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 기리노 나쓰오 | 그녀를 성인 배우로 만든 잿빛 과거
어느 날 ‘무라노 젠조 조사탐정사무소’에 페미니즘 계열의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는 와타나베가 찾아온다. ‘성인비디오의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그녀의 손에는 <울트라 레이프 이제 나도 자기부정>이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가 들려 있었고, 그 테이프 갑에는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한 여자를 남자 넷이 강간하는 선정적인 장면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탐정과 함께 본 그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에는 잇시키 리나라는 여자가 여러 남자에게 강간과 폭력을 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와타나베는 비디오 속에서 무참히 짓밟힌 리나를 찾아 영화 제작자와 남자 배우들을 강간죄로 고소하고자 설득하기 위해 ‘리나’를 찾아달라고 무라노에게 부탁한다.
무라노가 와타나베의 의뢰를 받아들이고 얼마 후, 7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블루스 밴드 ‘소울 게인스’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도미나가 요헤이가 죽는다. 그는 교살 되기 전에 한 젊은 여자와 마지막으로 같이 있는 것이 목격되었지만, 경찰은 끝내 그 여자를 찾지 못했다. 관속에는 요헤이가 살아생전에 부탁한 대로 그가 애지중지 아꼈다던 흙구슬이 든 유리병이 놓였다. 생중계로 방송되는 요헤이의 장례식을 보던 무라노는 문득 <울트라 레이프>의 배경이 된 방에서도 요헤이의 관에 있던 흙구슬이 든 유리병과 같은 것을 봤음을 기억해낸다.
성인 비디오에 출연한 여자를 찾다가 발견한 흙구슬이 든 유리병. 그리고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한 유명인의 죽음에서 발견한 또 다른 흙구슬이 든 유리병. 그 중 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학문 그리고 자살의 권유>라는 기괴한 비디오를 남긴 채 진짜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흙구슬이 이 두 사람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무라노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의뢰인과 계약한 2주라는 기간이 거의 다 소진하면서 ‘리나 찾기’ 의뢰는 오리무중에 빠질 즈음, 대기업 차기 사장의 부인이자 양과자 연구가로 유명한 하쓰타 마키코라는 여자가 사무실에 갑작스럽게 찾아와 ‘리나 찾기’에 막대한 후원을 약속함으로써 조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무라노가 맡은 이번 건수는 호기심에 혹은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성인 비디오에 출연한, 도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탈선한 여자 잇시키 리나를 찾는 평범한 실종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리나 인생 전반에 걸쳐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슬프고 어둡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리나가 겪었던 지독히도 끔찍하고 불행했던 지난 시절의 일들도 점차 그들 앞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기리노 나쓰오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리나 찾기’라는 실종사건을 통해 성인비디오 제작이 가져온 인권침해를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분석하고 파헤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성인비디오의 존재 자체나 그것을 찍는 제작자나 배우들을 문제로 삼기보다는 제작에 동참한 여배우에 대한 제작자들의 인권침해를 들춰낸다. 아무리 성인 영화라지만 사전에 계약하고 합의하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을 텐데 무엇이 문제 될 것이냐고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인지하게 된 사실이지만 사전에 합의된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돌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여배우에게 정신적 및 육체적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역시 성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일본이기에 그러한 선택적이고 다층적인 페미니즘도 가능한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여성이고, 탐정도 여성이다 보니 작품에는 성인비디오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의견이 쉽게 일치하지 못하는 일반적 대립각을 언뜻 비추기도 하지만, ‘여성 혐오’가 아니라 ‘남자’가 가지는 추상적인 미덕을 최고로 여기는 호모 도모베를 탐정 이웃으로 등장시켜 모든 남자가 똑같은 시각으로 성인 비디오를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나는 성인 비디오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남자라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아무튼, 단순한 실종 사건 같았던 ‘리나 찾기’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방향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흘러가면서, 리나가 그런 비디오를 찍은 것은 단순히 쾌락과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포자기한 리나가 자신을 버린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진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리나의 친엄마였다. 리나의 베일에 가려진 비참한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전까지 독자에게 ‘성인 비디오나 찍는 그렇고 그런 여자’라는 경멸과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을 비천한 처지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리나에게 독자들은 동정 어린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리나가 지내온 환경과 살아온 과거를 보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역시 아이에게는 그 무엇보다 엄마가 최고이고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세상 그 어느 사람이라도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최악의 일로 받아들여질 일을 겪은 유키에(잇시키 리나의 본명)는 위탁가정에서도 파양되면서 또 한 번 상처받는다. 그리고 시설이 바뀌면서 또다시 상처받고, 그렇게 힘든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만난 친어머니 앞에서도 역시 거절당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느꼈을 소외감과 외로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며, 그런 경험들은 유키에에게 회복 불가능한 심리적 상처를 입혔음이 틀림없다.”
작품 중 ‘야마가와 유키에 성장관찰 근무일지’에서 유키에는 자신을 이렇게 비유한다.
비와 재가 결혼해 태어난 것이 빗방울 화석이다. 원래 비와 재의 결혼이란 있을 수 없는데, 우연히 화산 폭발로 결혼할 수 있었다. 빗방울은 모두 사라져버리지만, 그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자기 자신이다. 언젠가 어머니를 만나면 이 화석을 선물할 것이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중에서)
결국, 이 모든 일이 유키에로 하여금 자신을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말아야 할 부정적이고도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였고, 이런 환경에서 아이는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키에가 어머니를 만난다는 희망에 1년 남짓 보여준 변화된 행동은 독자들을 더욱 가슴 저리게 한다. 유키에는 어머니와의 극적인 상봉을 앞에 두고 “유키에는 모든 일에 의욕적이었고 생활태도도 안정적이었다. … 걱정과는 달리, 그 무렵의 유키에는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월급을 저축하고 착실하게 생활하며 어머니를 만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키에가 풍선처럼 희망에 부푼 상태에서 만난 어머니는 숨겨진 진실을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듯 내뱉은 보는 앞에서 친딸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순간 유키에의 마음속 가득 부풀었던 작고 여린 희망의 풍선은 그대로 터지고 그 흔적조차 산산이 부서져 형체 없는 가루가 되어 유키에의 잿빛 과거 속에 묻히고 만다. 그 이후 유키에는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간다. 끝없는 타락의 길로. 이런 유키에를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툭하면 내뱉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다름 아닌 사회가, 바로 우리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에 등장하는 탐정 무라노 미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탐정소설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여자의 나약한 심성과 의지를 대놓고 보여준, 안쓰러운 탐정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이나 형사들에게도 인간적인 단점은 있지만, 작품 속에서 그런 점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왔던가. 무뚝뚝하지만 뛰어난 지능을 가진 움직이는 백과사전인 ‘링컨 라임’, 환한 미소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시선의 ‘신참’ 가가 형사, 셜록 홈스야 말할 것도 없고 엘러리 퀸, 파이로 번스, ‘사고 기계’ 도젠 교수, 어수룩하지만 역시 명쾌한 두뇌의 소유자인 긴다이치 코스케, 점성술사 탐정 미타라이, 회색 뇌세포의 에르큘 포와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 마플 할머니 등등 이들 모두 뛰어난 능력, 즉 특별한 지능의 소유자이다. 이런 빛나는 주역들 덕분에 새로운 추리소설 작품을 접하는 많은 독자가 당연히 명탐정의 명추리를 예상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탐정 무라노는 보통 사람들처럼 나사 몇 개는 빠져 있다. 지금까지 봐온 명탐정들에 비해 부족함이 확연히 보인다. 거기다 의뢰인의 ‘적’이자 성인비디오 제작자인 야시로에게 유혹당해 동침까지 하고, 그렇게 황홀하게 ‘적’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는 의뢰인이 살해당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발생한다. 전직 야쿠자 조사원이었던 무라노의 아버지는 “의뢰인을 죽게 해선 안 된다. 그건 탐정에게 치욕이야.”라고 뒤늦은 충고를 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인간적인 탐정 하면 해리 보슈를 빼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보슈는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했다. 아니 오히려 보슈에게 ‘사(私)’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경찰관의 아내였던 실비아, 전직 FBI이자 중범죄자인 엘리노어와의 좋은 관계를 방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이 무라노를 비난의 눈으로만 본다면 그녀의 심정은 누구보다 안타깝고 속이 탄다. 사실 무라노는 이웃집 남자 도모베를 사랑하지만, 호모인 도모베는 ‘평생 아무하고도 안 잔다고’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이니, 한창 젊음의 뜨거운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무라노가 도모베와의 정신적인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걸 어찌 탓하느냐. 그 상대가 비록 의뢰인의 ‘적’일지라도 육체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남자의 강렬한 유혹 앞에서 사랑에 굶주린 그녀는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어찌어찌 해서 사건은 해결하지 않았는가. 어찌 되었든 무라노는 내가 본 역대 탐정이나 형사 중에서 가장 평범한 탐정이다. 명탐정이 있다면, 어딘가에는 비록 평범할지라도 자신이 갖춘 능력을 ‘재주껏’ 발휘하고 성실함을 무기와 방패 삼아 연명하는 탐정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의 전체적 흐름은 그리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다. 그래서 해리 보슈나 링컨 라임 시리즈 같은 큰 긴장감이나 스릴을 주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어질러진 여러 페이지를 짜맞추다가 실수로 몇 장 빠진 것처럼 이야기 구성이 그리 깔끔하지는 않아 보인다. 특히 무라노 남편이 자살한 동기나 무라노 아버지가 야쿠자 조사원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한 것인지 빠져 있어 조금 아쉬웠다. 탐정 무라노와 그 주변 인물의 과거는 독자가 무라노를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런 부족한 점에도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설정은 꽤 신선하게 다가왔고, 사건을 마무리도 하고 나서보니 그녀와 도모베와의 미래도 자못 궁금하다. 이 둘이 한팀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며 재미없이 길기만 한 이 글을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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