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8

푸핑 | 골목 생태계의 무명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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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핑 | 왕안이 | 상하이의 골목 생태계를 이어가는 무명 배우들

그래서 푸핑에게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은 용모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온몸 여기저기서 발산되는 숨결에서 묻어나오는 것이었다. (『푸핑(富萍)』, 47쪽)

푸핑은 떠밀리다시피 상하이로 향한다. 상하이에는 남편 될 사람의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30년 동안 상하이 번화가에서 가정부로 일해온 할머니는 말이 할머니이지 푸핑을 키워준 작은어머니보다 젊어 보였다. 푸핑의 남편 될 사람 리톈화는 할머니가 훗날 의지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친척의 아들을 양자들인 손자였다. 리톈화는 동생이 주렁주렁 딸린 맏이이고, 집안 형편은 곤궁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할머니 덕분에 리톈화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네에 의지하여 살아온 푸핑은 자신의 혼사 이야기에도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좋다 궂다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온순하기로 정평 난 리톈화의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뾰족한 신코만 쳐다보았다. 그 앞에서 부끄럼을 탄다고 그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상물정 알 만큼 아는 할머니 앞에서 무턱대고 싫다고 말하기에 푸핑은 말주변이 부족했고 과묵하기도 했다.

富萍(FuPing) by 王安憶(Wang Anyi)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1960년대 중반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왕안이(王安憶)의 『푸핑(富萍)』은 중매 때문에 상하이로 상경한 억척스럽고 변덕스러우며 고집 센 시골 처녀가 낯설고 복잡한 도시적 삶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삶에 눈을 뜨고 그 방향을 잡아가는 내면의 변화를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처녀처럼 변화무쌍하고 활기차며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복잡한 도시 세태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할머니와 푸핑, 그리고 푸핑의 외숙모를 비롯해 다양한 하층민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화려한 상하이에서 이들이 그리는 삶의 궤적은 활동사진에 잠깐씩 등장하는 무명 배우들의 짤막한 연기처럼 눈에 띌 사이 없이 사라지지만, 이들이 남긴 흔적은 거듭하는 세대의 부침에 파동하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장충동의 족발 냄새처럼 골목 곳곳에 끈적끈적하게 남아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소설은 이들이 어떻게 가난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는지,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절대 슬프지만은 않고 풀뿌리처럼 소박하면서도 질기고 질긴 그들의 사연들을 통해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중에는 할머니나 푸핑의 외숙모처럼 인고의 세월 끝에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있고, 할머니 주인집 큰딸의 친구처럼 지지리게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은 찌든 가난과 숙명적 불행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마냥 칙칙하거나 음울한 것은 아니다. 그곳엔 도시에서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 밀려난 인간적 활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비천하지만 비굴하지는 않으며 가난하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이 사는 그곳에는 판자촌 골목의 어느 한 허름한 식당의 고향에서 가져온 염수로 푹 삶은 돼지고기에서 풍겨오는 기름지고 노릇노릇한 냄새 같은 푸근하고 구수한 그곳 나름의 견고한 생태계가 존재한다.

판자촌 하면 절로 코를 잡게 하는 시큼한 냄새, 곳곳에 쌓인 불결한 오물, 여기저기 널려 있는 누리끼리한 빨래,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배불뚝이 아이들 등 어두침침하고 불쾌한 환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무리 더럽고 너저분한 환경이라도 사람의 온기와 정이 더해진다면 사람이 못 살 것도 없다. 옛 서울에는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에 등장하는 ‘꽃섬’이 그런 곳이었고, 옛 상하이에는 푸핑이 정착한 곳이 그러했다. 사람 사는 것이 별거 있는가. 덜 먹고 덜 가져도, 때론 별것 아닌 일 가지고 아옹다옹 다투어도 서로 오가는 정만 여전하다면 최악의 환경이라고 생각하던 곳에서라도 정착할 수 있고, 나름의 행복도 누릴 수도 있는 것이 알쏭달쏭한 우리네 삶이다. 그래서 답답할 정도로 고집 세고 무뚝뚝한 시골 처녀 푸핑이 낯선 도시 생활을 소화해가며 조금씩 자신의 앞길을 헤아려가는 과정이 유별나게 보이지만, 푸핑이 부대껴가는 크고 작은 사연과 우연 속에서 묻어 나오는 아련한 슬픔과 따스한 정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와 닿는다.

이 리뷰는 2017년 02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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