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8

동굴 | 품고 있으면서도 실현하지 못하는 꿈

The Cav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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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 주제 사라마구 |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좇는 인류의 유구한 숙명

Original Title: La caverna / The Cave by Jose Saramago
난 돌 의자에 묶여서 벽만 바라보며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동굴(The Cave, A caverna)』, p461)

거짓의 안락한 삶, 진실의 불편한 삶

포르투갈의 노벨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동굴(The Cave, A caverna)』은 도시인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능이 들어선 ‘센터(The Center)’라는 거대한 건물을 중심으로 구획화된 가상의 세계를 통해 자본주의 지배 아래 물질만능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면서 삶의 참모습을 보는 눈을 잃은 현대인을 비판한 작품이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상품화하는 ‘센터’는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괴물답게 끊임없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 지하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확장 공사를 하다가 뜻밖에도 동굴이 발견된다. 그 동굴은 다름 아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Allegory of Cave)’에 나오는 바로 그 동굴이다. 옴짝달싹 못 하게 사슬에 묶인 채 해골로 변한 사람들, 불을 피웠던 흔적 등 주인공 시프리아노(Cipriano)가 ‘센터’의 경비원이자 사위인 마르살(Marçal) 덕분에 다른 사람들 몰래 살펴볼 수 있었던 동굴의 모습은 플라톤이 묘사한 모습 그대로였다. 평소에도 모든 것이 갖춰진 ‘센터’에서 사는 것이 왠지 감옥에 갇혀 사는 것처럼 답답했던 시프리아노와 그의 딸 마르타(Marta), 그리고 평소 ‘센터’ 신봉자였던 마르살조차 동굴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센터’를, 그리고 플라스틱 상품으로 직업을 잃기 전까지 도공으로서 시프리아노가 3대째 도자기를 굽던 정든 가마와 집을 버리고 떠난다.

La caverna The Cave by Jose Saramago
<선사시대부터 인류는 동굴과 인연이 깊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현실의 안주를 버리고 미래를 향한 기약 없는 여정에 오르게 하였을까? 그것은 결국에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꿈을 꿀 때만큼은 이루어질 것 같은 꿈을 향한 무모한 도전일까? 아니면 세상의 진실과 참모습을 쫓으려는 어리석은 열정과 지나친 호기심이었을까? 정확히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환상을 갖는 건 잘못이 아니지만, 자신을 속이는 게 잘못이라는 시프리아노의 철학처럼 자신이 세상의 그림자 속에 갇혀 지내고 있다는 진실을 외면한 채 눈앞의 현실만이 실재라고 자신을 속이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동굴의 존재를 확인한 사람으로서 그림자가 세상 전부라고 믿고 살다 죽은 해골을 외면하고 기존의 삶과 가치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과 세상을 속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기아, 난민, 기후변화, 빈곤, 생태계 파괴 등의 ‘불편한 진실’을 가끔씩 마주쳐야 하는 우리보다 더더욱 께름칙한 일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루하루 매시간 일분일초가 불편한 진실의 연속일 테니까.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좇는 인류의 유구한 숙명

시프리아노가 발견한 동굴 속의 사람들이 물리적인 힘인 사슬에 묶여 어둠 속에 갇혀 있다면, 시프리아노를 비롯한 현대인은 현실을 지배하는 주축 시스템이자 가치관인 자본주의에 갇혀 대안적 삶을 포기한 외곬의 길을 가고 있다. 맹목적인 자본주의적 삶은 현대인을 물질적 탐욕의 늪 속으로 물귀신처럼 끌어당기고, 늪에 빠져 삶의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로지 동물적 생존 본능과 어떻게든 탐욕을 채워줄 물질적 결과물을 얻기 위한 무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제의 만족이 오늘의 만족을 보장하지 못하듯 그들 앞엔 오늘의 만족이 결코 내일의 만족을 기약하지 않는다는 불안정하고 불투명하면서도 비정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설령 경쟁에서 승리해 뭔가를 얻어내더라도 신상품의 홍수와 대중 미디어의 부추김 속에서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일시적인 만족감을 일으킬 뿐, 새로운 자극에 곧바로 발기한 욕망의 더듬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끊임없이 돌아가는 욕망의 굴레를 무심하게 굴릴 뿐이다. 반면에 경쟁에서 낙오되거나 좌절당하면 빈곤의 나락과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한없이 추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병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현대인을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물리적 사슬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쉽게 끊어버릴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사슬은 자신의 힘, 즉 시프리아노처럼 각성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폐해가 담론으로 오가지만,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발아 단계에서 말살시켜 버리거나, 혹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지더라도 곧 거대한 힘에 묻혀버리고 마는 우리의 현실은 시스템의 속박이 얼마나 견고하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문화, 문명, 관습, 규칙, 제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보이지 않는 속박 속에서 지식이 어릿광대의 현란한 무대 소품 같은 돈벌이 수단으로 퇴락한 씁쓸한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다. 많이 안다고 해서 그만큼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동굴 속의 그림자만이 세상의 참모습이며 지금 가는 길만이 바른길이라는 아집과 오만은 우리를 더더욱 부자유스럽게 죄어온다.

그렇다고 각성한 시프리아노 가족이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어두침침한 미명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버리고 어떠한 대안적 삶을 선택한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 꼭 행복한 삶과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동굴 밖의 모습이 세상의 참모습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마트로시카라는 러시아 인형처럼 동굴 밖이 또 다른 동굴 속이고 그것이 또 다른 동굴 속의 연속일 수도 있다. 이처럼 세상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인간의 열정과 희망은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망한 시도로 끝날지도 모르는 허무의 나락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뭔가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은 (옮긴이의 말처럼)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좇는 지적생명체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인류의 유구한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마치면서...

소설 『동굴』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평생 책을 읽으면서도 그냥 종이 위에 있는 단어들밖에 읽지 못해 그 단어들이 빠르게 흐르는 강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걸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 징검다리는 우리가 반대편 강가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려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중요한 건 바로 그 반대편 강가라고 시프리아노는 말한다. 그런데 만약 독자가 가진 반대편 강변이 단 하나뿐이라면, 그래서 건너고 건너 도착한 곳이 어제의 그 강변이고 내일도 역시 그 강변이라 해도 그것이 문학 읽기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반대편 강변이 하나뿐이라 해도 그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그 강변이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동굴 속에 갇혀 탈출하기가 어렵다 해도 그 동굴 속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동굴 밖 세상을 꿈꾸고 탐구하려는 유구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힘은 참된 문학 읽기를 통해 얻을 수도 있겠다는 나의 아둔한 의견을 끝으로 따분한 후기를 이쯤에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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