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 천이난 | 혁명적 이상을 품은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고백
신념과 정신적 가치가 없어진 국가와 민족 • 사회는 풍부한 물자를 지녔다 할지라도 그 사회에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644쪽)
무려 10년이나 지속한 연극, 그것은 또 하나의 유인책이었을까?
문화대혁명은 장장 10년간 벌어진 ‘연극’이다. 이 연극에서 사회 기층 배우들의 변동이 기본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세와 분위기에서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승리자 혹은 실패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119쪽)
10년이나 지속한 연극, 이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배우들에게 패배의 쓴 고배와 승리의 달콤한 축배를 모두 안겨 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봄처녀 변덕만큼이나 지긋지긋한 변덕의 연속이었다. 결코, 조연조차 될 수 없었던 순진한 인민들은 마오쩌둥(毛澤東)과 당 중앙의 지시대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의 실권파와 지도간부, 그리고 관료주의에 조반했다. 1949년 해방 후 17년 동안 황제와 같은 위엄으로 인민의 머리끝에서 신처럼 군림해 왔던 당 간부들의 부정부패와 부당한 대우, 경직된 관료주의로 산처럼 쌓였던 인민들의 원한과 분노는 불붙은 화약고처럼 순식간에 폭발했다. 인민들의 뜨거운 호응 아래 젊은 청년들 위주로 조직된 조반파(造反派)들은 잠시나마 주연으로 올라서며 순조롭게 권력을 장악해 갔다. 당 간부와 관료들은 별다른 대꾸도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중앙의 지시였고 이것이 대세였다. 10년이 지났다. 자격을 갖지 못한 자가 대세에 떠밀려 주연 자리를 꿰찬 대가는 가혹했다. 조반파는 철저하게 몰락했으며 한때 우렁찬 ‘타도’의 구호 속에 쓰러졌던 관료들은 원래의 지위로 돌아왔다.
문화대혁명은 아래에서 곧게 위로 내뻗은 일반적인 혁명과는 달리 위에서 아래로, 그것도 중간은 훌쩍 건너 띄고 진행되었으며,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조반파는 꼭두각시처럼 중앙의 지시를 거역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변덕스러운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정책을 고려해본다면 조반파의 몰락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의 유인정책인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의 하나로 쌓이고 쌓인 인민의 원한과 분노를 잠시 마음껏 폭발시켜 풀어줌과 동시에 훗날 문제가 될 수 있는 극좌분자를 미리 색출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공안 특유의 기만정책인 ‘솔직하게 고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엄벌에 처한다.’의 전국 버전인지도 모른다. 정직하게 중앙의 지시에 따라 마오쩌둥과 중앙을 제외한 기존 권위에 혁명적으로 반대한 조반파는 결국 철저하게 몰락했으니 말이다.
몰락한 자의 이야기, 그것은 채워지지 않은 역사의 빈자리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말하면 희희낙락 웃으며 고문과 살인, 약탈을 즐기는 홍위병들이 떠오른다. 자신의 할아버지뻘 되는 노간부나 노장군에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조리돌리는 것은 약과이며, 시안의 ‘홍색 공포대’ 홍위병은 한 교사에게 휘발유를 부어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으며, 베이징의 ‘붉은 행동위원회’ 홍위병은 부르주아로 지목된 베이징대학 병원의 외과 의사의 배를 수술용 메스로 가른 다음 간장과 고춧가루 물을 부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죽게 만들었다. 농촌 등지에서는 지주, 부농분자로 몰린 가족과 그 친족들을 살육하는 참극도 발생했다. 또한, 조반파의 파벌 싸움과 내분으로 발생한 무투(武鬪)는 탱크까지 동원되는 웃지 못할 현대전으로 치닫기도 했다. 1980년 12월 20일 『베이징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1966년 8〜9월간 베이징에서 맞아 죽은 무고자만 1,772명에 달한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일찍이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은 없었다. 혁명의 불을 지피고 하늘 높이 혁명의 뜨거운 깃발을 휘날리려면 응당 누군가는 휘발유처럼 발화성이 강한 피를 흘려야 한다. 그것이 소수가 되었든 다수가 되었든 그것이 혁명의 비극이고 본질이며 힘이다. 비록 문화대혁명이 위에서 아래로, 일반적인 혁명의 궤도에서는 조금은 벗어났지만 그래도 이에 호응한 학생과 노동자, 인민들은 유감없이 혁명의 기질을 발휘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어 온 사회주의 이상과 기존의 부당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가차없이 온몸을 던졌고 그것은 무투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많은 젊은이의 피로 증명되는 듯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역사는 문화대혁명을 외면했고, 조반파는 철저히 몰락했다. 역사에 실패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듯, 몰락한 자의 이야기는 들어주는 이가 없다. 하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몸소 조반파의 극심한 부침을 진저리나도록 경험한 천이난(陳益南)의 회고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青春無痕:一個造反派工人的十年文革)』를 들어보면, 몰락한 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압박하고, 그러면서 채워지지 않은 역사의 빈자리를 어떻게 되돌아보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혼란, 변화무쌍했던 문화대혁명의 한 역사적 단면
자유저술가 천이난(陳益南)은 문화대혁명 초기 조반파에 가담했을 때만 해도 일개 수습공이었나 혁명의 기류를 타고 단번에 3천 명이라는 회사 전체 직원과 간부들이 주목하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그가 한번 외치면 수많은 사람이 호응하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덕분에 높은 간부들이나 수장들만이 탈 수 있는 일등 침대칸도 타게 된다. ‘청년근위군’이라는 전문 무투 조직에 참여했을 때는 총기번호 041949의 보병총으로 무장한 의젓한 혁명군이 되기도 했다. 다른 순수한 조반파 동지들처럼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향해 혁명에 뛰어든 천이난은 문화대혁명 기간 내내 혁명의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켰고 그 결과 다른 적극 분자들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혈기왕성했던 그에게 문화대혁명은 혹독한 정치적 시련이자 값비싼 인생 수업이었으며, 마오쩌둥 사상과 공산당 지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바탕으로 의식화를 고취할 수 있었던 성숙의 시간이었다.
천이난이 남긴 이 한편의 조반파 노동자의 장대한 서사시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변화무쌍했던 문화대혁명의 한 역사적 단면을 보여준다. 혼란을 틈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혁명에 참가하는 척했던 일부 협잡꾼들이나 무뢰배들, 순수한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혁명에 참가한 젊은이들, 권력의 맛에 흠뻑 취해 폭력을 행사한 홍위병 등 이 모두가 문화대혁명의 일부이기에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어느 한 단면으로 문화대혁명 전체를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부분으로 전체를 유추해볼 수는 있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이자 조반파의 핵심 우두머리로서 10년이라는 절대 짧지 않은 문화대혁명의 대장정을 체험한 천이난의 회고는 문화대혁명이 인민에게 실제로 어떻게 다가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 실제적이고 국지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력이 휘두른 역사적 회오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한 개인으로서 체득한 그의 소중한 경험이 진득하게 녹아 있는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은 문화대혁명의 참된 역사를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조각이다.
마치면서...
문화대혁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문화대혁명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 뭐라고 쉽게 단정 지으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문화대혁명의 험난한 역경을 겪은 인민에 대한 모욕이자 편협한 지식의 한계를 들어내는 오만일 수도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의 성공만을 중시하는 틀에 박힌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머리로 천이난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을 해석하려 든다면 그것은 무모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혁명 유토피아 건설을 향한 영웅적인 희생정신으로 조반파에 가담한 많은 청년의 진심을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적 유물로 오해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가슴으로 이 책을 읽고 느끼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혁명의 폭풍 한복판에 과감하게 뛰어든 열혈 청년의 파란만장했던 문화대혁명 체험을 담은 이 회고록은 진정한 호소이자 쓸쓸한 감동이며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운명의 쓰디쓴 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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