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7

푸드쇼크 | 자본주의는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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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쇼크 | 로버트 앨브리턴 |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과학 실험?

얼마 전 뉴스에서 한국인 혈액 속 수은 농도가 미국보다 3배 이상, 독일보다는 무려 5배나 높다는 조사결과가 보도되었다. 수은 같은 중금속들은 주로 수산물을 통해 흡수된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본의 아니게 먹게 되는 유해 물질은 비단 중금속 뿐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가 주로 먹고 마시는 라면이나 과자, 햄버거 또는 콜라 같은 가공 식품에서 흡수되는 화학물질 또한 인체에 쌓여 언제 터져 발병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천수를 누리겠지만, 재수 없으면 수십 년 후에 다른 화학물질들과 반응하여 암 같은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길거리에 흔한 패스트푸드 점포나 주위에 널린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공식품들에는 맛과 모양을 위해서 다양한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이런 화학물질들을 사람이 장기간 복용할 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실하게 테스트 된 물질은 거의 없다고 한다. 환경보호기금의 정책 이사인 릭 스미스(Rick Smith)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통제받지 않는 과학 실험에 참여한 기니피그’다.

Let them eat junk by Robert Albritton

‘음식’을 둘러싼 부조리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현대판 노예들, 스타크래프트의 일꾼 유닛과 다를 바 없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것이다. 이 대답에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디 밥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사람에게 있어 음식은 최고의 행복이자 먹는 사람의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번 돈을 가지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계속 먹는 걸까. 왜 우리는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음식까지도 소비자의 건강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냉혹한 시장경제에 맡겨야 하는 걸까? 왜 기업들은 소비자가 먹는 음식에 첨가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유독성 시험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걸까. 또한, 국가는 이런 상황을 왜 그대로 내버려두고, 인류의 번영에 이바지하기 위한 연구를 한다는 과학자들조차 소비자보다는 기업들에 편에 서서 담배를 옹호하는 걸까. 한편으로는, 한쪽에서는 어디를 가든 다양한 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많이 먹고 그만큼 많은 음식을 버리고, 그들은 음식의 풍요로움 속에서 비만과 과체중으로 고생한다. 반면에 WHO(세계보건기구)는 전 세계 30억 명의 인구가 굶주림이나 다른 영양 불균형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했고, 21세기에도 5초마다 5세 미만 어린이 다섯 명 중 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걸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와 농업 생산의 자본화와 집중화로 식량은 이미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하지만, 실제로 식량의 분배는 그렇게 공평치가 않다. 정작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들이나 노동자들이 배고픔과 영양 불균형, 각종 인체에 해로운 농약(선진 대다수 국가에서는 사용금지되었지만, 빈곤 국가에서는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때문에 질병에 시달리는 현실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건가.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로버트 앨브리턴(Robert Albritton)의 『푸드쇼크(Let them eat junk)』는 넘쳐나는 식량 속에서 기아와 비만을 동시에 만들어 낸 자본주의 체제의 농업과 식량 공급에서의 불합리성과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이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비단 식량에 한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식량이다 보니 『푸드쇼크』에서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은 그냥 무심코 넘길 수가 없다. 또한, 크고 작은 동네 마트에서 할인해 파는 저렴한 식품이 눈에 많이 띄어서일까. 다른 나라에서는 5초마다 어린 아이가 굶어 죽는다고 하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을 추려보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그것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태어난 걸 정말 복 받은 것 같다. 이 풍요가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로버트 앨브리턴의 주장은 단호하다. 그는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류의 번영에 필요한 식량체제의 기본 조건은 지구 생태에 미치는 훼손을 최소화하고, 미래 세대들을 위해 환경 건전성도 강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산되어야 하고, 이렇게 생산된 우수한 품질과 충분한 양의 식량이 각 개인에게 제공되어야 마땅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가능성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식량체제의 기본 조건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소비자의 건강과 이익보다는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현실의 문제점들과 그 원인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푸드쇼크』에는 자본주의의 무관심이 만들어 낸 정크푸드, 미래를 담보로 하는 지속 불가능한 현재의 식량 체제,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는 지독한 자본주의, 식량이 무기가 되는 공포 정치,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기아와 비만, 설탕과 고기, 그리고 식품 첨가물에 중독되는 현대인, 농업 노동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 환경을 파괴하는 현재의 식량체제, 자유 민주주의보다 힘이 센 기업 등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리고 지배하는 공장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진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식량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단 • 장기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앨브리턴 나름대로 모색한다. 그러나 그의 대책을 보고 내 생각을 감히 말하자면, 그 방안이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할지, 너무 이상주의적이지는 않은지, 하는 의문과 걱정이 앞선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우리 뼛속 깊이 잠식해 있고, 사람의 욕심과 욕망 또한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깊숙이 잠재된 욕망까지 끌어내고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어 유행을 호도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자본주의가 과연 쉽사리 신의 권위에서 내려올지 회의가 든다.

식품회사의 관심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라 지갑이다

사실 누구나 알다시피 기업이 이익을 좇는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의 장단에 맞추어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소비자의 우유부단한 태도 또한 문제인 것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 소비자는 단순히 돈만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담보로 무분별한 소비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힘들게 공부하고 노력하며 돈을 벌지만, 결국에는 광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리함과 달콤하며 기름진 맛에 중독되어 장기적으로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로 하루 세 끼를 채운다. 특히 식습관은 유전이 아니라 어렸을 때의 환경적 요인, 즉 양육으로 결정된다는 걸 아는 식품회사들은 어린 아이들에 대해 더욱 공격적으로 마케팅한다. 이에 대해 과연 부모들은 가족이 먹는 음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과연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을까. 우리나라도 비만이 증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비만을 단순히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정크푸드로 살 찌워진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배불러 보일지라도 영양상으로는 굶주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즉 정크푸드가 칼로리만 높고 영양적 가치는 형편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육체는 부족한 영양성분을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요구하고, 이런 악순환이 결국 비만을 불러온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행동에 반영하고 있는가.

식품 회사나 담배 회사는 질 낮은 식품 섭취나 흡연으로 발생할 수 있는 막대한 사회 비용은 전적으로 개인이 부담하게 한 채, 뻔뻔스럽게 소비자의 건강을 담보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다. 요즘은 기업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자선사업도 하고 여러 단체에 기부도 하지만, 결국 이런 것들은 기업의 궁극적인 기업의 이익을 위한 고도의 지능적인 전략일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의 광고회사들은 광고가 사람의 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까지 하고 있다니, 예전 공산주의 사회에서 텔레비전을 국민의 세뇌 교육용으로 사용했듯이, 지금처럼 광고의 홍수 속에 사는 소비자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는 기업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 일쑤다. 많은 소비자가 사람의 살을 먹는 좀비가 아니라 자신의 지갑을 털어가면서, 부족하면 대출까지 받아 소비하는 자본주의적 좀비가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가능할까?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공산주의 때문에 만능해결책인양 과대 포장되어왔다. 당시 자본주의는 그 시대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거나 자본주의 외에 다른 체제는 생각해 본 적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버트 앨브리턴의 『푸드쇼크』를 읽고 나서는 그런 안이하고 보수적인 생각에 많은 파문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어떻게 보면 필요에 의해 자원이 분배되는 공산주의야말로 이론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건 분명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모두가 필요한 걸 똑같이 가질 수 있거나, 아니면 모두 못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공평한 사회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자신이 필요한 것만큼만 자원을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죽을 때까지 다 쓸 수 없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계속해서 먹고 마시며 남의 것을 탐내며 계속해서 재산을 모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아무리 먼 미래라도 지금의 인류가 깨끗이 청소되고 신인류가 등장하지 않는 한, 이상적이고도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는 이미 사유의 쾌락에 물든 지금의 인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개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사람이 아직 사유의 개념을 알지 못했던 먼 옛날의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 가진 부족함과 어리석음, 모든 사람에게 잠재된 끊임없는 탐욕이 일으킬 재앙을 일찌감치 깨닫고 정의롭고 평등하고도 금욕적인, 여러모로 완벽한 존재인 신을 삶의 모습을 본떠 창조했지만, 그 신마저 정치와 권력, 그리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이용됐다. 이러하니 자본주의 체제 또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꼬집어 내어 비판만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후손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본주의가 가진 불완전함과 불평등을 인정하고 개선해나가려는 의지이다. 자본주의 초창기부터 이미 부의 재분배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제기되어 왔고,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이에 대해 점점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면서 개선하려고 노력해 왔다. 자본주의도 변화하고 진화하여 산업혁명 당시 초창기의 자본주의와는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일으킨 부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빈부의 격차는 국가 대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 문제로 확장되었다. 착취 문제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국가 대 국가, 대기업과 빈민 국가 간의 전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아직도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목격한 착취의 현장이 그대로 선진국과 대기업, 조금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묵인하에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있으며, 빈민 국가 아동들의 노예화도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Let them eat junk by Robert Albritton

값싼 음식, 값싼 소비자 의식이 지불하는 대가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가 마트에서 싸게 사는 것만큼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있는가. 중국이나 아프리카와 남미의 농장들, 그리고 다른 개발도상국의 임금과 작업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역시 우리에겐 다른 나라일 뿐이다. 전태일의 비극적인 죽음을 벌써 잊었는가. 여러분도 1860년대 마르크스가 처음 썼던 "내가 죽은 뒤 지구가 멸망하건 말건(Apres moi le Deluge)!"이라는, 모든 자본주의자와 자본주의 국가의 좌우명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닌가. 과거 공산혁명이 그러했듯이, 이 모든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이 안 된다면 언제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과 함께 이 지구를 다시 한번 혁명의 화염 속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때는 아마도 과거처럼 도시적인 시민혁명이 아니라, 착취당해온 국가들이 일제히 들고일어서는 혁명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번 상상이라도 해봤는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다음에 올 지금과 전혀 다른 시스템 위해 새워진 새로운 세상을. 조선시대나 중세 봉건 제도 아래에서 살았던 민중이 자본주의나 백성의 투표로 왕을 뽑는 민주주의, 신분제에서 해방된 사회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듯이, 우리 역시 또한 자본주의에 파묻혀 다음 세상에 올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선구자적인 새롭고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올, 제2의 마르크스가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가 된다면 어떠한 시스템을 말하고 싶은가. 당신이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무엇인가. 당신이 꿈꾸는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가.

나 같은 경제 쪽에 둔감한 사람에게는 『푸드쇼크』 초반부의 추상적인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부분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가볍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한 장 한 장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모두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에게 불쾌함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독자라면 그쯤의 불쾌함과 불편함을 어찌 예상하지 못할까. 지나가면서 가볍게 읽기에는 쉬운 내용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며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소비 중심의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세상을 좀 더 냉철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식이 담겨 있다. 『푸드쇼크』를 읽고 나면 “변덕스러운 시장 가격에 식량 같은 기초 필수품을 맡겨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는 앨브리턴의 당찬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와 윌리엄 레이몽의 『독소』, 『식탁의 배신』과 파울 트롬머 『피자는 세계를 어떻게 정복했는가』와 함께 보면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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