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 철부지 청년에서 혁명가로 채색되어 가는 드라마 같은 여정
원제: The Motorcycle Diaries: Notes on a Latin American Journey by Ernesto Che Guevara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임을.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244쪽)
의사에서 혁명가로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평가를 받은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그가 의대를 다닐 무렵까지만 해도 가난과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험난한 무장 투쟁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기미는 도통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따지고 들던 타고난 정의감과 고등학교 시절 무기 없이는 데모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는 투쟁 의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청년기에 접어든 젊은이들이 그렇듯 자신이 가야 할 길 앞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혈기 왕성하고 열정이 끓어 넘치는 한 젊은이로서 민중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아쉬움과 가난 때문에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을 도와주고자 의사의 길을 선택한다. 훗날 그가 의사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화학자이자 의사인 친구 알베르토와 1951년 12월 코로도바를 출발함으로써 시작된 기나긴 여정은 그 자신도 일지에서 밝혔듯 새사람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의사라는 직업도 민중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시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이다. 질병이 나타나는 증상만 다스리는 것으로는 병을 완치할 수는 없다. 완치를 위해서는 병의 근원을 밝혀내고 재발하지 않도록 밝혀진 근원을 뿌리 뽑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남미의 민중이 겪는 가난과 기아,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인 제국주의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혁명의 길이 될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편에 설 것을 다짐하다
체 게바라는 여행 초기까지만 해도 인상깊고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때마다 연방 감탄하며 그곳에 머물고 싶어한다. 언젠가는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안데스 산맥 호숫가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몰래 숨어 탄 산 안토니오 호에서 두 사람은 끝없이 펼쳐진 초록 바다를 바라보며 그들의 진정한 소명은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여행 초기까지만 해도 꿈 많은 청년다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던 체는 코르도바에서 출발한 지 6개월 정도 지나 들른 산 파블로 나환자촌에서 아래와 같은 고무적인 작별 연설을 한다.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을 여러 개의 불안정하고 실체가 없는 나라들로 쪼갠다는 것이 완전히 허구라고 믿고 있으며,이번 여행을 통해 이런 믿음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우리는 멕시코에서 저 멀리 마젤란해협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민족적 유사성을 가진 하나의 메스티조 민족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편협한 지역주의의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뜻으로,페루를 위하여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연대를 기원하며 축배를 제안합니다.” (217쪽)
짧지 않은 여행 동안 체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체 게바라는 발파라이소에서 잠시 신세 진 라 지오콘다 술집에서 종업원이었던 늙은 여자를 알게 된다. 그녀는 체처럼 천식환자였지만 제때에 치료받지 못해 이미 손쓸 방도가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심장질환으로 발전해 있었다. 의사로서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 체는 가난 때문에 가족마저 짐이 되고 생존경쟁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떤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 불쌍한 여자가 헐떡거리는 심장을 끌어안고 살기 위해 식당 종업원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던,바로 그 부조리한 체제를 타파할 변화 말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가난한 가족의 성원들은 가까스로 서로에 대한 적의를 감추고 살아간다. 그들은 더 이상 아버지,어머니,형제,자매가 되지 못하고 단지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부정적인 요소로만 존재한다. 혹시라도 그들 중 한 명이 환자가 되면 그는 부양해야 되는 나머지 가족들의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마련이다. (86쪽)
산 안토니오 호를 타고 도착한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에서는 제국주의 착취 현장을 목격한다.
냉혹한 효율과 무기력한 분노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함께 손을 잡고 그 거대한 광산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편은 생존 때문에,다른 한쪽 편은 이윤을 위해….
언젠가 우리는 광부들이 노동의 대가를 즐겁게 받아가고 먼지 낀 폐를 웃음으로 씻어낼 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101쪽)
체는 이들을 ‘생존 전쟁의 이름 없는 영웅들인 가난한 노동자들’이라고 부른다.
체는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에서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이 찬란했던 그들의 문명을 잊은 채 체념적이고 운명론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한다. 체는 그들이 과거의 영광에 자부심을 품고 정복자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원주민들은 백인들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뭔가 변화를 가져올 능동적인 삶을 살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그리고 착취에 찌들대로 찌들어 현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감각마저 잃었으며 그들의 아이들은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앙상한 모습으로 소심하게 기아를 선전한다. 거대 자본의 착취 때문에 만성적인 가난, 기아, 질병에 시달리는 부조리한 삶을 살면서도 개선하려는 의지보다는 고개 숙인 채 자포자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체는 깨닫는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임을.
<La Poderosa Museo Che Guevara / Lu Brito / CC BY-SA> |
철부지 청년에서 혁명가로 채색되어 가는 드라마 같은 여정
체 게바라는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The Motorcycle Diaries: Notes on a Latin American Journey)』에서 청년다운 낭만적인 기질을 마음껏 드러내며 한 편의 아름다운 로드무비처럼 남미를 경쾌하고 시원스럽게 질주하면서도, 경이로운 겉모습에 감추어진 삶의 이면에 드리운 암울한 그늘도 놓치지 않는다. 고대 도시가 남긴 흔적과 그 위에 새로 솟아난 식민시대 건축물 사이의 상스러운 조화는 그를 예술적인 감상에 빠트린다. 무기력한 원주민의 삶과 계급제도라는 부조리한 이념에 기반을 둔 현실의 질서에 굵직한 변화를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사라는 직업은 너무 작게만 느껴진다. 아직 철들지 않은 그들은 장난꾸러기 기질을 맘껏 발휘하며 무전여행의 파렴치한 특권을 만끽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왕빈대인 그들은 적중률 높은 구걸 메뉴얼까지 따로 준비할 정도로 철면피에다 막무가내다. 여행 내내 거지나 다름없던 그들은 살인자 같은 험악한 인상을 한 사람이라도 밥을 사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정도로 어린애 같은 단순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갈 곳 없으면 경찰서에 스스로 출두하여 구걸하거나 급할 땐 아무 병원의 의사를 찾아가 대놓고 뭔가 먹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다. 무전취식도 마다하지 않으며 무임승차는 말할 것도 없다. 순전히 호의로 그들을 초대한 어느 독일인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을 때 체는 창턱 위에 걸터앉아 설사하고는 다음날 아침 재빨리 도망치기도 한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혁명가이자 카리스마 넘치던 체 게바라가 손님으로 초대받은 집의 창가에 설사하고 줄행랑을 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낯선 손님이 급하게 남기고 떠난, 아침에 ‘햇빛에 말라붙어 복숭아 빛을 띠고’ 있던 ‘아주 볼만한 광경’을 본 집주인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이처럼 순수하고 철없는 청년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와 알베르토의 우여곡절 많은 여행을 기록한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거침없이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단풍처럼 울긋불긋한 가슴 아픈 사연들로 검붉게 물들어 있다. 솔직담백함이 듬뿍 묻어나는 문장 하나하나에는 꿈꾸는 젊은이의 뿌리를 땅에 내리고 가지를 하늘로 뻗어내는 양분으로 가득하다. 철부지 청년에서 민중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 체 게바라로 서서히 채색되어 가는 8개월간의 긴 여정이 담긴 이 한 편의 드라마는 언제봐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인간, 그리고 청년 체 게바라의 진솔한 모습이 담긴 소중한 기록이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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