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연구 | 아리스가와 아리스 | 미스터리에 색을 입히다
첫보기 드문 장렬한 주홍빛 저녁노을이 지는 저녁. 에이토 대학에서 범죄사학 강의를 맡은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는 제자 아카미에게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살인 사건 조사를 의뢰받는다. 2년 전 여름에 어느 바닷가 별장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오노 유우코라는 매혹적인 피해자는 뒤통수를 나무 몽둥이 같은 걸로 맞아 죽은 것으로 판정이 났는데, 사후에 시체 허리 옆에서 발견한 큰 돌로 한 번 더 맞은 흔적이 있었다. 즉, 두 번 죽은 것이다. 세상의 종말 같은 일몰이 있었던 그 주말, 히무라는 의뢰받은 사건 관련 인물과 만나고 나서 마침 근처에 사는 추리 소설가이자 친구인 아리스가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다 아침 6시도 되기 전에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다. 아리스가와가 전화를 받았지만, 낯선 목소리의 남자는 다짜고짜 히무라를 바꿔달라고 말하고, 아리스가와가 끝까지 누구냐고 캐묻자, 낯선 남자는 오랑제 유히가오카 806호로 가라고 지시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두 사람이 다급하게 15층 80세대 중 10세대만 사람이 산다는 ‘유령 맨션’ 806호실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욕실에는 목 졸라 죽은 것으로 보이는 한 중년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 히무라는 2년 전 사건과 자신이 시체를 발견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사건이 별개가 아닌 하나의 축을 가지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더불어 제자 아케미가 겪은 6년 전 화재도 이 두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결국 이 세 사건이 전부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추리소설 작가 아리스가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월광게임』이었다. 에이토 대학 추리 동아리였었나? 그 동아리 중에서 학생 아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본격 추리소설이었다. 이후 읽었던 또 다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인 『외딴섬 퍼즐』과 묶어서 본다면 내가 좋아하는 엘러리 퀸을 연상시키는 논리적이고 정밀한 추리소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주홍색 연구』는 경험을 살려 추리 소설가가 된 아리스가 대학 동창이면서도 임상범죄학자로서 경찰 수사를 돕는 히무라와 콤비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학생 아리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히무라가 묵묵히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하는 명탐정 홈스라면 아리스는 옆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수다스러운 웟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본격 추리소설답게 등장인물에 중에 반드시 범인이 섞여 있지만, 밀실 트릭이나 알리바이 증명 같은 추리소설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전적인 유형을 벗어나 동기와 정황을 토대로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건을 조명하고 추리해가는 과정은 색다른 신선함을 안겨준다. 한편, 소설가 아스카베 가쓰노리는 아리스가와의 작품 『주홍색 연구』에서 ‘색채 미스터리’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문학작품들에서도 서정적이고 아늑한 분위기 연출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가 저녁노을이긴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답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가슴 벅찬 장면에서는 세상의 모든 더럽고 불결한 것으로부터 지켜줄 것 같은 강렬하고도 따뜻한 주홍빛 마법으로 연인을 감싸주기도 하고, 한편으론 가슴속 가득 충전된 뜨거운 열정을 밑바닥까지 소진시킨 끝에 결국 시들어 버린 자신들의 서글픈 사랑을 아쉬워하며 이별을 고하는 연인의 앞길에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주홍빛 비단을 깔아주어 새 출발을 위한 길 안내자가 되기도 하는 저녁노을이 『주홍색 연구』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주홍색 연구』에서의 저녁노을은 단지 아름다움과 낭만적인 분위기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인상적인 짙은 주황빛 저녁노을 아래에서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듣는 열세 살 소녀, 서로 힘겨루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담하게 저녁노을과 마주한 채 활활 타오르는 집과 화염 속에 갇힌 이모부를 하릴없이 바라보는 열다섯 살 소녀, 미모보다는 당당한 자신감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던 여자의 붉은 피와 살결을 보드랍게 감싸주는 저녁노을, 그리고 작품이 시작되는 11월의 ‘독살스러우리만치 붉은’ 저녁노을은 새로운 범행을 계획하며 길거리를 걷던 범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특유의 자태를 뽐낸다.
저녁노을은 악(惡)이나 선(善), 죽은 자 산 자 가릴 것 없이 공평하게 모두를 비춘다. 그리고 자신의 찬란한 주홍색 파장 아래에서 저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사심을 너그럽게 군말 없이 들어준다. 그 사심 속에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범죄가 숨어 있을지라도 인간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저녁노을은 그저 자신의 빛깔과는 달리 서늘한 기운을 발산하며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한다.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고, 관대하면서도 차가운 저녁노을은 인간이 부처님 손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듯 이 작품 역시 그 저녁노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주홍색 연구』는 탄생한 것이다.
살인을 계획한 이에게도, 그 살인의 대상이 되는 이에게도, 그리고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이에게도 저녁노을은 어김없이 비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자신들을 향한 주홍빛 신을 무심결에 멍하니 바라본다. 그럼에도, 그 순간 자신들이 저녁노을을 통해 모두 하나 됨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마치 지극히 높은 곳의 신을 향해 지구에 흩어진 인간들이 저마다 구원의 손을 뻗으면서 모두 자기 생각만 몰두하듯이 말이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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