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와 침묵의 제국 | 이덕일 | 시대의 금기, 시대의 이단아
시대의 금기로 남은 이름, ‘윤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 이어 굳이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고 할 것 같지는 없지만, 내 나름의 이유는 있다. 물론 괜찮은 대중 역사서인 이덕일 소장의 책이라는 단순한 이유도 있었지만,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안다는 말이냐!"라며 (당시로써는) 도도하게 외치며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다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려, 즉 중세 마녀사냥처럼 이단으로 찍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개혁 정치가가 바로 윤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현실의 부조리와 부패의 썩은 부위를 바로 보고, 또한 과감히 메스를 들이대며 외과 수술을 시도하려는 개혁가나 혁명가를 사랑한다.윤휴의 비참한 죽음은 조선시대 당쟁에 관련된 책을 볼 때면 자주 접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런 책들은 다루는 범위가 넓다 보니 윤휴의 죽음 정도만 다루고 그 배경이나 사상적인 면은 생략하거나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갔기에 이 기회를 빌려 윤휴와 송시열과의 반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다.
윤휴는 송시열과는 달리 시종일관 실제적인 북벌을 외치고, 그 북벌을 위해 신분제 타파 등 대개혁을 주장하다가 서인과 숙종에 의한 음모에 휩쓸려 사사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인들은 윤휴가 어떤 말을 남길지 두려워 유언까지 금했다. 남인의 영수 허목이나 허적에게서조차 지지를 받지 못한 채 홀로 서인과 숙종에 당당히 맞서 북벌대의와 대개혁을 주장하고 이것을 자신의 생애 업으로 삼았던 인물이 바로 윤휴다. 진짜로 북벌대의를 주창했기에 그의 이름은 금기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북벌의 영광은 송시열이 차지했다.
서인과 노론에 의해 윤휴와 송시열, 두 이름 다 시대의 금기로 남았다. 하지만, 그 금기의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송시열에 대한 금기는 ‘감히 성인을 비난하려 하다니’라고 한다면, 윤휴에 대한 금기는 ‘감히 사문난적의 이름을 들먹이다니’라고 해도 무리일 것 같지는 않다. 윤휴에 대한 금기의 실체로 『윤휴와 침묵의 제국』 서문에는 믿기지 않는 얘기가 실려 있다. 어느 기자가 윤휴의 후손을 찾아갔는데, "여주에 사는 후손이 아직도 윤휴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라며 회고했다고 한다. 1990년대 말의 상황이었다. 그때 이후 10년 이상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3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윤휴에 대한 침묵에서 10년이란 시간은 큰 변화를 가지고 오기엔 그리 긴 것 같지는 않다.
송시열에 버금가는 학덕과 명망을 갖추었던 윤휴
지난번에는 송시열을 만났으므로 이번에는 그 당시 유일하게 송시열에 버금가는 학덕과 명망을 갖추었던 윤휴를 우리는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고, 윤휴가 외친 북벌대의와 그 북벌대의를 위한 대개혁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역사책을 좀 보는 독자라면, 이 책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그런 책이다. 무조건 이덕일 소장과 윤휴가 옳다는 건 아니다. 윤휴에 대해 말하려는 책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단순하게 교보문고 홈페이지에서 ‘윤휴’와 ‘송시열’이란 단어로 검색해 봤다(2012년). 각각 3건, 17건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양란 이후 각종 폐단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대개혁을 외쳤던, 그 시대에 유일하게 깬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 것이 현실이다. 교과서에는 뭐라고 나올지 안 봐도 대충 감이 잡힌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대의소(大義疏)」
윤휴는 송시열보다 10살 어렸다. 둘은 윤휴의 보은 삼사 외가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 후 송시열은 낙향하는 도중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인 복천사에 들려 윤휴를 만났다. 송시열에게서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은 윤휴는 송시열의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후로는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p66)
먼 훗날 윤휴는 이 날 맹약을 한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면서 친구들에게 무수한 절교장을 받는다. 그리고 숙종과 송시열이 배후에 있던 서인들의 공작 정치에 휘말려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맞긴 맞는가 보다.
윤휴는 현종 15년(1674) 7월 초하루에 아직 벼슬길에 한 번도 나가지 않은 만 57세 나이로 현종에게 밀소를 올렸다. 그것이 「대의소(大義疏)」였다. '큰 의리(북벌)가 담긴 상소'라는 뜻이었다.
오호라! 병자, 정축년의 일은 하늘이 우리를 돌봐주지 않아서 금수가 사람을 핍박해 우리를 회계산(會稽山: 월왕 구천이 오왕부차 에게 패전한 산. 여기서는 남한산성)의 치욕을 주고 청성(靑城: 삼전도)의 재앙을 주었으며, 우리 백성을 도륙하고 우리 의관(衣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당시 우리 선왕께서는 종사를 위해 한 번 죽음을 참으시고 만백성을 위해 수치심을 버렸습니다. 피를 흘리며 울음을 삼키고 수치를 머금고 마음을 어루만지셨습니다. (p47)
추악한 무리가 도둑질한 지 오래되어 중국의 원망과 분노가 일어나서 오삼계는 서쪽에서 일어나고 공유덕(孔有德)은 남쪽에서 연합하고 달단(몽골)은 북쪽에서 엿보고 정경(鄭經, 대만의 왕)은 동쪽에서 노리고 있으니 (……)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습니다. (p47)
우리나라의 정예 군사와 강한 화살(勁矢)은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여기에 화포와 조총까지 곁들이면 진격하기 충분합니다. 병사 1만 대(隊)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燕山: 북경)으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면서 바닷길을 터 정경과 약조를 맺고 함께 병립하면서 그 중심부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p49)
우리는 의려(醫閭: 중국 요녕성 북진에 있는 산. 의무려산)에 가로질러 웅거하고서 유주(幽州: 북경)와 심양을 압박하면서 천하에 명을 청한다면 제실(帝室)을 위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진 (晉)나라 문공(文公)이 될 수 있습니다. (『현종실록』 15년 7월 1일, 『백호전서』 부록 행장 상(上)) (p49)
윤휴가 대의소를 올리기 약 7개월 전에 청 강희제 13년(1673)에 평서왕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다. 효종이 재위 10년(1659) 3월에 가졌던 송시열과의 독대에서 말한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때 조선이 오삼계와 대만의 정성공, 그리고 일본과 연합했더라면 역사는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윤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춘추시대 첫 번째 패왕이었던 제나라 환공과 관중을 언급하며 그 연합군을 조선이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현종은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예송논쟁을 남인의 승리로 결말일 짓고, 영의정에 허적을 임명했다. 이렇게 현종이 의욕적으로 남인 정권을 세우려는 찰나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리고 숙종이 즉위했다.
출사를 사양하다
숙종은 윤휴를 거듭 불렀지만, 윤휴는 매번 사양했다. 그러면서 지난 7월의 밀소에 신왕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추가해 작은 책자로 만들어 올렸다.
전하께서 옛날 진(晉) 양공(襄公)이 검은 상복을 입고 전쟁에 나아간 의리를 생각하시고 한(漢) 패공(沛公)이 의제(義帝)를 위하여 상복을 입은 일을 따르시어 (……) 죄악을 치는 군사를 일으켜 천하의 잔인한 오랑캐를 제거하시고 (……) 선왕조(先王朝)의 오래된 울분을 풀으시어 백성을 복되게 하시고 우리 조종(祖宗)에 광영이 있게 하신다면 오늘날 신민(臣民)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세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p139)
더구나 관문을 봉쇄하고 약속을 끊더라도 우리로서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자기 나라에서 전쟁을 치르게 자초하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가장 나쁜 계책으로서 경계해야 하고 시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p139)
신은 또 생각건대 지금 천하에 인민과 사직 및 험고한 산천을 소유하고 군병 및 형세를 지니고 있어 저 오랑캐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현재 오삼계(嗚三桂),정금(鄭錦)이 이미 군사를 일으켜 중국이 양쪽으로 갈라졌는데 우리가 발을 어느 쪽으로 옮기느냐에 따라 저들의 존망에 영향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보살펴 주고 천하의 인민이 기대하는 것이 우리 전하 말고 누구이겠습니까. (p140)
현종은 북벌 상소에 아무런 비답을 하지 않았지만, 숙종은 답했다. "상상의 내용은 이미 보았다. 속히 나와 직무를 수행하라." 그러나 윤휴는 아직 출사하지 않았다.
북벌대의를 위해 정치 무대에 나서다
남인 허적과 서인 김석주의 연립 정권이 들어선 숙종 초 윤휴는 숙종 즉위년(1674) 12월 1일 다시 상소와 밀봉한 책자를 올렸다. 북벌의 방책을 보다 자세하게 담은 책자였다. 숙종이 윤휴의 책자를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허적은 받지 않으면 더욱 번거롭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권대운은 "형세(形勢)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자는 매우 옳지 아니합니다.”라고 윤휴를 비난했다. 그래서 윤휴는 북벌대의 실천을 위해 직접 정치 무대에 나서기로 했다. 숙종 1년(1675) 1월 9일의 일이었다.
윤휴는 성균관 정4품 사업(司業)의 자격으로 조정에 처음 들어갔다. 경연에서 옥당관(玉堂官: 홍문관원)을 불러 『강목(綱目)』을 강독하는 날, 만 14세의 소년 군주 숙종과 만 58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온 윤휴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날의 강연은 주제는 당연히 북벌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북벌에 관해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피했다. 다음날 주강에서도 강론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날의 기록을 담은 『숙종실록』은 윤휴의 무강거(武剛車) 사용 주장에 대해 김석주가 반대한 것이 주된 내용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백호연보』에는,
김석주도 절하고 아뢰었다.
“윤휴의 상소는 단지 내용이 강개(慷慨)할 뿐만 아니라 그 말 이 실로 의리에 지당한 것인데,신이 어떻게 그 내용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승지들이 모두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 수백 년 이래에 한 번도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p156)
라고 매우 고무적인 분위기로 기록하고 있다.
죽음을 부른 삼복 제거 사건’의 시작
숙종 1년(1675)년 3월 12일, 숙종이 허적과 오정위를 만나 외조부인 청풍(淸風) 부원군 김우명의 차자(前子)를 보여준 것이, 나중에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서인들이 조작한 구실 중 하나가 되는 ‘조관(照管)’이라는 단어를 윤휴가 사용하게 되는, 이른바 ‘삼복 제거 사건’이 시작이었다. 차자는 삼복 형제를 맹비난하는 상소였다.
“또 복평군 이연(李極) 형제는 효종께서 친아들과 같이 생각하셨고, 선조(先朝: 현종)께서도 동기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은총이 융숭하자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점점 게을러터지고,금중(禁中: 대궐)에 출입하면서 추악한 소문이 밖에까지 들렸는데, 이것이 곧 선왕께서 깊이 근심하신 것이고, 자성께서 처치하기 어려워하신 것입니다……." 『숙종실록』 1년 3월 12일 (p171)
김석주는 권력 극대화를 위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삼복(三福,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형제를 죽이고자 이 사건을 조작했다. 복평군 형제가 궁녀들을 임신시켰다는 주장까지 돌았다. 그러나 사건 관련 당사자들인 나인들과 복평군 형제들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낳았다는 자식도 못 찾았다. 숙종조차 삼복에 대한 공작 정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의 말을 믿고 골육의 지친(至親)을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광을 파고들어가고 싶으나 그럴 수 없다. 이렇게 억울하고 애매한 사람을 잠시도 옥에 잡아둘 수 없으니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숙종실록』 1년 3월 13일 (p175)
삼복 사건이 무고로 돌아간다면 당시 법에 따라 김우명은 반좌율에 걸려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3월 13일 밤, 숙종이 김우명을 불러들이고 기다리고 있을 때, 김우명은 안 나타나고 숙종의 모후이자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가 울부짖으면서 나타나 삼복 사건에 간섭한다. 명성왕후가 억지를 부린 것이 효과를 발휘해 김우명이 유배를 가기는커녕 복창군, 복평군 형제와 삼복 사건에서 거론된 김상업과 귀례가 정배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 날 윤휴는 자리에 없었지만, 나중에 사연을 듣고 숙종에게 따져 물었다.
"듣건대 자성께서 나오시고 여러 신하가 입시하였다 합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은 예법이 있는 곳이므로 임금의 거조(擧措: 행동)는 여러 신하가 우러르는 바이고,후세의 법이 됩니다. 자성께서 직접 나오시고자 하시면 먼저 조정에 하교해야 하는데 여러 신하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입시한 뒤에 창황하게 어찌할 줄 몰랐으니 전하께서 여기에 대하여 조관(照管)하지 못하신 것이 있는 듯합니다(恐殿下於此,有不能照管者). 이것은 국조(國祖) 3백 년 이래로 없던 일입니다.” 『숙종실록』 1년 3월 17일 (p182, p183)
앞으로는 대비의 정사 관여를 엄금해 달라는 간신의 충고였다. 조선시대 때 대비의 정사 참여는 수렴청정이 아닌 이상 위법이었다. 숙종은 “마땅히 그 말대로 하겠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훗날 숙종은 변덕을 부려 윤휴를 죽이는 데 이 사건을 이용한다.
북벌대의를 위해 개혁을 논하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기를 지금 사대부들은 그 마음속에 이해가 엇갈리고 보고 들은 것이 지식을 가리기 때문에 의논이나 행동이 본심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민들은 비록 무식해도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어둡지 않아 지극히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신령하고 정성을 다하면서 신의가 있습니다. (p200)
지금의 일도 사대부 중에는 빗나가는 의논을 하는 자들이 없지 않겠지만, 무릇 삼군(三軍)과 백성 마음만은 틀림없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원한다.”라고 할 것으로 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시작만 하면 백성은 크게 호응할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쓰러지는데 아래에서 틀림없이 더할 것입니다. 『백호전서』 권 5 「책자소」(p201)
윤휴는 북벌을 위해서는 백성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법이나 정책이 백성 중심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장한 법이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이었다. 지패법은 기존의 호패 대신에 신분 구별 없이 종이로 만든 새로운 신분증 제도를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지패법은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는 오가통(伍家統)법과 함께 시행해야 했는데,사대부들의 큰 반발을 받았다. 숙종 1년(1675) 9월 26일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의 사목(事目)을 확정했는데,“논의가 일치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라는 기록처럼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때 비변사에서 작성한 오가통의 사목은 모두 21조인데 몇 개만 살펴보면 이렇다.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에 따라 모으되,식구 수(家口)의 많고 적음과 재산의 빈부(貧富)를 논하지 않고,다섯 집마다 한 통 (統)을 만든다. 통 안의 한 사람을 선택해서 통수(統首)로 삼아 통안의 일을 관장하게 한다. 『숙종실록』 1년 9월 26일 (p203)
다섯 집이 모여 살면서 이웃을 만들어,논밭을 갈고 김 맬 때 서로 돕게 하고,출입할 때 서로 지키고,병이 있으면 서로 구호한다. 혹시 형세가 불편한 자가 있어 비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개,닭소리가 서로 들리게 해서 부르면 서로 응답하도록 하며,혹시 전과 같이 외딴집에서 떨어져 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숙종실록』 1년 9월 26일 (p204)
마을에 창고가 있는 것이 옛 제도이다. 각 리(里)와 각 통에서 각자 그 힘을 내어 재물과 곡식을 한 면 가운데에 합해 모아 놓으면,본읍(本邑)도 힘이 닿는 대로 이를 도와서 상평제(常平制)를 행하게 해서 혹 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면서 조적(耀糴: 원곡과 이자)으로 이식을 늘려서 흉년에 진휼하는 자본으로 삼는 것도 일에 합당하다. (p204)
통 안의 사람 중 남정(男丁) 16세 이상인 자는 반드시 신상 호구(身土戶口)가 있으니 어느 도(道),어느 현읍(縣邑),어느 면(面), 어느 리(里)에 살고, 맡은 직역(職役)과 성명, 나이 등은 어떻게 되는지를 두꺼운 종이에 써서 이정(里正)과 리(里)의 유사(有司)가 적고 관청에서 도장을 찍어 출입할 때에 주머니에 차고 다니게 한다. 『숙종실록』 1년 9월 26일 (p205, p206)
호포법이란 모든 호(戶)가 군포, 즉 병역세를 내자는 것이었다. 현종 15년(1674) 7월 양반 유생들에 게도 군포를 받자는 논의가 일었다. 그러자 대사헌 강백년이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어렴풋이 들으니 조정에서 유생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려고 한다는데 법령을 반포하기도 전에 여러 사람이 의혹하고 있습니다. (……) 한가롭게 노는 선비에게 군포 한 필씩을 내게 함으로써 많은 군정(軍丁)이 도망가면 그 이웃이나 가족에게 대신 씌우는 폐단을 없애는 것은 대략 보면 편리하고 좋은 것 같지만 신은 이익은 아주 적고 손해는 아주 크다고 생각합니다. (p216)
왜 그러냐? 하면 국조(國朝) 3백 년이래 선비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선비의) 이름을 빙자하여 군역을 면한 자가 없지는 않지만 구별하기가 어려워서 전부 선비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서로 섞어서 똑같이 군포를 받아들이게 되면 (선비들에게도) 군역을 정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p217)
전에 시행하지 않았던 일을 오늘날 갑자기 시행하면 반드시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니 일을 할 때 처음에 계획을 잘 세우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묘당(廟堂: 의정부)에 물으시고 또 밖에 있는 선비 출신의 정승(儒相)에게 의논하시고 여러 의견을 모아 절충하소서. 『현종실록』 15년 7월 13일 (p217)
그런데 윤휴가 주장한 것은 호포제를 바탕으로 한 구산제(口算制)였다. 이는 더 개혁적인 것으로 호포제는 양반 사대부도 모두 군포를 내자는 방안이지만, 구산제는 양반 개개인의 숫자를 조사해 모두 군포를 내게 하자는 법이었다. 윤휴는 이러한 법들의 주장과 함께 당시 가난한 백성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설명했다.
도망쳤거나 죽은 자도 모두 면제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씌우기 때문에 그 집이 이미 부서지고 그 사람의 뼈가 이미 썩었는데도 고아나 과부,외로운 홀아비 중에서 요행히 생존한 자에게 예전처럼 징수를 독촉하고,한 사람이 도망가거나 죽으면 그 해가 이웃까지 미칩니다. 『숙종실록』 3년 11월 21일 (p222)
허적과 김석주 등 서인과 탁남의 강력한 반대로 윤휴가 주장한 법은 시행조차 되지 않거나, 시행 후 바로 폐지되는 등 무산되었다.
차별 철폐를 주장하다
윤휴는 대부분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서얼(庶孼),즉 서자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는 출사 직후인 숙종 1년(1675) 1월 23일 9개 항에 걸친 시국 현안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는데 그 8조에 서얼 허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울과 지방 높고 낮은 벼슬아치의 자제와 이미 출신(出身: 과거 합격)했거나 아직 출신하지 못한 양반의 서얼(庶孽)들을 총부(總府)에 배속시켜야 합니다. 사방의 특이한 재능을 지닌 자와 수령들이 쓸 만하다고 상서(上書)한 사람들을 모두 총부에 소속시켜 한(漢)나라 때 조서를 기다리던 금마문(金馬門)의 공거(公車)처럼 그들을 번(番)을 나누어 직위(直衛)하게 하고,또 그들의 도와 기예를 평가하여 기용하거나 내보내는데,그 중 뛰어난 자를 뽑아 조정의 낭료(郎僚)와 백리를 다스리는 수령으로 삼아 조종조 (祖宗朝)의 오위병(伍衛兵) 제도를 차츰 회복하도록 하소서. 『백호행장』상 을묘년 (p238)
당연히 대신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허적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나라 재상(宰相)의 자제는 좋은 집에 편안히 살면서 독서하는 것이 일이므로 비록 홍문랑(弘文郎: 홍문관 낭관)이라 해도 괴롭게 여기는데,하루아침에 총부랑(總府郎)이라는 이름으로 금군(禁軍)과 일체 (一體)로 하면 시끄럽고 어지러울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p239)
북벌대의를 위한 군사 강화
서인 중에서도 윤휴의 개혁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이 있었다. 김상용의 손자인 김수홍이었다. 그는 숙종 1년(1675) 6월 15일 서얼 허통과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당론을 뛰어넘는 소신을 지녔던 당대에 매우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윤휴가 주장한 것들은 시행조차 되지 않거나, 시행되더라도 바로 폐지되었지만, 만과(萬科), 즉 만인과(萬人科)는 실행되었다. 숙종 2년에 시행한 만과는 그 급제자 수가 대단히 많았다. 훗날인 숙종 7년(1681) 2월 영부사 송시열의 사직 상소에는 만과의 급제자 숫자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나온다.
“무인 만과도 오늘날 처리하기 어려운 큰 폐단이 되었는데,그 숫자가 2만 명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모두 서울에 모여 조용(調用: 임용) 되기를 바라다가 그렇지 못하면 원망하고 또 원망하니 서울의 쌀값이 비싼 것도 이 때문이고,농민이 점차 줄어드니 이는 진실로 식자들이 깊게 염려하는 바입니다.” 『송자대전』16권「일을 논한 소차(論事箭)」 (p268)
숙종 2년에 치른 만과는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낸 무과 시험이었다. 상민들의 응시를 허용했기 때문에 많은 급제자를 낼 수 있었다. 상민들의 응시에 대해선 사대부뿐만 아니라 청남으로 분류되었던 미수 허목도 반대했다.
윤휴는 북벌을 단행하려면 이를 전담하는 군사 지휘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숙종 1년(1675) 9월 6일 숙종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는 자리에서 체부(體府) 설치를 요청했다. 체부란 체찰사부(體察使府)의 준말로서 군부의 총사령부를 의미했다. 허적이 도체찰사가 되고, 부체찰사부는 김석주가 되었다. 김석주는 병조판서에 어영대장까지 겸직하고 있었다. 윤휴의 체부 설치 요청은 ‘조관’처럼 훗날 윤휴에게 죽음의 한 원인으로 되돌아온다.
“경의 추상(秋霜)같은 대절(大節)과 백일(白日)같은 충성에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만,그 세력의 같지 않음이 하늘과 땅의 차이 같은데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우선 정지하고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그 실상을 먼저 하고 명분을 뒤로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숙종실록』 2년 1월 8일 (p287)
사라지는 북벌 의지, 실패한 개혁
윤휴의 바람과는 달리 숙종은 이미 북벌에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윤휴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윤휴는 자신과 노선이 같은 사람들은 쫓겨나고 자신이 제기한 개혁 정책들이 모두 무력화되는 현실에 불만을 표시했다.
“오늘날 조정의 책벌(責罰)하고 전벌(剪伐: 나무를 뱀, 쫓아냄)하는 자들은 신이 일찍이 칭찬한 자들이며,그 어지럽게 개정하는 일들은 신이 일찍이 건백(建白: 의견을 올림)한 일들입니다. 신이 무슨 얼굴로 다시 조정의 말단에 서겠습니까?” (p294)
윤휴는 자신의 개혁 정책이 모두 폐기되면서 북벌에 대한 의지 또한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근일 국가에서 시행했던 오가작통제와 지패법은 진실로 역(役)을 균등하게 하여 폐단을 없애려는 계책입니다. 신도 참여했는데, 시행 반년에 원망하고 소동이 일어 다시 시행할 뜻이 없어졌습니다.” 『숙종실록』 2년 6월 21일 (p294)
오가작통법와 지패법은 실시하면서도 호포제는 극력 저지해 백성에게 되레 부담만 되고 만 것이다. 만과도 마찬가지였다.
"또 과거에 급제한 무사를 졸예(군졸)와 같이 봐서 강등시켜 대오(隊悟: 군졸부대)에 편성해 군문(軍門)에 속하게 하니(만과 응시를) 원망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쌀을 공부(公府)에 바치게 하여 그 재물을 빼앗으니 국가의 체통(國體)를 크게 잃었습니다. 체부(體府)와 만과(萬科)는 모두 신이 건백한 것이니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p294, p295)
국가에서 장교를 뽑는다 해놓고 급제자들을 졸병으로 편입시키고 이들에게 군포를 거두었으니 사기를 친 셈이었다. 그러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백성은 윤휴를 원망할 수 있었다.
윤휴는 자신의 북벌대의를 위한 개혁들이 이루어지지 않자 여러 차례 사직도 한다. 그때마다 북벌과 개혁에는 관심도 없는 숙종은 윤휴를 구슬리고, 윤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조정에 들어오기를 반복하다가, 숙종 6년 5월 20일 서대문 밖 여염집에서 사약을 받고 운명을 마쳤다. 윤휴가 남길 말이 두려워 금부도사 홍수태는 유언도 거부했다. 야사에는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p9)
이상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 윤휴가 주장한 북벌대의와 개혁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시대의 이단아이자 대개혁가
윤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어떤 인물이었기에 서인들이 무리하게 혐의를 조작해 가며 죽여야 했는가. 윤휴는 예송논쟁 때 송시열 등을 통해 드러났듯이 서인들이 생각하는 군약신강, 즉 ‘사대부의 나라.’를 정상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다. 윤휴는 북벌과 그 북벌을 뒷받침할 대개혁을 위해선 강력한 왕권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서인들과 허적 등 탁남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윤휴는 김석주가 부체찰사가 되자 숙종에게 이의를 제기했을 정도로 임금의 권력이 분산되는 것을 우려했다.
“김석주는 방금 대사마(大司馬: 병조판서)가 되었고, 어영대장(御營大將)도 겸직하고 있는데,이제 또 부체찰사까지 겸직한다면 권력이 너무 무거울까 합니다.” 『숙종실록』 5년 11월 3일 (p279)
당연히 숙종은 윤휴를 꾸짖었다. 그것도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이다.
정직한 윤휴는 서인들처럼 비열하게 뒤에서 음모를 꾸미지도 못했고, 이미 숙종이 윤휴에게 등을 돌렸을 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너무 올곧았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순진했다. 이런 그의 기개 있는 진정한 선비 정신이 죽음을 앞당긴 건지도 모른다. 서인들은 자신들과 달리 실제적인 북벌을 주장하고, 북벌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 즉 신분제 타파 등 다양한 개혁 정책까지 주장한 윤휴가 당연히 곱게 보였을 리는 없었다. 탁남이나 서인, 즉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윤휴의 생존 자체가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거대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감히 평등을 외치다니’, ‘감히 양반에게도 군포를 내라고 하다니’, ‘감히 건방지게 진짜 북벌을 외치다니’,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감히 주자를 논하려 하다니’였을 것이다.
윤휴는 다양한 경서뿐만 아니라 병서,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심지어 여성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쳤던 시대의 이단아이자 대개혁가, 쉽게 말해 그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했을 엄청난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찍혔고, 많은 친구에게 절교당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다름없었다.
시대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그렇다면 윤휴의 모든 언행이 옳았다고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거기엔 무리가 있다. 윤휴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타협의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삶이라는 게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권력 다툼으로 치열한 조정에서 윤휴의 행동은 정치적 미성숙을 그대로 보여준다. 윤휴의 주장이 옳았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주장을 숙종에게, 그리고 서인들에게도 받아들이게 하려면 윤휴도 역시 그들처럼 자신만의 무리를 만들고 키워서 차분하게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긴 준비를 하기에는 윤휴의 등용기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거기엔 윤휴 자신이 임금의 부름을 오랫동안 외면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만약 윤휴가 김석주를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들고 더 많은 이를 끌어들여 서인들에 맞섰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기에는 불의를 참을 수 없는 윤휴의 성격이 김석주의 공작정치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윤휴가 주장한 정책들은 조선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과연 그 시대와 양반 사대부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면을 간과한 것도 사실이다. 조금은 윤휴가 양보해서 고지식한 서인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작은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뜻을 위해서 역시 좀 더 일찍 조정에 나가서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탤 수 있는 다른 힘있는 대신들이나 신진세력들을 포섭했어야 했다. 그리고 윤휴는 삼번의 난을 보고 시기가 좋은 점만 생각한 나머지 너무 급하게 밀어붙였다. 그래서 미쳐 준비가 안 된 서인과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도 더 심했을 것이다. 결국, 윤휴의 올곧은 성격과 성급함에 송시열처럼 자신의 주장에 집착하는 고집이 더해진 것이 언젠가 되돌아올 죽음의 부메랑을 완성한 격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윤휴가 북벌이 없었더라도 대개혁을 주장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만약 그가 그냥 포의로 남아 시골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고 조정에는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억울하게 사사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300년 동안 지속한 금기를 깨다
윤휴가 죽자 서인과 노론은 윤휴에게 동조했던 사람들은 무조건 비난하고 파묻고, 윤휴의 업적과 행적 또한 왜곡하고 날조했다. 그 결과 윤휴라는 이름은 금기가 되어 침묵의 감옥에 갇힌 채 300년 이상 묵과됐다. 그 감옥은 300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긴 세월에도 전혀 녹슬지도 않고 아직도 건재했지만, 다행스럽게도 300여 년 만에 그 침묵의 감옥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면회를 청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덕일 소장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역사란 그런 것이다. 시대에 따라 부침을 달리하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줄거리이지 또 해득하여 보는 사람의 재미이지 않은가. 이 세상에 불변의 진리는 없다. 모든 것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윤휴에 대한 역사적 위치, 그리고 윤휴의 사상적 가치에 대해 변혁이 와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시기다. 더불어 송시열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도 같이 이루어져야 공정할 것이다. 그 둘은 한때를 같이한 명망 있는 유학자이기도 하거니와 역시 한때를 같이한 친구였지 않은가.
이 책보다 몇 년 전에 출판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와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의 허적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물론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 두 책을 같이 보기를 권한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허적은 ‘화합형의 정치가’로 표현된다. 그러나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는 시종일관 윤휴의 북벌과 개혁을 반대하면서 김석주의 눈치만 살피는 것으로 나온다. 허적은 그렇게 김석주를 철석같이 믿다 배반당하는 순진하다 못해 미련한 인물로까지 보인다. 청남과 탁남도 서인들이 분류한 것일 뿐이지 실제로 청남과 탁남의 공통점은 예송논쟁에 대한 의견뿐이었다.
이러한 허적의 평가에 대한 변화가 이덕일 소장이 끊임없는 배움에 대한 갈증과 진지한 학문적 의문을 품는 학자의 기본을 지키고 있다는 증거라면 참말로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그에게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심정적 변화에 따른 변덕이라면 그것은 실로 역사학자로서 용서받기 어려운 추태일 것이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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