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31

웨딩드레스 | 정신착란, 살인,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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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 피에르 르메트르 | 정신착란, 살인, 도피, 그리고 범인과의 맞대결

그 여자에게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본능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다. (『웨딩드레스』, 257쪽)

물건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장소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다. 소피는 도무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편의 생일선물도, 조금 전에 주차한 차도 자신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 장바구니에 집어넣은 기억이 없는 물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 갑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산만해진 행동 때문에 소피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결정타가 터졌다.

소피는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서로 격렬하게 증오하던 시어머니의 등을 힘껏 떠밀어 계단에서 굴러 떨어뜨렸다. 앙상한 시어머니의 등을 떠밀은 순간의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인 꿈이었다. 그리고 소피는 진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이유도 없이 반수 상태에 빠져들었고, 깨어나고 나서 시어머니가 소피의 꿈대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와 상담을 하고 처방약을 먹어도 호전되기는커녕 여전히 소피의 기억은 들쑥날쑥했고 정신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 남편마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죽자 소피는 누가 봐도 정신이 멀쩡한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 남은 소피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르베 댁의 가정부로 취업했다. 근무시간이 들쑥날쑥하긴 했지만, 제르베 부부는 좋은 사람들이었고 6살짜리 외아들 레오도 착한 아이였다. 그런데 소피는 아무리 늦게 일이 끝나도 제르베 부인이 집에서 자고 가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이 날은 너무 피곤해 제르베 부인의 권유대로 처음으로 주인집에서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르베 부부가 출근하고 나서 레오의 싸늘한 시체를 발견했다. 레오의 죽음으로 정신이 나간 소피지만, 아이의 가느다란 목을 휘감은 밤색 끈이 자신의 등산화 끈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일상에서 늘 발생하는 사소한 분실, 소피의 정신착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기에 자신의 꿈과 그 꿈대로 죽은 시어머니 소식 사이의 시간과 기억의 단절은 그녀를 죄의식이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증세를 추가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던 남편이 의문의 자살로 죽자, 그녀의 죄의식은 병적인 죄책감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최후의 결정타로 가정부로 일하던 주인댁의 6살짜리 외아들 레오가 자신의 등산화 끈으로 목 졸려 죽는다. 이로써 그동안 기억도, 정신도 없이 몽롱한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겨우겨우 연명해온 소피의 삶은 무수한 폭탄 세례를 맞은 아파트처럼 힘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런데 누가 봐도 정신이 멀쩡한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던 소피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행동은 매우 의외였다.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 간단히 짐을 싸고 나온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은행 마감 시간에 턱걸이하여 예금된 돈을 모두 현금으로 찾아 역으로 향한다. 역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의 살인 사건에도 얽히게 되지만, 결국 소피는 도피 생활에 성공한다. 동선은 최대한으로 넓히고 한 도피처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도피처를 바꾸고 보잘 것 없지만 급여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일자리만 찾는 등 그녀는 프로 같은 치밀한 계획으로 2년 넘게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린다. 그러다 소피는 도피생활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몇 개월 동안 통용 가능한 위조 출생증명서를 암시장에서 산 다음 결혼소개소를 통해 적당한 남자와 결혼하여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레오가 죽기 전에 보여주었던 소피의 행동만을 보면 단순히 칠칠치 못한 것을 넘어 그녀는 누가 봐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녀는 도피생활에서 그전에 보여주었던 산만함과 흐리멍덩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떨쳐버리고 제정신을 가진 보통 사람도 흉내 내기 어려운 치밀함과 결연함을 보여준다. 당연히 독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미친 여자라고 봐도 무방했던 한 여자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2년이나 넘게 도피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다. 그녀가 진짜로 미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물론 어떤 의도를 가졌든 가짜로 미친 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소피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만약 그녀는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지만, 그녀를 정신착란으로 이끌었던 그녀와 그녀 주변에서 일어난 악몽과도 같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두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범인은 무슨 의도로 소피의 인생을 망친 것일까? 복수인가? 놀이인가? 아니면 쾌락인가? 그도 아니면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다른 의도나 계획이 숨어 있는 걸까?

Robe de Marie by Pierre Lemaitre

보통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피에르 르메트르의 『웨딩드레스』에서 범인은 일찌감치 공개된다. 고로 범인 찾기 놀이는 싱겁게 끝난다. 대신 왜 범인은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 같은 방법으로 소피의 인생을 망치는, 범인의 표현을 빌리면 ‘개조’하는 악랄한 계획을 실행하는지 독자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눈치 빠른 독자는 ‘프란츠’의 일기에서 범인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지만, 이때쯤이면 협력과 대립이 뒤섞인 소피와 프란츠의 기묘한 관계가 어떠한 결말로 끝날지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궁금증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된다.

소설 『웨딩드레스』는 타인의 악의적인 조작으로 평범했던 한 사람의 정신이 피폐해져 가는 광기의 개인사를 매우 그럴듯하게 묘사한 점도 흥미롭지만, 보통의 추리소설에서 보여주는 탐정 또는 형사와 대립하는 범인의 구도가 아니라, 범인과 피해자가 서로 은밀하면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고받는 묘한 구도가 이 작품의 묘미다(이 책은 일부 전자도서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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