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노래
청춘의 노래들 by 최성철
노래는 거의 사진과 같다. 오래전에 찍었던 사진처럼, 그 노래를 들으면 당시의 풍경과 사람과 감정이 다시 선명하게 인화되어 나온다. (『청춘의 노래들』, 9쪽)
‘페이퍼레코드’ 레이블 대표 최성철이 쓴 『청춘의 노래들』에는 ‘어두운 시대의 예술혼’, ‘연민, 저항 그리고 탐미’, ‘상실의 시대를 품다’, ‘K-Pop의 미래를 부른 노래’ 등 총 4부에 걸쳐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음악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암울한 시대를 담담하게 노래하거나 당당하게 시대에 맞선 음악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표현하기에 몰두했던 음악가, 대중적이고 서정적인 발라드로 팬들의 심금을 울리던 음악가 등 이들이 지향하던 음악 세계는 얼핏 들여다보면 노래를 부르는 목적이나 노래를 듣는 팬들의 성향도 저마다 다르고 음악적 장르와 특색 역시 제각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점에도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노래를 듣는 사람의 영혼을 털실 타래처럼 부드럽고 따스하면서도 하나로 묶어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찡한 ‘울림’이다.
『청춘의 노래들: 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마스터피스』에서 다루는 1980, 1990년대의 흘러간 옛 노래에 내 세대, 혹은 그 전후 세대가 유난히 집착하거나 애착이 가는 것은 단순히 옛것에 대한 향수 때문도, 다사다난했던 청춘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다는 동지애에서 비롯한 것만도 아니다. 그때 그 노래에는 지금의 노래에서는 결코 느끼거나 맛볼 수 없는 바로 그 ‘울림’이 있었다. 바로 은은하면서도 강렬하게 전해져오는 영혼의 ‘울림’말이다.
‘울림’을 통해 가수와 청중이 서로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었든 그 시절에는 그 ‘울림’ 하나 때문에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것인 동시에 듣는 사람의 것도 되었다. 말 그대로 그들, 아니 우리 모두의 노래였다. 그랬기 때문에 문신도 없앨 수 있다는 레이저 시술로도 지울 수 없는 투명하면서도 뚜렷한 문신을 듣는 사람의 영혼 속에 아로새겨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허리와 무릎이 쑤시듯, 잊을만하면 그 노래들이 기억 속에 떠오른다. 폭우와 홍수가 물속을 헤집어 각종 부유물을 표면으로 밀어올리듯,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시대를 살수록 청춘의 노래는 우리의 마음속을 바쁘게 떠다닌다.
『청춘의 노래들』은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 시기와 일치한다. 그런데 이 책을 곰곰이 읽다 보면 그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간절한, 때론 절박한 심정으로 노래를 불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요즘의 기업처럼 운영되는 기획사에 의해 발탁된 애초에 인기나 금전을 목적으로 공장에서 제품을 마구 찍어내듯 생산하는 인스턴트 식품 같은 가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음악에 대한 부단한 열정과 의지만으로 스스로 일구어낸 진짜 가수였다. 故 김현식은 자신의 목숨이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불태웠을 만큼 노래를 부르고 싶어했다. 또한, 그는 김종진에게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노래하면 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들은 누군가와 경쟁하고자, 또는 순위를 매기고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들에겐 육체를 쥐어짜 내는 안쓰러운 소리가 아니라 영혼을 메어치려 나오는 찡하고 잔잔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한마디로 그들의 노래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다름없었고, 『청춘의 노래들』은 애틋하면서도 따사로운 그 숨결의 존재를 깨우쳐주는 조언자이자 그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이어주는 인연이다. 이로써 나는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더불어 나 자신도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음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었다. 낡은 앨범에 외로이 잠자고 있던 빛바랜 사진을 꺼내보며 감회와 추억에 잠겨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듯, 간만에 꺼내 들은 그들의 ‘울림’에 전율하며 울보처럼 흘러내렸던 뜨거운 그 눈물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노래들과 함께 청춘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내가 그랬듯, 저자 최성철의 마법 주문 같은 글에 매혹되고 그들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곁들인다면 숨 가쁜 생활 속에서 잊을 수밖에 없었던, 어쩌면 잊도록 강요당했던 청춘 시절로 돌아가는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또한, 이 책 속에 소개된 음악가들을 생전 처음 접한다고 해서 실망할 것은 없다. 아직 젊고 싱싱하며, 그래서 더더욱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호기심 왕성한 그들에겐 또 다른 기적이 준비되어 있다. 바로 찬란하고 꿋꿋하게 일어섰던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를 탐험하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청춘의 노래들』 덕분에 실로 간만에 옛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풋풋한 추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무릇 대단한 것이 숨겨진 것도 아닐 터인데 한 번 묻힌 과거는 무덤 속에 파묻힌 관처럼 쉽게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것은 추억, 혹은 과거가 항상 좋은 기억이나 흐뭇한 감정만 떠올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청춘이 남긴 조각 하나하나는 너무나 소중한 추억들이다. 청춘의 노래는 기억 속에 파묻힌 그 추억의 조각들을 되찾아 재생시켜주는 만능플레이어이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늘고 질긴 연줄이다. 청춘의 노래는 쓰리고 아프거나 한스럽고 울분을 자아내는,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조차 연인의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처럼 보듬어 주면서 격해지지 않도록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이로써 추억의 조각들을 긁어모아 퍼즐을 완성하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은 깔끔하게 제거된다.
황폐하고 위압적인 도시에서 경쟁적인 피곤한 삶에 지친 우리를 근근이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며 도피처 중 가장 만만한 것은 각자가 간직한 추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으로 안내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최성절의 『청춘의 노래들』이다. 그 노래가 꼭 『청춘의 노래들』에서 소개하는 노래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노래들만큼 옛 추억을 자극하고 처연히 회상에 잠기게 하는 노래들도 없다. 이 마지막 맺음말을 쓰는 지금 듣는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복고 경향이 상업주의의 또 다른 상술이라는 비판이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다양한 욕구만큼이나 음악적 취향 역시 제각각이고 새로운 것을 찾음에도 현재의 대중음악이 그 갈증을 해결해줄 수 없다면 과거나 다른 나라의 음악에서 그 고상한 갈증을 풀 수밖에 없다. 또한, 좋은 책은 ‘고전’이라 불리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두루 읽힌다. 음악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도 최성철 대표는 10, 20년이 지나 들어도 처음 들었을 때 그 느낌 그대로 전해주는 음악을 소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식품처럼 한 번 듣고 버리는 음악이 아니라 말이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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