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 J.M. 쿳시 | 제국의 시간을 지탱한 폭력과 야만의 역사
원제: Waiting for the barbarians by J.M. Coetzee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28쪽)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지대의 한 성을 30년 넘게 관리해 온 시골 치안판사인 ‘나’는 사막의 폐허 속에 파묻힌 오래된 유물들을 수집하거나 영양과 토끼를 사냥하면서, 때론 창녀와 시간을 보내는 등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며 은퇴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겐 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야만인들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크게 문젯거리가 될 것도 없을뿐더러 가끔 일어나는 산적질은 평화를 깨트릴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때그때 적당히 보복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에서 파견된 정보부 소속의 죨 대령이 오면서 ‘나’의 안일한 삶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죨 대령은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하고 서로 연합하고 있다며 조만간 제국이 야만인들과 전쟁을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나’는 얼마 전에 있었던 야만인들의 습격이 있은 직후 근처에서 잡아들인 노인과 소년을 대령에게 맡긴다. 노인은 종기로 고생하는 소년을 위해 의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소년은 팔뚝에 감긴 헝겊을 풀어 부은 종기를 보여준다. ‘나’는 이들이 무고하다고 생각하지만, 대령은 두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령은 이들을 고문한다. 고문 끝에 노인은 죽고 소년은 자백한다. 대령은 고문의 상처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소년을 안내자로 삼아 부대와 함께 성을 떠나고 행군 중 만나는 이방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 ‘나’는 대령에게 잡혀온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토착민들을 변호하다 불온한 자로 찍힌다.
대령은 붙잡아 온 토착민들을 심문한 다음 방면한다. 그들 중에는 고문 끝에 죽은 한 남자가 있었고 역시 고문으로 거의 눈이 멀고 발목이 부러진 그 남자의 젊은 딸도 있었다. 그녀는 혼자 도시에 남아 거지처럼 동냥하며 살아가다가 ‘나’의 눈에 띄게 된다. 그녀를 동정한 ‘나’는 그녀를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자리를 준다. 그리고 밤마다 그녀와 같이하며 그녀의 몸을 씻겨주다가 황홀경에 빠지며 잠이 든다. 대령이 수도로 보고하러 간 자리를 비운 어느 날 ‘나’는 그녀를 가족에게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고 고생 끝에 유목민과의 접촉에 성공해 그녀를 무사히 보내고 마을로 돌아오지만, 그 일이 빌미가 되어 ‘나’는 적과 내통한 배신자로 낙인 찍혀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필자는 이전에 읽었던 J.M. 쿳시(J. M. Coetzee)의 다른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에서 얻은 메시지의 연장 선상에서 이 작품을 이해했다. 즉, 서구가 철석같이 믿는 이성과 그 이성의 단짝인 합리주의가 합작해서 나온 생산물인 식민주의에 기생한 야만적 폭력의 역사로서 말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배경 역시 제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다. 그리고 그곳을 지배하는 ‘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랑하는 그저 그런 치안판사다. 『어둠의 땅』에서처럼 토착민들은 야만인으로 불리며 멸시받는다. 수도의 정보부에서 온 죨 대령은 굴비를 엮듯 철사로 야만인들의 뺨과 뺨을 꿰어 엮기도 하고 잡아온 토착민들을 고문하고 죽이며 불구로 만든다. 또한,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여 시민을 자극하고 야만인과 전쟁을 벌인다. 왜 대령을 비롯한 제국의 앞잡이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굳이 파괴하면서까지 야만인을 토벌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제국이 만들어낸, 그리고 자신을 그 굴레에 가두어버린 역사적 시간 때문이었다. 제국의 시간은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 개념이 아니라 흥망성쇠의 시작과 끝,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원제 아래에 있는 인용문 참조). 제국은 제국의 유지와 지속적인 번영을 위해 서구 이성은 폭력을 합리화한다. 야만인이 아닌 야만인을 강제하고자 스스로 야만인보다 더욱 야만인 같은 야만인이 된다.
죨 대령이 패전하고 물러나면서 ‘나’는 원래의 지위를 찾고 도시는 다시 평화를 찾는 듯하다. 그러나 제국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 또 다른 ‘죨’은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는 그동안 정체된 역사를 강제집행할 것이며 민중들은 다시금 수난을 당한다. 이것이 ‘나’가 저주하는 역사의 굴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다고.
이러한 식민주의적 폭력의 알레그로뿐만 아니라 우유부단하고 나태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 ‘나’의 성욕의 정체성도 무척 흥미롭다.
그는 젊었을 땐 여자라면 다 좋았을 정도로 난봉꾼이었다. 시시각각 뜨겁게 치솟는 젊음의 방탕한 욕구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고 그래서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인이 된 ‘나’는 죨 대령의 고문에 의해 반쯤 눈이 멀고 발목이 분질러진 소녀를 만나면서 표류하는 어선 같은 좌초된 욕망과 마주치게 된다. 욕망은 매일 떠오르는 하늘의 태양처럼 솟구치지만, 달처럼 차가우며 별처럼 희미하다. 그렇게 흐느적대는 욕망은 뚜렷한 목적이 없다. 그래서 해결하기는 더더욱 어렵고 ‘나’는 당황한다.
매일 밤 의식처럼 그녀를 씻기고 주무르지만 ‘나’는 만족하지도 못하고 그녀 역시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성적 욕망만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 그의 욕망을 정체시키고 있다. 그것이 무언지는 ‘나’도, 그리고 저자도, 방관자인 독자도 모른다. 권력과 돈으로 소녀의 육체를 얻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은 얻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 보내는 ‘나’는 공허하고 공허한 무언가 외에 달리 남는 것이 없다.
독자에게 좋은 인상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남긴 작품은 결코 한 번의 정독으로만은 끝나지 않는다. 훗날 다시 읽는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읽고 또 읽어도 작품의 감흥은 샘솟듯 한없이 솟아 흐르며 매번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좋은 작품은 이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울 뿐만 아니라 첫날밤을 맞이하는 새신랑처럼 독자를 설레게 한다. 필자에게도 그런 작품들이 꽤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그렇고,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 그러하다. 한국 문학 중에서는 박태원과 염상섭이 있으며 조선작도 있고 박완서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리 두 번을 읽은 작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를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필자는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내리 두 번을 읽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첫째 이유는 작품의 난해함이다. 달리 말하면 작품의 심오함을 한 번 읽고는 대충으로라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읽었던 책 중에서 난해한 작품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필자의 저조한 독해력과 덜떨어진 집중력(이것은 주변의 그 빌어먹을 소음 때문이다!)의 한계로 그저 어렴풋이 이러한 작품이구나 하는 정도에 만족하며 대충대충 얼렁뚱땅 잘 넘어왔는데 왜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두 번을 내리읽어야 했을까. 그것은 참말로 무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처음 읽고 나서는 작품에 숨겨져 있는 오묘한 무언가를 놓친 것 같아 조바심이 들었고, 두 번째 읽고 나서는 그 오묘한 무언가는 애초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허무하기도 했다. 그저 막연한 뭔가를 찾아 안갯속을 방황하는 느낌이다. 방황하다 지치면 포기하고 다음 문장, 다음 단락으로 이어갈 수밖에 없다. 운이 좋으면 몇 장 못 넘겨서 숨은 뜻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끝내 모르고 넘어간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참으로 복잡미묘하다. 두 번 읽으면 좀 더 이해할 줄 알았더니 새로운 미로만 발견한 셈이다. 새로운 미로의 출구를 찾으려고 다시 작품을 찾는다. 그랬더니 또 다른 미로가 있다. 그렇게 미로와 그 출구를 찾고자 하는 작품과 독자와의 씨름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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