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 C. V. 웨지우드 | 민중의 고통과 외침마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끌어올린 역작
이 암울한 전쟁은 편협하고 비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고위직에 있을 때 어떤 위험과 재앙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생생한 교훈이다. (『30년 전쟁(1618-1648)』, 7쪽)
30년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
히틀러 같은 미치광이는 없었다. 그 말은 누군가의 집요한 의도나 음흉한 음모로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났고, 간헐적으로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계속된 전쟁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끝났다.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고 독일 제국의 문명은 몇 세기나 뒤로 후퇴했다. 도덕과 경제가 무너지면서 사회는 타락했고,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농부들의 삶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전쟁이었고 유럽과 독일의 다수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도 전쟁을 막고자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일찌감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불러올 정도로 강한 의지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을뿐더러 평화보다 개인적 사심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평화를 바라는 이중적인 정책으로 세상과 자신을 기만했다. 그 결과 전쟁은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전쟁을 가장 반대했음에도 가장 큰 피해를 본
1618년 프라하에서 일어난 신교도의 반란이 30년 전쟁의 서막이었음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혹은 짐작했더라도 과연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을까? 빈곤, 정치 불안, 종교 분열, 이해관계의 충돌 등 전쟁에 불씨를 댕길 화약고들이 산재해 있는 상태에서 고위층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무능력을 증명했고, 성숙하지 못한 여론과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지 못했던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키는 것 외엔 고통을 표출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전쟁은 필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30년의 기나긴 시련의 고통을 견디어냈음에도 민중은 자유를 얻지 못했다. 1631년 틸리의 제국군에게 함락당한 마그데부르크는 주민 3만 명 가운데 약 5천 명만이 살아남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용병들의 만행은 ‘마그데부르크의 재앙’이라는 이름으로 불명예스러운 역사의 한 장을 차지했으며, 역사 추리소설 『거지왕』(올리퍼 푀치, 김승욱 옮김, 문예출판사)에서는 주인공 야콥 퀴슬의 회상을 통해 털끝만큼의 인간성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처참함의 현장을 재현한다.
화약 냄새,다친 사람들의 비명,죽은 사람들의 텅 빈 눈. 그는 양손 검을 들고 전장을 행군하며 그 시체들을 짓밟는다. 그들은 열흘 동안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했는데,이제 틸리가 공격을 명하고 있다. 공병들이 세운 장벽 뒤에서 무거운 대포가 포효하고,커다란 포탄들이 성벽을 부순다. 야콥과 용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달려 누구든 마주치는 사람들을 학살한다. 남자,여자,아이……. (『거지왕』, 173~174쪽)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그 피해를 숙명처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면서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었던 민중들과는 달리 독일 지배자 중 그 누구도 집을 잃고 한겨울 추위에 나앉은 사람도, 입에 풀을 문 채 죽은 사람도, 아내와 딸이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의 무정한 눈에 간혹 비친 민중의 고통은 한번 혀를 차고 넘어가면 그만인 불편한 구경거리 중 하나였을 뿐이다. 전쟁을 통해 겪는 아픔과 슬픔에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현격한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니 이로써 민중은 두 번 죽는 셈이다. 여기에 역사가마저 민중을 외면한다면 그들은 세 번 죽는 셈이다.
민중의 고통과 외침마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많은 역사가가 전쟁을 기술하면서 개인적 고통이나 희생은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응당 따르는 어쩔 수 없는 대가로 취급하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쟁을 가장 반대하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정작 전쟁과 관련된 정책에는 가장 영향력 없는 다수를 희생양으로 전쟁이 치러짐에도 역사는 이들을 애써 외면한다. 현실에서도, 역사에서도 외면받는 이들은 그저 통계 수치에 들어가는 인격도 개성도 없는 숫자놀이의 장난감일 뿐이다. 이런 역사가들의 냉정함과 몰인정함에 질렸다면 『30년 전쟁(1618-1648)(The Thirty Years War)』을 통해서 다소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C. V. 웨지우드(C. V. Wedgwood)는 정책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것이 역사의 중요한 교육적 목적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30년 전쟁(1618-1648)』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선제후, 군주, 황제, 왕 등 30년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핵심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쟁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도 웨지우드의 날카로우면서도 인간적인 눈썰미와 모든 이를 향해 열려 있는 명징한 귀는 민중의 고통과 외침마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끌어올린다. 저명한 과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을 떠올리게 하는 엄밀함,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에 버금가는 명철함이 돋보이는 이 책에서 우리는 역사의 냉혹함을 읽고 민중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저자가 주창한 역사의 중요한 교육적 목적에 백기를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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