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최면술사 | 저우하오후이 |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1천만 명을 죽이는 방법
샤멍야오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링밍딩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과거를 좋아한다는 건 그들이 현재 행복하지 않다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429쪽)
최면술사, 대량 살인을 예고하다
을씨년스러운 추위가 느껴지는 깊은 가을 저녁. 룽저우의 한 조간신문에 무시무시한 머리기사가 눈에 띄었다. ‘얼굴 뜯어먹는 좀비, 시내에 출몰하다!’. 한 좀비광이 병원에서 항T바이러스혈청(좀비 게임레지던트 이블에 등장하는 약)을 찾다가 (당연히) 구하지 못하자 거리로 나가 길거리의 행인들에게 난폭한 짓을 저질렀다. 거리 CCTV에 찍힌 피의자는 좀비처럼 두 다리를 질질 끌며 느릿느릿 비틀거렸다. 머리와 상체는 살짝 앞으로 기울었으며 두 팔은 앞으로 축 늘어뜨렸다. 그는 지나치는 차들은 무시한 채 흐느적거리며 도로를 가로지르다 자신을 피하려고 급정거한 자동차의 운전자를 덮쳤다. 그는 운전자의 얼굴 반쪽을 물어뜯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부검할 때 그의 목덜미에는 사람의 이빨 자국으로 보이는 상처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다음 날에는 어느 비둘기광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죽은 사람은 평소처럼 비둘기 모이를 주고 있었는데, 그때 비둘기들이 거리에서 울린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자 비둘기광은 마치 자신이 비둘기라도 된 것처럼 두 팔을 날개처럼 활짝 벌려 옥상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둘기광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인터넷에는 ‘너희들의 생사가 내 손에 달려 있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나는 세계 최고의 최면술사다. 너희들의 생사가 내 손에 달려 있다.
어제는 좀비를 훈련시키고 오늘은 비둘기를 조련했다.
나는 지금 최면술사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룽저우에 와 있다. (『사악한 최면술사』, 53쪽)
<최면으로 대량 살인이 정말 가능할까?> |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빚어낸 형사 뤄페이
누군가 괜찮은 추리소설 몇 편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東野 圭吾)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중국에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고 한다. 바로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고 불리는 저우하오후이(周浩暉)이다. 그리고 『사악한 최면술사(邪惡催眠師)』는 저우하오후이의 많은 작품 중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첫 작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 속 첫 사건이 2012년 6월 29일 중국 저장성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는 점. 해당 사건은 소설처럼 실제로 한 남성이 마치 영화 속 좀비처럼 거리에서 여성을 공격한 다음 얼굴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가가 형사가 있다면, 저우하오후이는 형사대장 뤄페이가 있다. 나이는 대충 마흔 살쯤 되어 보이고 짧은 머리에 널찍한 이마, 각진 얼굴에 짙은 눈썹 등 왠지 중국 공안, 혹은 인민해방군 하면 떠오를법한 딱딱한 이미지를 쏙 빼다박았다. 키는 가가 형사처럼 크지 않고 체격도 건장한 편은 아니다. 캐주얼한 차림에 더부룩한 머리카락, 윤곽이 뚜렷한 얼굴, 인상이 남는 울림 좋은 목소리, 하얀 이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 등 피의자나 피해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전해주는 가가 형사와는 상당히 다른 어딘지 느낌의 형사다. 팍팍한 외모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에서만큼은 형사 뤄페이에게서 인간적인 따듯한 정은 느끼기 어렵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이상주의에 희생된 인민들을 바라보던 냉혹한 시선처럼 뤄페이에게 사람은 끊임없는 관찰과 분석의 대상일 뿐이다 . 형사 뤄페이의 인간적인 면의 부족함이 저자 저우하오후이의 의도이든, 아니면 작품 구성의 2% 부족함 때문이든, (마치 마르크스주의 신봉자 같은) 기계적이며 과학적인 그의 사고방식은 사건과 관련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감정에 휩쓸리는 것을 방어해 준다. 덕분에 그는 미모의 최면술사 앞에서도 냉철하게 수사를 진행해나간다 .
그리고 마흔 살이라는 연륜이 나타내듯 뤄페이에게는 현재의 그를 만들고 현재 그의 사고방식의 끄트머리를 이어주는 과거가 있으며 고로 그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이 존재한다. 현재 한국에서 형사 뤄페이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사악한 최면술사』 하나지만, 만약 그의 활약을 다룬 다른 작품들도 번역된다면, 소설 『사악한 최면술사』에서 잠깐 내비친 뤄페이의 쓸쓸하고 어두운 과거에 얽힌 속사정에 대한 궁금증은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물론 앞으로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를 숨겨둔 에필로그 덕분에 다음 편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최면술은 잠을 재우는 것이다?
좀비처럼 흐느적흐느적 거리며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것 같으면서도 독고구검처럼 변화무쌍한 전개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들 때문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추리소설이다. 특히 좀처럼 물증을 잡기 어려운 최면술을 소재로 범죄를 구성한 면이 독특하고 흥미로우며, 상당한 지면을 최면술 소개에 할애한 저우하오후이의 각별한 배려는 최면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로써 ‘최면술은 잠을 재우는 것이다’라는 최면술에 대한 케케묵은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사악한 최면술사』에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사소한 몇몇 장면들이 눈에 띈다. 형사 뤄페이가 병원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나 심문 과정을 비디오 카메라, 녹음기, 워드프로세서가 아닌 수기로 직접 기록하는 등 중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비교하면 여전히 뭔가 동떨어지는 듯한 문명의 흔적들이 발견되는데 중국 추리소설에만 발견할 수 있는 이런 독특한 장면들을 찾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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