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 짓궂으면서도 향기로운 메타포의 향연
한 때 나처럼 고전 영화에 심취했던 영화마니아라면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1994년도 작품 『일 포스티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오래전에 감상한 기억이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는 책과는 달리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책을 보고 나서도 영화에 대해서는 영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중에 다시 한 번 감상해 봐야겠다. 영화 한 편을 끝까지 감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기껏 길어봤자 보통은 두 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책 한 편을 정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영화보다는 몇 배 또는 수십 배 이상 길다. 또한, 영화는 부담없이 편하게 수동적으로도 감상할 수 있지만, 책은 의지와 인내심, 그리고 나름대로 지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각각 한 편씩에 소비되는 시간과 노력이 다르다 보니 머리에 기억되는 정도도 다른 것 같다. 한때 영화광이었을 때에는 영화가 취미생활로나 시간 보내기로나 최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가까이하고부터는 책에서 얻는 감동과 즐거움은 모든 책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많은 책이 읽고 나서 얻은 느낌과 감동 같은 인상들은 살에 깊게 베인 상처처럼 가슴속에 뚜렷하게 새겨진다는 걸 알았다. 이는 청각, 시각 등을 통한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머리와 마음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상상과 공상에서 얻는 내부로부터의 자극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말하고도 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은 가끔 영화를 봐도 한 번에 끝까지 감상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내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한 번에 끝까지 본 영화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건방진 말이지만, 책에 재미 좀 붙이다 보니 영화는 가끔 기분 전환용으로 사용하는 소품 정도로 전락했다고나 할까나. 단순한 재미는 모르겠지만, 영화에 대한 정감은 최신 영화보다는 60~80년대 영화가 더 가는 것 같다.
아무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통해 끈적끈적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고, 거칠면서도 정감있게 다가오는 남미 문학을 오래간만에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번역해서 20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보다는 조금 긴 중편 정도의 분량이지만, 작품에서 얻는 감동의 깊이와 여운은 어느 작품 못지않았다.
<Skarmeta, Antonio / Rorigo Fernández / CC BY-SA> |
내가 책을 읽고 이렇게 블로그에 후기를 쓰는 이유는 첫째, 작품이 준 기억과 느낌을 잊어버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게 머릿속에 꾹꾹 집어넣으려고, 둘째, 그렇게 해서 먼 훗날 전에 읽었던 책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대출하는 실수를 막으려고, 셋째, 누군가 이 후기를 읽고 책 한 권이라도 더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소설책 같은 경우 후기에는 전체 줄거리는 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미리 전체 줄거리를 읽고 본다면 당연히 그 감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책을 읽기 위한 좋은 미끼가 되도록 전체 줄거리 중에서 앞부분 정도만 작품에서 말 그대로 빼내어서(나의 중학생 정도의 작문실력으로는 이것이 최선인 것 같다.), 그리고 옮긴이의 해설을 참고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굴려 정리해왔다. 그래서 이렇게 작품의 내용을 마음대로 짜깁기하는 내 후기가 저작권에 문제가 되는지 심히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글을 작성할 때 ‘네이버 오늘의 책’의 선택 칸에도 선택한다. 저작권에 문제가 되면 네이버에서 귀띔해 줄 거라 믿고. 또한, 혹시나 하는 기대심리에. 아무튼, 인간의 그 얄팍한 주변머리는.
이상 이것이 내 뜻이지만 세상일이 어디 내 뜻대로 되겠는가.
그런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전체 줄거리(이 부분은 내용이 너무 길어 구글 블로거로 옮기면서 삭제) 를 넣어야 할까 고민을 좀 했다. 내용이 짧기도 했지만, 작품의 줄거리보다 작품 전체에 생명의 젖줄처럼 달콤하고 매끈하게 흐르는 은유(메타포)가 이 작품 전체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접하기 전에 미리 전체 줄거리를 안다고 해도 작품에서 얻는 재미와 감동이 많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줄거리뿐만 아니라 문장 자체가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작가 스카르메타는 작품의 메타포를 통해 감동만 주는 건 아니었다. 유쾌하고 통쾌한, 그리고 은근하지만 절대 부담스럽지만은 않은 성적인 유머들이 필요적절하게 책 속에 담겨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를 꺼내 보자.
소녀가 마리오에게 사랑 고백을 듣고 집에 돌아와 베아트리스 어머니에게 들볶이는 장면 중 어머니의 욕설.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엉덩짝은 범선 돛,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그리고 마리오의 결혼식 후에 코소메가 부하 직원인 마리오에게 휴가를 주면서 한마디 툭 던진 절묘한 메타포.
“마음이 뽕밭에 가 있는데 어디 나라 생각이 나겠어.”
주점에서 네루다의 노벨상 소상 소감을 들으며 기쁨을 즐기고 있을 때, 코소메가 피서를 온 중년의 여인에게 납치(?)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 다음 날 날이 밝을 무렵에 돌아온 코소메는 중년이지만 삼삼한 여인과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러 그녀를 따라갔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듣고 소녀의 어머니가 툭 던진 입바른 소리.
“쏟아지는 정충 때문에 갔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타포는 아니지만 코소메의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쾌한 유물론 강의.
“유식한 척하는 양반,유물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더불어, 마리오와 시인이 함께 주점에서 본 아름답고 육감적인 베아트리스에 대한 적당히 선정적이면서도 거부감이 없는 묘사, 시인이 마리오에게 선물로 준 비틀스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장면의 생동감에다 신비감을 더한 환상적인 묘사는 이 작품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읽을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진지하면서도 때론 우스꽝스럽기도 한 파블로 네루다는 이 작품에만 등장하는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민중시인이었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에 오른 최초의 인물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피노체트 쿠데타의 의해 살해된 그달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아옌데 대통령은 이사벨 아옌데의 삼촌이기도 하다.
민중시인의 이미지를 보통 떠올려 보면, 투쟁 정신을 바탕으로 조금은 딱딱하고 경직된 인물이 떠오른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을 떠올려봐라. 강직하고 용맹한 그림은 쉽게 떠오르지만, 잔병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가족의 일에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매우 인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네루다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이 작품을 통해 부드럽고 여유로운 친근한 이미지로 재창조되었다. 실제로도 네루다는 칩거생활을 하며 매우 인간적인 이미지를 풍겼다고 한다. 역시 그는 진정한 민중시인이었던 것이다.
내게 있어 언제나 남미 문학은 색다른 체험이었다. 비난의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미나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일본 문학과는 색깔과 맛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느끼하면서 바삭바삭한 군만두 같은 영미 문학, 달콤하고도 쌉싸래한 초콜릿 같은 프랑스 문학, 고소하고 향긋한 참깨 같은 러시아 문학, 담백하고 깔끔한 생선회 같은 일본 문학. 그렇다면 남미 문학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람의 발길이 오래전에 끊긴 시골 뒷간에 막 들어갔을 때, 은근슬쩍 기대했던 냄새와는 달리 생각보다 구수하고 정겨운 냄새에 놀랐을 때 받은 그 느낌이라면 어느 정도 맞을 것 같다. 기분 나쁘지 않게 끈적거리는 것이 몸과 마음을 더듬어 소름이 돋아나게 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애절한 사연으로 눈물이 핑 돌게도 하고, 태초의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으로 웃음과 감동을 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괴롭고 힘든 현실을 아예 잊어버리고 몽환적인 환상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기도 한다.
신대륙 발견 이후 남미가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미국의 등쌀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점철된 남미의 불안정하고도 불행했던 민주화가 문제였을까. 그래서 어떤 작품은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을 읽고 나도 가슴속에 엉겨 있는 뭔가가 떨어지지도 않고, 그렇게 묵직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카르메타는 ‘문학은 엄숙하고 진지하기 만 하기보다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는 마리오의 생동감 있는 삶을 통해서는 로맨스와 해학의 ‘가벼움’을, 마리오의 실종과 쿠데타, 네루다의 죽음을 통해서는 ‘무거움’을 창조해내어서 조화로운 화환처럼 보기도 좋고 맛도 좋게 엮었던 것이다. 또한, 옮긴이의 말처럼 마리오가 시를 통해서 의식을 깨우치는 모습과 소녀의 어머니까지 네루다의 시를 인용할 줄 아는 모습은 네루다의 시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칠레 국민의 모두의 것임을 보여준다.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칠레를 대표하는 국민시인이었던 것이다. 이는 네루다라는 시인은 인류의 문명이 존재하는 한 칠레 국민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예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하나의 견고하지만 부드러운 한 편의 거대한 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특징이다.
칩거 중인 칠레의 국민시인 네루다와 네루다와의 만남으로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성장하는 마리오. 그 둘의 아마존 늪처럼 끈끈하고 촉촉한 우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이슬라 네그라의 평화로운 바닷가의 작품 속으로 한여름 무더위를 잊고 시원하게 달려가 보자. 아니 갈매기처럼 두 팔을 활짝 벌려 찰나 속에 숨겨진 영원의 열매를 따러 힘껏 날아가 보자.
참고로 남미 문학에 흥미를 느낀다면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들과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그리고 V.S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를 추천한다.
“시인 동무,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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