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06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 언어의 연금술사 셀마 라게를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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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 언어의 연금술사 셀마 라게를뢰프

인생은 고되고 자연은 가차 없다. 그러나 둘 다 혹독함의 대가로 기쁨과 용기를 선사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누가 그 둘을 견딜 수 있으랴.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348쪽)

들어가며…

한눈파는 일 없는 태양은 연약한 대지를 기름 두른 프라이팬처럼 달구고, 덕분에 어둠 속에서 죽었다 되살아난 그림자는 의기양양하게 일상의 무료한 흑백 활동사진을 대지 위에 영사한다. 달구어진 대지는 자신을 무참히 짓밟는 두툼한 신발 바닥에 보복이라도 하듯 뜨거운 열기를 지상으로 발산하고, 뜨거운 햇볕은 무심한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리쬔다. 이쯤 되면 계절도 잊고 사는 바쁜 사람들에게 한여름 더위의 무시무시함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다. 얄밉게도 사람들은 문명의 시원한 발명품으로 들어찬 건물로 들어가 잠시 더위를 식히지만, 잠시 후에 있을 피할 수 없는 한여름과의 대면을 떠올리면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땀에 젖어 축축한 옷이 바짝 마를 정도로 열을 내며 분노를 터트려도 별수 없다. 어찌 인간 따위가 자연의 섭리에 불만을 터트릴망정 거부할 수 있을까.

이때, 공습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폭탄 터지듯 우렁찬 폭음과 함께 대지가 요동치고 공기가 파열한다. 방금 구워낸 벽돌처럼 뜨거운 보도블록과 접촉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보폭을 최대한 넓히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행인들도 화들짝 놀란다. 이들은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땅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아무 일 없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어느새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것 같았던 뜨거운 햇볕도 바람 타고 잽싸게 날아와 두툼하고 거대한 장벽을 형성한 구름에 막혀 한걸음 후퇴하고, 의기양양하던 그림자는 빛바랜 오래된 사진처럼 탈색된 채 풀이 죽어 있다. 구름을 몰고 온 시원한 바람은 꾸벅꾸벅 졸고 있던 먼지를 깨워 흩날리고, 이 모든 것에 어안이 벙벙해진 행인들의 땀을 식혀준다. 인제야 사람들은 날벼락 소리를 알아채고는 기대에 찬 반짝이는 눈빛으로 다시 하늘과 구름을 우러러본다.

한여름 더위 아래 노예처럼 신음하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삼스레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듯 솟아오르고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줄 시원한 물줄기를 한바탕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객잔에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의 목을 축여줄 한 잔의 물 같은 소나기라도 좋으니 잔인한 이 더위를 잠깐이나마 쫓아내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할까. 또한, 탈수된 빨랫감처럼 무더위에 쥐어짜여 허수아비처럼 푸석푸석해진 사람들이 소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은 얼마나 간절한가.

엎어진 꿀단지처럼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매일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도시의 소음과 먼지에 엉망진창이 된 우리의 불쌍한 영혼을 한여름 무더위에 한바탕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위로해 주면서 마음의 묶은 때도 씻겨 줄 유익한 작품 한 편을 소개하고자 우쭐한 기분으로 한번 운을 떠본 서문이 너무 장황할지도 모르겠다. 무던하지만 지루한 삶의 연속에서 사막처럼 바짝 타들어 가 퍽퍽해진 우리의 감수성에 성수와도 같은 감동 어린 이야기로 울고 웃게 하는, 바로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The Saga of Gosta Berling)』 같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정말 보물 중의 보물 같은 존재이기에 없는 필력을 긁어모아 한 번 용을 써보았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길고 긴 호수와 풍요로운 평원, 그리고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을 무대로 파계한 목사 예스타 베를링(Gosta Berling )과 못 말리는 에케뷔의 기사들이 유쾌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는 인류에게 지루하게 반복되는 역사인 인간과 자연, 선과 악의 대립 등 현실의 삶뿐만 아니라 악마, 마녀, 요정, 저주 등 고달픈 현실에 싫증 난 당돌하고 재치있는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낼 법한 환상적인 이야기도 엎어진 꿀단지처럼 달콤하게 흘러나온다. 극히 선한 자도, 극히 악한 자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이기적이고 억세지만, 선량하기도 한 사람들의 투쟁적인 삶이 만들어 내는 명랑한 비극과 비참한 희극의 어우러짐은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삶의 애환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현실이라기엔 꿈처럼 아득한, 삶이 환상이고 환상이 삶인 그곳이 바로 우리의 괴짜 목사 예스타 베를링이 사는 곳이고, 셀마 라게를뢰프의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는 유일하게 그곳으로 안내해 주는 은밀한 안내자이다.

The Saga of Gosta Berling by Selma Lagerlof

당신은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Ivan Alekseevich Bunin)의 『아르세니예프의 생애(Жизнь Арсеньева)』 이후 이렇게 영혼의 심금을 울리는 멋스럽고 아름다우며 환상적이고 유쾌한 문장을 만나본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참고로 한 사람은 러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 또 한 사람은 스웨덴, 그리고 여성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다. 두 사람 다 명성에 걸맞게, 그리고 노벨문학상의 명예를 더욱 빛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경이로운 필치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두 사람의 문장력은 무수한 단어의 조합으로 끌어낼 수 있는 수많은 결과물 중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극치 중의 극치이다.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이야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주는 감동 못지않게 작가의 고유한 문장력이 뿜어내는 오라가 없다면, 즉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는 소설은 스스로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저버린다. 연금술사가 단순한 돌을 값지고 눈부신 황금으로 변환시키듯, 글자를 깨우친 사람 모두가 사용하는 알파벳을 조합하여 이처럼 환상적인 문장으로 탈바꿈시킨 셀마 라겔뢰프야말로 언어의 연금술사다. 마지막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깨닫는데, 특별한 지식이나 이해가 필요하지 않듯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역시 특별한 기술이나 높은 독해력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사악한 사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듯,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은 문학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없다. 사들사들 비쇠해진 감수성으로 삶이 팍팍하게 느껴진다면 반드시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으로 메마른 감수성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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