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8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태어난 사람?, No!

The Lost Language of Plant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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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 태어난 사람?, No! 우리는 심어진 사람

원제: The Lost Language of Plants by Stephen Harrod Buhner
생명사랑의 기질은 토착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 기질이 유기적으로 발현되면 생태지식이 생겨나고,그러면 자연세계에 대한 일련의 정보들을 얻게 된다. 생명사랑은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진화의 산물이므로,문명의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들처럼 끈질기게 계속해서 발현될 것이다.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The Lost Language of Plants)』, 117쪽)

미신 같은 이야기 속에 숨은 식물 세계의 비밀

꿈속에 나타난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흙 속에 손을 묻는 순간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깨달으면서 잃어버렸던 삶에 대한 의욕을 다시 찾은 여자. 식물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아가씨. 집에서 기르던 식물이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려는 것 같다며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여자. 미신처럼 들리는 이런 경험담을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독자 중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더 나아가 식물이 그들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이웃하는 다른 생명체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때론 아주 먼 곳으로 이사도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니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와는 달리 우리의 조상은 식물과 소통하며 살았다. 아직도 전통적인 약초치료법을 고수하는 원주민들은 아플 때면 꿈속에서 받은 계시를 통해 몸에 필요한 약초를 찾는다. 그들이 식물을 채취하러 나갈 때 식물에 통사정을 설명하면서 도움을 구하면 필요한 약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또한, 필요한 약초를 찾았다고 해서 성급하게 꺾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약간의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된 식물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때론 간소하게나마 제물을 바치고 약초를 캤다.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 과학은 원주민들이 간직해온 약초치료법은 단지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로 얻은 지식일 뿐이라며 미신으로 몰아세우지만 그러한 가정을 증명할 길은 없다. 혹은 그렇더라고 해도 몸이 아플 때 식물을 먹으면 치유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누가 해주었을까? 그저 이 모든 것이 운이 좋은 인류가 잠시나마 지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연과 행운이 겹친 덕분일까?

The Lost Language of Plants by Stephen Harrod Buhner

인류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느리고 아득히 먼 식물의 언어

현대 인류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긴 족보를 가진 식물은 지금 당장 지구 상에서 인류가 사라진다면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10년 묵은 체증이 확 풀리듯 시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을 비롯한 지구 상의 모든 동물은 식물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지구에 뿌리를 내린 ‘자연’이라는 생태계에 식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식물과 인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테리아라는 공통 조상을 만나듯 식물과 인류는 먼 친척이다. 식물은 동물 생태계에 필요한 각종 양분을 제공하고 공기 중의 산소를 일정량으로 유지해 준다. 그리고 식물과 그들의 다채로운 이웃들은 동물의 배설물과 시체를 자연의 대순환 속으로 흡수해 죽음과 삶의 순환을 영생시킨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식물이 인류에게서 분리시킨 분석과 통제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 서로 공존을 모색해야 할 협력의 대상임을 말하고 있다.

식물은 그들의 언어인 화학물질을 통해 경이로운 자연을 훌륭하게 이끌어 왔다. 비록 식물이 잎이나 줄기 등에 상처를 입으면 항생제와 항염제를 생성해낸다는 것이 식물이 통증을 느낀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해도, 자신의 몸에 어떤 상해를 입었을 때 적절한 반응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생존욕구가 사람만큼이나 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숨을 쉬고 또한 언어를 통해 주변의 곤충이나 박테리아 등 이웃들과 소통하면서 지혜롭게 공존의 삶을 선택해 왔으며 그들도 역시 죽음 앞에서는 방법만 다를 뿐 인간처럼 저항한다. 사람이 식물의 뿌리를 뽑는 것은 순간이지만, 식물의 언어와 행동체계는 상당히 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관념으로는 영영 그들의 생존 욕구와 투쟁을 눈치챌 수 없다.

그러나 식물은 사람과는 다르게 관대하다. 해충이 자신의 잎을 먹어도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면 굳이 방어물질로 저항하지 않는다. 비록 그 식물에는 해충으로 작용하지만, 가이아라는 생명의 대바다에서 보면 먹히는 식물이나 식물을 먹는 해충이나 유기적인 구성원으로서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는데 일조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 또한, 흔히 인류가 자연의 법칙으로 일컫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을 어설프게 이해한 사람들이 인류 문명에 만연하는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멋대로 만든 말이다. 자연에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과 그 이웃들은 서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과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법칙을 지켜왔으며 이 법칙에 거스르는 생명체만 도태될 뿐이다. 이 진화의 법칙에서 인류라고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이것이 가능했기에 수억 년 이상 경이로운 자연의 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우리는 자연에 대해 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몇 가지의 유용한 기술도 얻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찬탄을 금치 못하던 우주의 경이로움에 대해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우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막연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과학은 식물의 광합성조차 모방할 수 없다. 소통과 공생으로 수억 년을 지켜온 자연의 경이로움과 그 복잡한 생태적 환경에 대해 솔직히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기계론적 인식론에 묻힌 과학자들에게 자연은 인류의 문명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소모적인 자원일 뿐이다. 그들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몇 가지 지식과 도구에 득의양양해하며 이제는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실제로 시도했다. 자본은 사람을 착취했고, 자본과 결합한 과학은 자연을 착취했다. 그나마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고통을 호소할 수 있었기에 값싼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었지만, 식물이 설령 그러한 호소를 보여줬다고 해도 식물의 세계는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거북이보다 느리고 오대양처럼 넓다. 또한, 식물이 착취를 피해 멀리 이동하기에는 인간의 착취는 체계적이고 기술적으로 빠르게 진행이 되어 식물로서는 빠져나갈 틈이 없다. 결국, 인류의 오만은 인간의 시간개념으로는 영원에 가까운 세월의 회복 기간이 필요할 정도로 무참히도 자연을 파괴했다.

The Lost Language of Plants by Stephen Harrod Buhner

자연과 분리된 삶에서 ‘힐링’과 ‘웰빙’은 ‘개소리’일뿐!

생명사랑과 생태지식의 상실로 우리는 상처를 입었다. 이것은 당연히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과 단절한 대가로 얻은 부끄러운 상처다. 이 상처가 얼마나 깊숙이 우리 몸에 새겨져 있는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과학의 이기로 잊었던 식물과의 소통법을 다시 되새기도 싶다면, 인위적으로 그럴듯하게 꾸며진 공원이 아니라 진짜 숲을 가보면 알 수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식물이 호흡하는 숲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청량감, 상쾌함, 그리고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은 우리가 식물들과 함께 호흡하며 소통했던 때가 있었음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해준다. 식물들이 내뿜는 수많은 화학물질이 우리에게 계속하여 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당신은 황폐한 도시에서 너무나 지쳤어요. 이제 제가 그것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어요. 제게 조금만 더 가까이 오세요. 저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설령 당신이 저를 해친다고 해도 말이에요.’라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숲 속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 몸이 먼저 느낀다. 그만큼 우리 몸과 식물은 때려야 땔 수 없는 사이이다.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The Lost Language of Plants)』는 말한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빈자리가 있다. 식물들만이 채워줄 수 있는 자리. 나무나 돌, 곰이 있어야 할 자리,지구 상에서 100만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진화해온 생명체들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자리. 이 빈자리를 채우지 않으면,우리는 반쪽짜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결코, 완전히 인간이 될 수 없으며,치유될 수도 완전해질 수도,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결코,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377쪽)

‘태어난’ 사람이 아닌 식물처럼 ‘심어진’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Stephen Harrod Buhner)가 쓴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를 읽은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알맹이 없는 ‘힐링’과 ‘웰빙’은 이득에 눈이 먼 자본이 집요하게 부르짖는 개소리라는 것과 자연이 식물 없이 존재할 수 없듯, 우리가 식물 없이 살아갈 수 없듯, 자연과 분리된 삶에서 ‘힐링’과 ‘웰빙’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리뷰는 2016년 6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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