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혼인사 웨스터마크 | 사회제도로서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그 기원
Original Title: 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 by Edward Westermarck
합의(合意)에 의하여 체결된 계약(契約)이라면 그것은 합의에 의하여 해소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혼인사(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 p354)
이 책은 사회학자 E. A. 웨스터마크(Edward Westermarck)의 『인류혼인사(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 1926)』 제5판을 발췌한 책으로 하나의 사회제도로서의 혼인을, 즉 사회제도로서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그 기원, 여러 혼인 방식과 그 형태, 여러 민족의 다양한 혼인 의식과 그것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인이 해소(解消)되는 이혼을 다루고 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쓰인 혼인에 대한 개괄서이지만, 인류의 역사시대보다 더 오랫동안 유지된 것으로 보이는 혼인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사람이 결혼하건 하지 않건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인생의 중요 문제 중 하나다. 원시 시대의 혼인이 성적 욕구 해결과 종족 번식을 위한 자연적인 해결책으로써 중요시되었다면, 문명이 발달한 지금의 혼인은 경제, 문화, 때론 정치적으로까지 확장되는 다층적인 영향력을 가짐으로써 더욱 다양한 의의가 포함된다.
그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고대 여러 민족부터 내려오는 각양각색의 혼인 풍습이 한국의 전통적인 혼인 풍속과 상당 부분 일치하거나 비슷하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금은 사라진 조혼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나 힌두인에게는 보편화하여 있었고, 가족 중에서 연장자가 연하자보다 먼저 혼인해야 한다는 것을 중시하던 관습은 중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웨일스 및 스코틀랜드에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중국이나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혼인하는 이유 중 하나였던 조상 숭배를 이어가는 것 역시 고대의 아리아계나 인도에서도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이었다고 하니, 이들로부터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혼인 제도에 남아 있는 듯하다.
혼인 의식도 서로 다른 민족들 간의 유사한 점이 많으며 이러한 의식 중에서 우리의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있다. 일례로 혼인 절차 중 빠질 수 없는 잔치가 있다. 이것은 법적으로 혼인 계약의 정당성을 공인받을 수 없었던 시기에 잔치를 통해 주변에 널리 알림으로써 혼인 계약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때론 부를 과시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 밖에 다양한 혼인 의식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 결혼 전 약혼반지 의식은 매매혼의 흔적으로 보기도 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표적인 혼인 의식 중 하나인 혼인 의식 전후 예물을 주고받는 것은 구매혼을 완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 비추어보면 우리의 ‘함들이기’ 역시 구매혼의 다른 표현, 혹은 그 변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로코 북부 지방에서 행해졌던 신부를 상자에 가둬 새로운 가정으로 옮겨가는 것은 외부로의 사악한 힘으로부터 지키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가마를 타고 가는 것에는 단지 이동의 편리함이라던가, 또는 낯선 곳으로 시집가는 처녀의 수줍음을 위한 배려의 의미도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지방을 통과할 때 신랑이 신부를 번쩍 들어 안고 넘기는 것은 널리 유포된 관행이며, 고대 인도에서는 신부로 하여금 문지방 위를 밟는 것만을 피하도록 했다고 한다. 문지방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는 미신은 그 유래가 이렇듯 상당히 오래되었다.
더불어 저자 웨스터마크는 집필 당시의 혼인 감소 경향에 대하여도 분석하면서, 그 원인으로 높아져 가는 여자의 경제적 지위를 거론한다. 교육의 확대와 새로운 발명과 발견, 부의 증대로 남녀의 취미가 폭넓어지고 욕구가 다양화되면서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활상의 즐거움을 능력껏 충분히 맛볼 수 있게 된 남녀에게 혼인 생활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도 혼인 감소의 원인으로 꼽는다. 또한, 사회 전체에 우수한 문화가 보급된 것도 남녀의 눈높이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져 결국 서로의 이상향을 찾거나 서로의 이상을 충족시켜 주는데 어려움을 갖게 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웨스터마크의 분석은 현대인의 결혼 관념에 대해서도 상당한 시사를 줄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이다.
마지막으로 웨스터마크는 이혼이 혼인의 적이며 만일 이혼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면 가족제도 자체를 파괴할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에 반대하며, 혼인이 합의에 따라 체결된 계약이라면 그것은 합의에 따라 해소될 수 있어야 한다며 이혼을 지지한다. 이혼은 불행한 혼인에 대한 필요한 구제수단이며, 혼인의 영예로움을 더럽히는 결합을 종결시킴으로써 혼인의 위엄을 보존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이 웨스터마크가 이혼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원래 『인류혼인사(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는 총 3권이며 이를 다 합하면 1,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이다. 그중 사회제도로서 혼인이 가지는 의미에 관한 내용을 한 권으로 축약한 것이 이 책인데, 그로 말미암아 교과서처럼 사실만을 늘어놓은 좀 딱딱한 부분도 있고, 내용상으로도 뭔가 부족하거나 허전하게 느껴지는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한국어 번역서 중 인류의 공통 관심사인 혼인의 역사에 이만큼 개괄한 책도 없을 것 같다.
현재 지구의 인류는 세계화 덕분에 각 민족 간 문화적 경계의 날카로움은 무뎌지긴 했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민족이나 나라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할 수 있는 문화적 장벽이나 민족적 특색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전해 온 혼인 풍속의 많은 부분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서 유사한 점을 보여주는 것은 여러 민족의 갈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줄기로 합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지금의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며, 지구에 사는 우리는 하나의 인류, 하나의 종이라는 숨길 수 없는 진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이것은 현재 서로 다른 민족 간의 문화적 차이를 단지 배타적으로만 보지 말고, 장미꽃과 무궁화가 서로 다르지만, 각각 나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처럼 서로의 ‘차이’와 ‘서로 다름’의 미학을 너그럽게 인정하여 ‘더불어 사는 지구’로 나아갔으면 하는 큰 이상을 품게 한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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