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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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24.

[책 리뷰]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의 타당성과 가능성을 가늠 ~ 성장 자본주의의 종말(조너선 포릿)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의 타당성과 가능성을 가늠하다

원제: Capitalism as if the World Matters by Jonathon Porritt
모든 것은 지구 시스템과 그 한계 안에서 생존 가능하게 사는 법에 따라 결정된다. 생물 물리학적인 생존 가능성의 추구는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성장 자본주의의 종말』, 37쪽)

연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며 GDP 상으로 부자가 된 나라들은 지구행복지수 HPI(Happy Planet Index)는 매우 낮은 수치를 기록한다. HPI 리스트에는 경제적으로 서유럽보다 뒤떨어졌다고 생각되는 많은 남미 국가들이 상위권을 차지한 데 비해 경제 성장과 더불어 인류 문명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고 자부해왔던 서구권 국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경제성장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자본주의 예찬론자들의 주장은 이미 망상임이 드러났으며, 사람의 불만족과 불행을 먹고 사는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하기에는 생태계의 한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인간적 삶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혜택을 보장받지 못하는 전 세계의 수십억 명에게 경제성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급진적인 사람들은 행복을 가져오기는커녕 인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기후변화, 빈부 격차, 경제적 착취, 환경 파괴, 자연의 고갈 등에 책임이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더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경제가 성장하고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지면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예전의 믿음을 고수한다.

이처럼 극과 극을 오가는 치열한 대립 상태에서 조너선 포릿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도, 앞에서 언급한 고질적인 문젯거리를 해결하려면 현재의 성장 제일주의 자본주의를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혁신해야만 긍정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고 『성장 자본주의의 종말: 자본주의 환경의 손을 잡다』에서 말한다.

후변화, 빈부 격차의 확대, 경제적 착취, 환경 파괴, 자원의 고갈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부작용을 양산하는 현대의 성장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현재로선 자본주의를 대체할 마땅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혁명과도 같은 시스템 전환의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도 안 되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해도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기후변화 앞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남은 시간도 얼마 없을뿐더러 부담도 크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단기적인 역동성과 창의성, 효율성이라는 장점이 있고 이를 지속 가능한 발전의 원동력으로 전환한다면 자본주의는 충격적이고도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이행할 수 있을 만한 자율적인 조정시스템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쉽게 말해 스탠퍼드 대학교 생물학 교수인 그레천 데일리와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 엘리슨의 말처럼 ‘게임의 규칙’을 변경하는 것이다. 이 또한 자본주의지만,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유형인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성장 맹신주의에서 벗어나듯 기술 맹신주의에서도 벗어나야만 한다. 기술이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부작용을 양산한 것도 사실이다. 기술만이 우리를 구해낼 것이라는 종교적인 맹신과 무책임한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우리의 사고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정치가와 기업가는 사람의 경제활동이 본질적으로 생태계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정책에 이 점을 깊이 연관시켜 사람의 모든 활동이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어 더는 미래의 후손들이 사용할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현실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은 어렵더라도 탄소 소비와 에너지 효율을 고려한 지혜로운 소비가 필요하며 허영적 과소비와 오직 소비를 위한 소비의 늪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후변화와 생태계 붕괴로 말미암은 재앙 앞에서 ‘돌파냐? 몰락이냐?’, 이에 대해 이미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선택의 기회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있고, 아직은 일말의 희망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있다. 조너선 포릿은 자본주의의 대안적 모델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성장에 대한 생물 물리적인 한계를 설명하고 억제되지 않는 물질주의를 통해 인간 영혼이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자본주의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가 『성장 자본주의의 종말』에서 제시한 대안적 자본주의는 과감한 패러다임의 전환, 기술 • 생각 • 행동의 혁신을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 중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와 가장 큰 차이점은 생물 물리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다.

조너선 포릿은 『성장 자본주의의 종말』에서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의 타당성과 가능성을 입증하고자 정치, 사회, 경제, 기후변화 등 매우 폭넓은 분야를 상호연관성에서 통합적이고 다각적으로 분석했다. 이런 복잡한 역학 관계를 세밀하게 파고든 점은 사전지식이 풍부하거나 다양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추구하는 독자에겐 지식의 범위를 확충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간략함을 선호하는 독자에겐 너무 학술적이고 지나치게 포괄적인 내용이 지루하게 느껴져 자칫하단 설득력을 잃을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기후변화를 제쳐놓고라도 레이첼 카슨이 걱정했던 ‘침묵의 봄’을 반갑게 맞이하고픈 사람이 아니라면, 조너선 포릿의 책 『성장 자본주의의 종말』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다.

이 리뷰는 2017년 02월 2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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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8.

[책 리뷰] 상하이의 골목 생태계를 이어가는 무명 배우들 ~ 푸핑(왕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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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골목 생태계를 이어가는 무명 배우들

원제: 富萍(FuPing) by 王安憶(Wang Anyi)
그래서 푸핑에게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은 용모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온몸 여기저기서 발산되는 숨결에서 묻어나오는 것이었다. (『푸핑(富萍)』, 47쪽)

핑은 떠밀리다시피 상하이로 향한다. 상하이에는 남편 될 사람의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30년 동안 상하이 번화가에서 가정부로 일해온 할머니는 말이 할머니이지 푸핑을 키워준 작은어머니보다 젊어 보였다. 푸핑의 남편 될 사람 리톈화는 할머니가 훗날 의지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친척의 아들을 양자들인 손자였다. 리톈화는 동생이 주렁주렁 딸린 맏이이고, 집안 형편은 곤궁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할머니 덕분에 리톈화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네에 의지하여 살아온 푸핑은 자신의 혼사 이야기에도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좋다 궂다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온순하기로 정평 난 리톈화의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뾰족한 신코만 쳐다보았다. 그 앞에서 부끄럼을 탄다고 그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상물정 알 만큼 아는 할머니 앞에서 무턱대고 싫다고 말하기에 푸핑은 말주변이 부족했고 과묵하기도 했다.

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1960년대 중반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왕안이(王安憶)의 『푸핑(富萍)』은 중매 때문에 상하이로 상경한 억척스럽고 변덕스러우며 고집 센 시골 처녀가 낯설고 복잡한 도시적 삶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삶에 눈을 뜨고 그 방향을 잡아가는 내면의 변화를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처녀처럼 변화무쌍하고 활기차며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복잡한 도시 세태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 『푸핑(富萍)』 속에서는 할머니와 푸핑, 그리고 푸핑의 외숙모를 비롯해 다양한 하층민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화려한 상하이에서 이들이 그리는 삶의 궤적은 활동사진에 잠깐씩 등장하는 무명 배우들의 짤막한 연기처럼 눈에 띌 사이 없이 사라지지만, 이들이 남긴 흔적은 거듭하는 세대의 부침에 파동하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장충동의 족발 냄새처럼 골목 곳곳에 끈적끈적하게 남아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소설은 이들이 어떻게 가난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는지,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절대 슬프지만은 않고 풀뿌리처럼 소박하면서도 질기고 질긴 그들의 사연들을 통해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

그중에는 할머니나 푸핑의 외숙모처럼 인고의 세월 끝에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있고, 할머니 주인집 큰딸의 친구처럼 지지리게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은 찌든 가난과 숙명적 불행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마냥 칙칙하거나 음울한 것은 아니다. 그곳엔 도시에서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 밀려난 인간적 활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비천하지만 비굴하지는 않으며 가난하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이 사는 그곳에는 판자촌 골목의 어느 한 허름한 식당의 고향에서 가져온 염수로 푹 삶은 돼지고기에서 풍겨오는 기름지고 노릇노릇한 냄새 같은 푸근하고 구수한 그곳 나름의 견고한 생태계가 존재한다 .

자촌 하면 절로 코를 잡게 하는 시큼한 냄새, 곳곳에 쌓인 불결한 오물, 여기저기 널려 있는 누리끼리한 빨래,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배불뚝이 아이들 등 어두침침하고 불쾌한 환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무리 더럽고 너저분한 환경이라도 사람의 온기와 정이 더해진다면 사람이 못 살 것도 없다. 옛 서울에는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에 등장하는 ‘꽃섬’이 그런 곳이었고, 옛 상하이에는 푸핑이 정착한 곳이 그러했다 . 사람 사는 것이 별거 있는가. 덜 먹고 덜 가져도, 때론 별것 아닌 일 가지고 아옹다옹 다투어도 서로 오가는 정만 여전하다면 최악의 환경이라고 생각하던 곳에서라도 정착할 수 있고, 나름의 행복도 누릴 수도 있는 것이 알쏭달쏭한 우리네 삶이다. 그래서 답답할 정도로 고집 세고 무뚝뚝한 시골 처녀 푸핑이 낯선 도시 생활을 소화해가며 조금씩 자신의 앞길을 헤아려가는 과정이 유별나게 보이지만, 푸핑이 부대껴가는 크고 작은 사연과 우연 속에서 묻어 나오는 아련한 슬픔과 따스한 정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와 닿는다.

이 리뷰는 2017년 02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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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5.

구글 크롬(Chrome) 영문 글꼴이 흐릿하게 보일 때

언제부터인가 구글 크롬에서 영문 글꼴이 아래 스샷의 왼쪽 텍스트처럼 흐릿해 보이는 현상이 발생. 아마도 chrome://flags/의 실험실 기능에서 뭔가를 잘못 건드린 것 같아 하나하나 테스트해보다가 [LCD 텍스트 안티 앨리어싱][사용]으로 설정하여 해결. 보는 이에 따라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일지도 몰라도 내가 보기엔 미묘하면서도 상당한 차이.

이 리뷰는 2017년 2월 1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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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2.

[책 리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세대로 기억될 것인가? ~ 누가 지구를 죽였는가(클라이브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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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악의 세대로 기억될 것인가?

원제: Requiem for a Species: Why We Resist the Truth about Climate Change by Clive Hamilton
지구가 점점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흘러 넘침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경제적 가치와 대비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는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누가 지구를 죽였는가』, 82쪽)

이미 시작된 기후재앙?

2013년 5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300만 년 만에 처음으로 400ppm을 넘어섰다.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는 이산화탄소 농도는 과학자들이 기후 재앙을 다스릴 수 있다고 계산한 마지노선 450ppm에 근접하고 있으며 이 추세라면 기후평형이 깨지는 시점은 2050년 전후가 될 것이다. 또한, 지구온난화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그리고 예상대로 작년 2016년은 지구기온 관측 사상 가장 더웠던 해로 드러났다. 과학자들의 마지막 희망인 450ppm을 넘지 않으려면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지금 당장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기후변화 대비 정책을 시행했을 때에나 겨우 가능할 것이다. 이미 많은 과학자는 인류가 기후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시기는 놓쳤다고 고백한다. 그중 일부는 온난화 현상과 양성 피드백 효과를 발생시키는 티핑포인트의 징후들을 언급하며 이미 기후재앙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막화, 물 부족, 난민 등으로 내란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수단은 기후재앙과 그로 말미암은 기후전쟁의 현재진행형인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최소 수천 년 동안 기후변화가 만들어낼 변화는 비가역적일 것이며 인류는 문명의 이기와 과학의 오만이 만들어낸 생지옥에서 오랜 세대 동안 견뎌내야 할 것이다. 『누가 지구를 죽였는가(Requiem for a Species: Why We Resist the Truth about Climate Change)』의 저자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역시 전 세계가 대비한다고 해도 기후변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며 지금은 온난화의 표식이었던 카나리아가 죽었으니 모두가 탄광에서 나와야 하는 시점이라고, 기후변화는 미래에 닥칠 수많은 변수 중 하나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단언한다(카나리아는 탁한 공기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과거 광부들이 갱내의 공기 독성을 측정하는 중요 수단이었다)

과학기술의 황금세대가 과학자들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유

말 절망적이다. 내가 예전에 읽었던 그 어떤 (기후변화를 다룬) 책도 『누가 지구를 죽였는가』처럼 미래를 한 줌의 희망도 없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지옥으로 그려낸 적은 없었다. 수많은 보고서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과학의 나침반은 ‘기후변화’라는 눈금을 지나쳐 ‘기후재앙’으로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눈 가리고 아웅이다. 과거 그 어느 세대보다 눈부신 과학의 업적을 실감하고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세대임에도 왜 우리는 그 많은 과학자의 경고를 무시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의문에 대해 클라이브 해밀턴은 명쾌하면서도 참담하고 우울한 분석을 통해 인류에게 마지막 경고를 보낸다. 스스로 파국으로 나아가는 인류의 심리적 경향, 사실을 회피하는 경향, 지나친 오만과 낙관주의, 이기적인 탐욕, 자포자기로 말미암은 동기부여의 상실 등 인간의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들을 시원하게 헤집어 놓았기에 명쾌하지만, 반면에 자연주의와의 대립에서 승리한 물질주의, 성장에 대한 집착, 소비지상주의, 민주주의의 퇴폐 등 현재 인류가 자랑스러워하는 문명이 기후변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대비에도 실패했음을 적나라하게 밝혔기에 참담하다. 그리고 현재 인류 문명 시스템에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변화가 이루어져야 기후변화의 피해를 그나마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는 냉철한 주장에 우울하기만 하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세대로 기억될 것인가?

후변화의 증거를 앞에 두고도 낙관적인 희망을 품으며 진실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행동은 기후변화 대비에 걸림돌만 될 뿐이다. 인류는 막다른 절벽으로 떠밀려가고 있다. 아니 이미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절벽의 깊이가 너무 깊고 기후회의론자들의 집요한 훼방과 인류의 무관심과 무지, 안일함, 어리석음이라는 독무에 가려져 미처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최종 목적은 생존이다. 진화와 적응도 생존을 위한 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며 인류의 문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다. 때론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수단이 목적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제 인류는 문명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운명의 선택을 해야 한다. 어찌 보면 생각할 건더기 하나 없는 자명한 질문이지만,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인류는 머뭇거리고 있다. 문명이 퇴보한다고 해서 인류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어려움과 불편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후재앙이 조금씩 인류 문명과 지구 생태계를 갉아먹는 지금 그냥 이대로 주저앉는다면 현재의 인류는 역사의 단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세대로 기억될 것이다.

이 리뷰는 2017년 02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약간의 수정을 거친 다음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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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6.

[책 리뷰] 언어의 연금술사 셀마 라게를뢰프 ~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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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연금술사 셀마 라게를뢰프

원제: The Saga of Gosta Berling by Selma Lagerlof
인생은 고되고 자연은 가차 없다. 그러나 둘 다 혹독함의 대가로 기쁨과 용기를 선사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누가 그 둘을 견딜 수 있으랴.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348쪽)

들어가며…

눈파는 일 없는 태양은 연약한 대지를 기름 두른 프라이팬처럼 달구고, 덕분에 어둠 속에서 죽었다 되살아난 그림자는 의기양양하게 일상의 무료한 흑백 활동사진을 대지 위에 영사한다. 달구어진 대지는 자신을 무참히 짓밟는 두툼한 신발 바닥에 보복이라도 하듯 뜨거운 열기를 지상으로 발산하고, 뜨거운 햇볕은 무심한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리쬔다. 이쯤 되면 계절도 잊고 사는 바쁜 사람들에게 한여름 더위의 무시무시함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다. 얄밉게도 사람들은 문명의 시원한 발명품으로 들어찬 건물로 들어가 잠시 더위를 식히지만, 잠시 후에 있을 피할 수 없는 한여름과의 대면을 떠올리면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땀에 젖어 축축한 옷이 바짝 마를 정도로 열을 내며 분노를 터트려도 별수 없다. 어찌 인간 따위가 자연의 섭리에 불만을 터트릴망정 거부할 수 있을까.

이때, 공습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폭탄 터지듯 우렁찬 폭음과 함께 대지가 요동치고 공기가 파열한다. 방금 구워낸 벽돌처럼 뜨거운 보도블록과 접촉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보폭을 최대한 넓히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행인들도 화들짝 놀란다. 이들은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땅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아무 일 없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어느새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것 같았던 뜨거운 햇볕도 바람 타고 잽싸게 날아와 두툼하고 거대한 장벽을 형성한 구름에 막혀 한걸음 후퇴하고, 의기양양하던 그림자는 빛바랜 오래된 사진처럼 탈색된 채 풀이 죽어 있다. 구름을 몰고 온 시원한 바람은 꾸벅꾸벅 졸고 있던 먼지를 깨워 흩날리고, 이 모든 것에 어안이 벙벙해진 행인들의 땀을 식혀준다. 인제야 사람들은 날벼락 소리를 알아채고는 기대에 찬 반짝이는 눈빛으로 다시 하늘과 구름을 우러러본다.

한여름 더위 아래 노예처럼 신음하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삼스레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듯 솟아오르고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줄 시원한 물줄기를 한바탕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객잔에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의 목을 축여줄 한 잔의 물 같은 소나기라도 좋으니 잔인한 이 더위를 잠깐이나마 쫓아내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할까. 또한, 탈수된 빨랫감처럼 무더위에 쥐어짜여 허수아비처럼 푸석푸석해진 사람들이 소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은 얼마나 간절한가.

엎어진 꿀단지처럼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들

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매일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도시의 소음과 먼지에 엉망진창이 된 우리의 불쌍한 영혼을 한여름 무더위에 한바탕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위로해 주면서 마음의 묶은 때도 씻겨 줄 유익한 작품 한 편을 소개하고자 우쭐한 기분으로 한번 운을 떠본 서문이 너무 장황할지도 모르겠다. 무던하지만 지루한 삶의 연속에서 사막처럼 바짝 타들어 가 퍽퍽해진 우리의 감수성에 성수와도 같은 감동 어린 이야기로 울고 웃게 하는, 바로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The Saga of Gosta Berling)』 같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정말 보물 중의 보물 같은 존재이기에 없는 필력을 긁어모아 한 번 용을 써보았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길고 긴 호수와 풍요로운 평원, 그리고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을 무대로 파계한 목사 예스타 베를링(Gosta Berling )과 못 말리는 에케뷔의 기사들이 유쾌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는 인류에게 지루하게 반복되는 역사인 인간과 자연, 선과 악의 대립 등 현실의 삶뿐만 아니라 악마, 마녀, 요정, 저주 등 고달픈 현실에 싫증 난 당돌하고 재치있는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낼 법한 환상적인 이야기도 엎어진 꿀단지처럼 달콤하게 흘러나온다 . 극히 선한 자도, 극히 악한 자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이기적이고 억세지만, 선량하기도 한 사람들의 투쟁적인 삶이 만들어 내는 명랑한 비극과 비참한 희극의 어우러짐은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삶의 애환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현실이라기엔 꿈처럼 아득한, 삶이 환상이고 환상이 삶인 그곳이 바로 우리의 괴짜 목사 예스타 베를링이 사는 곳이고, 셀마 라게를뢰프의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는 유일하게 그곳으로 안내해 주는 은밀한 안내자이다.

당신은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반 알렉세예비치 부닌(Ivan Alekseevich Bunin)의 『아르세니예프의 생애(Жизнь Арсеньева)』 이후 이렇게 영혼의 심금을 울리는 멋스럽고 아름다우며 환상적이고 유쾌한 문장을 만나본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참고로 한 사람은 러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 또 한 사람은 스웨덴, 그리고 여성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다. 두 사람 다 명성에 걸맞게, 그리고 노벨문학상의 명예를 더욱 빛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경이로운 필치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두 사람의 문장력은 무수한 단어의 조합으로 끌어낼 수 있는 수많은 결과물 중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극치 중의 극치이다 .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이야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주는 감동 못지않게 작가의 고유한 문장력이 뿜어내는 오라가 없다면, 즉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는 소설은 스스로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저버린다. 연금술사가 단순한 돌을 값지고 눈부신 황금으로 변환시키듯, 글자를 깨우친 사람 모두가 사용하는 알파벳을 조합하여 이처럼 환상적인 문장으로 탈바꿈시킨 셀마 라겔뢰프야말로 언어의 연금술사다 . 마지막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깨닫는데, 특별한 지식이나 이해가 필요하지 않듯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역시 특별한 기술이나 높은 독해력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사악한 사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듯,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은 문학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없다. 사들사들 비쇠해진 감수성으로 삶이 팍팍하게 느껴진다면 반드시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으로 메마른 감수성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주길 바란다.

이 리뷰는 2017년 02월 0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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