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02

왕자와 거지 | 정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강장제 같은 소설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

왕자와 거지 | 마크 트웨인 | 정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강장제 같은 소설

그 착한 여자는 하루 종일 자신이 거지에게 너그럽게 군 것 때문에 행복했고 왕도 똑같이 비천한 농촌 여자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흐뭇했다. (『왕자와 거지』, 193쪽)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문장과 그렇게 별 뜻 없어 보이는 문장 속에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나약함을 고발하는 암초를 심어 놓은 풍자와 해학이 뛰어난 작품 으로 유명하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과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 사이에 발표된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 역시 트웨인의 명성에 전혀 뒤처질 것이 없는 재미와 재치 있는 풍자를 보장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어린 왕자와 거지 소년 톰의 위치와 역할이 뒤바뀐다는 다소 황당한 희극적인 요소가 작품의 주요 동기이지만, 운명이 뒤바뀐 두 소년이 겪는 생소한 사건과 생활들은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

 Prince and the Pauper
<A.F. Bradley, New York / Public domain>

거지가 된 왕자는 빈민, 거지, 도둑 등의 부랑자 무리와 함께하면서 백성의 눈물 어린 억울함과 한탄을 직접 보거나 매일 같이 신산을 겪고 사는 당사자들에게서 직접 듣는다. 때로는 왕자 자신이 멸시, 추위, 가난, (톰처럼) 이유 없는 구타에 시달리면서 백성의 고충과 고통을 몸소 체험한다. 그래서 왕자는 고위 관리의 비리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또는 가난하거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백성을 위해 그러한 법을 없애겠다고 다짐한다.

반면, 왕자가 된 톰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궁정 생활 뒤에 숨겨진 허례허식과 낭비를 보게 된다. 왕이 죽으면서 남긴 거대한 빚더미 덕분에 왕의 금고는 텅 비었고 1,200명이나 되는 하인들은 임금을 못 받고 있었다. 왕자에게만 딸린 하인만 해도 300명이 넘었다. 백성은 굶주리고 있었지만, 궁정은 빚을 내가면서까지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톰은 이러한 궁정 생활에 질겁할 정도로 압도당한다. 그러나 누구나 가난한 생활보다는 부유한 생활에 쉽게 적응하는 법. 톰 역시 화려한 궁중 생활에 금세 익숙해지고 며칠 더 지나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두 누나와 엄마마저 애써 잊어버린다. 더 나아가 호의호식과 화려한 궁정 생활에 완전히 맛을 들인 톰은 경호원을 두 배, 그리고 400명의 시종도 모자라 세 배로 늘인다. 이런 톰의 순진한 타락은 대관식 행렬에서 톰을 알아보고 군중을 헤집고 달려온 엄마를 모르는 여자라고 외면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톰은 잠시나마 왕이 되었을 때 억울한 누명으로 죽을 뻔한 백성의 사연을 듣고는 귀족과 고관들 앞에서 기지를 발휘해 선정을 베풀면서 여전히 천성이 착한 톰의 모습을 잃지는 않지만, 이런 착한 톰조차 물질적, 권력적 향락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은 동화처럼 재밌으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실상 읽어보면 어른들이 읽기에도 매우 잔혹한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침례교도인 두 여자가 화형당하는 장면이다.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는 두 엄마와 함께 죽겠다며 나방처럼 불더미로 달려드는 두 어린 소녀의 발버둥은 처절하다 못해 악귀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타오르는 두 여자는 가슴을 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다. 이 끔찍한 상황을 두 눈으로 본 왕자는 숫제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며 더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한다. 왕자는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얼굴을 벽으로 돌린다. 화형뿐만 아니라 기름에 튀겨지고 가마솥에 삶겨지거나, 또는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파헤쳐지는 참혹한 형벌들이 당시에 존재하고 실제로 행해졌음을 고려하면, 왕이 된 톰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형으로 감형해달라고 애걸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부조리하고 부당한 사회 질서를 신분이 뒤바뀐 왕자와 톰이 겪는 일화들을 통해 해학적으로 풍자한 『왕자와 거지』의 결말은 톰이 좀 더 영악하고 냉정하게 굴었다면 진짜 왕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착한 톰의 배려에 왕자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에드워드 6세가 된다. 신이 내린 군주의 자리는 인간의 운명적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이로써 두 사람의 우여곡절은 하나의 촌극으로 끝나고 만다.

 Prince and the Pauper
<First edition of Mark Twain's The Prince and the pauper Cap>

자본주의 아래 새롭게 형성된 자본적 신분 질서에 얽매여 사는 현대 시민에게도 톰처럼 ‘무엇이’, 또는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소원 아닌 소원을 품고 산다. 톰이 자신의 처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화려한 궁정 생활을 꿈꾸는 것처럼 현대인은 TV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화려하고 우아한 생활에 매료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누구라도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기회의 평등을 아무리 떠들어도 실상 그러한 위치에 도달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 사람은 부질없는 공상임을 모른 채, 혹시 안다고 해도 그러한 공상들이 현실의 고민과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도피할 수 있는 짬과 위안을 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해바라기가 될 수밖에 없다. 톰 역시 현실의 가난과 구타가 주는 고통과 상처를 꿈과 공상으로 치유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터득했지 않는가.

가혹한 경쟁 체제에서 자신의 실속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보면 상상력과 동정심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꿈도 빈약해지고 이로써 꿈의 치유력도 소멸해가면서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이것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뭔가에 쫓기는 압박감, 피로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스트레스의 근원 중 하나다. 정신적 빈곤이 건강한 문학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면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정신의 피로를 풀어주고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는 효과 좋은 강장제이다 .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