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와이어 | 제프리 디버 | 친숙했던 그 모든 것이 지옥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오래간만에 링컨 라임을 만났다. 링컨 라임 시리즈 8번째 『브로큰 윈도』까지 읽고는 그다음 시리즈는 아직 출판이 안 된 것 같아 다른 범죄 소설을 찾다가 보슈 형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고 나서는 라임은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다 기분 좀 전환할 겸 추리나 범죄 소설 중 ‘뭐 재미난 거 없나?’하고 도서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요 녀석이 빳빳한 새 지폐처럼 눈에 띄어 누가 가져갈세라, 그리고 전작에서 알게 된 라임의 명성도 있고 하니 일단 대출하고 보았던 것이다. 아직도 난 도서관에 갈 때 특정한 책 제목을 기억하고 가지는 않는다. 많은 장서 틈을 뒤지며 뭔가 새로운 작품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충동구매가 그렇듯 그때그때 기분 따라 책을 선택하는 기준도 많이 다르고 그러다 좋은 작품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과 짜릿함이란.
일단 도서관에 도착하고 나면 대출한 책들을 반납하고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신간도서,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 없고 미리 염두에 두고 온 책이 없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그날의 입맛에 맞는 책을 선택하게 된다. 주로 문학, 역사 쪽을 살펴보지만, 기분 내키면 사회나 경제, 과학(유전자나 고생물학) 분야도 본다.
아무튼, 그렇게 찾다가 링컨 라임 9번째 시리즈인 『버닝 와이어』를 만났다.
라임 시리즈 9번째인 『버닝 와이어』에 등장하는 범행 무기는 이채롭게도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눈에 띄는 ‘전선’이다. 그래서 전압의 과부하를 이용한 ‘아크 플래시(arc flash)’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번에는 기업들이 수집한 개인정보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악용한 범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전기를 이용한 범죄로 개인정보를 이용한 범죄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대형 범죄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고, 그 피해자는 우리 모두 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은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개인정보와 전기를 악용한 범죄는 인간의 과학이 인류에게 편리함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과학이 곧 행복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옛날 옛적에는 자동차사고로 죽는 사람도, 총이나 폭탄으로 죽는 사람도 없었다. 과학은 인간의 호기심과 의문점을 충족시켜주고 편리함과 이득, 그리고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을지는 몰라도, 행복의 기반이 되는 인류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제프리 디버는 이렇게 라임의 8번째, 그리고 9번째 시리즈를 통해서 이런 과학의 지속적인 발전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에 대한 맹신이 가져올 수 있는 대재앙을 예견하고 예방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화창한 4월 봄날, 뉴욕 퀸스에 있는 앨곤퀸 전력 회사에 뜬 ‘치명적 오류’ 메시지. 그리고 연속해서 정지되는 변전소들. 결국, 맨해튼에 있는 변전소가 폭발하며 일으킨 아크 플래시는 근처 버스정류장에 있던 정류장 기둥에 섭씨 2,760도의 불꽃으로 꽂혔다. 그리고 버스에 타려던 승객 한 명이 숨졌다. 그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지만, 그게 치명상은 아니었다. 뜨거운 열기에 녹은 자그마한 쇠구슬이 산탄총에 맞은 것처럼 그의 온몸을 덮쳤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호텔에서의 엽기적인 테러 행위. 호텔 전체가 거대한 전도체가 되면서 호텔은 지옥으로 돌변했다. 회전문 손잡이, 연회장으로 통하는 놋쇠 문, 로비로 향하는 낮은 계단 난간, 엘리베이터 패널, 문 손잡이. 평소에는 친숙했던 이 모든 것이 지옥으로 가는 관문으로 돌변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자연스럽다.
전류를 멈추게 할 수도 있고,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전류를 속이지는 못한다. 일단 발생한 전류는 본능적으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며,가장 직접적인 경로가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면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하는 순간에 살인을 저지른다.
전류는 양심도 없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가 이 무기에 감탄하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과 달리,전류는 영원히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다. (본문 중에서)
문명이 조금이라도 있는 나라는 전부 사용하는 전기, 인간의 생활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전기, 그러나 편리함과 동시에 그 편리함을 느끼며 사는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다 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전기, 과학과 문명의 상징인 이 전기를 이용하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범죄를 저지르는 녀석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를 잡고자 뉴욕의 그들이 다시 뭉쳤다. 자신은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기동성이 낮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짜릿한 ‘도전’을 학수고대하는 법과학자 링컨 라임, 라임의 수제자이자 매력 만점 연인인 빨간 머리에 여전히 속도광인 아멜리아 색스 형사, 라임의 사무실에서만은 언제나 점잖은 ‘델레이표’ 진녹색 슈트를 입고 등장하는 변장의 귀재 프레드 델레이 FBI 요원, 라임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그 역시 자신만의 상징인 후줄근한 회색 정장을 소유한 배불뚝이 론 셀리토, 감식의 떠오르는 샛별이자 영원한 신참 론 풀라스키, 겉보기에는 가장 운동을 못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볼륨 댄스 챔피언인 최고의 감식요원 멜 쿠퍼.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위해 멕시코시티에 등장한 라임의 최대 맞수 시계공. 과연 이들의 불꽃 튀기는 두뇌와 자존심 대결은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예전에 링컨 라임 시리즈의 첫 작품인 『본 컬렉터』 이후 차례대로 라임 시리즈를 보면서 첫 작품에서 뒤편으로 갈수록 작품에서 얻는 재미나 전율이 아주 조금씩 감소한다는 걸 느꼈었다. 계속 같은 작가가 쓴 같은 시리즈만 보니 익숙해지고 또 물려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먹다 보면 질리기도 하거니와 처음 배고플 때 먹었던 그 만족감과 흥분은 역시 같은 요리로는 다시 맛보기는 무리이기도 할 것이다.
라임 시리즈 8번째 작품까지 읽고 그런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번 작품은 좀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기대했다가는 작품이 주는 재미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실망만 할 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판단은?
영리한 범인이 첫 번째 범행 현장에서 실수로 남긴 혈흔 등 약간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고, 보통 모든 건물에 있는 피뢰침 등 접지 시스템을 어떤 방식으로 무력화시키고 호텔에서 감전을 이용한 테러를 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라임 시리즈 전부 다 그렇듯이 추리나 범죄, 스릴러 장르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당연히 『버닝 와이어』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여기에 전기에 대한 역사적 일화나 전기안전을 위한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 등 전기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도 보너스로 들어 있다. 그러니 삶에 지쳐 피곤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짧은 시간이나마 여유와 휴식, 그리고 링컨 라임만의 스릴감으로 말미암은 짜릿한 쾌감 등으로 상쾌한 기분 전환을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읽어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이렇게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 우리 삶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는 건 독서에 취미가 있는 분이라면 다 알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번 작품을 읽고 왠지 모르게 다음 10번째 라임과의 만남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과연 어떤 소재로 우릴 놀라게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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