는 격동의 시기였으니 이런 소설을 통해서나마 백성을 ‘신민(新民)’시켜 신분제 붕괴를 막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禮記 / snowyowls / CC BY> |
판타지적인 양념으로 고전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
그렇다고 작품의 전개가 경전처럼 딱딱한 것은 절대 아니다. 보통의 동양고전처럼 신선도 등장하고, 선녀도 등장하며, 죽은 사람도 살리는 마법의 묘약이나 예언적인 요소도 많이 나온다. 특히 조선시대 억압되었던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전생의 업보라든가 부처님께 공덕을 쌓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화진의 두 부인 윤옥화와 남채봉이 화진의 집에서 시집살이하며 화춘의 첩 조씨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해 윤옥화가 흐느끼며 억울해하자, 남채봉이 윤옥화를 달래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언니의 바다같이 넓은 마음으로 어찌 이런 작은 일을 못 참나요? 우리가 이 집안에 들어온 것은 그냥 불가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보 때문이에요. 숙명대로 있다가 운수가 다하면 떠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어사 부부가 청원스님 덕분에 10년 만에 딸 남채봉을 만나고 부부가 청원스님을 향해 거듭 감사들 드리자 청원스님이 사양하며 하는 말이다.
“두 부인께서 부처님께 공덕을 많이 쌓으셨기에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냥 관음보살님의 자비로운 뜻을 받들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제 덕택이라고 할 수 있나요?”
남어사 부인은 남채봉이 어렸을 때 청원스님에게 그림을 보시해 이렇게 부처님의 자비를 받은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그 시대에는 지나쳤다는 감이 있을 정도로 강조되었던 충효가 다시 시대를 돌고 돌아 지금에서는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그저 유행은 돌고 돈다는 속설이 우연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일까. 지나침은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부족함 역시 살펴야 할 부분이다. 과거에는 충과 효가 지나치게 강조되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나 부족하다. 아무튼, 이 작품을 읽고 동양의 고전문학에 흥미가 발동한 독자는 『홍루몽』, 『구운몽』 등도 곁들이면 안성맞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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