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집 | 아베 도모지 | 과도한 지적 활동의 방관자, 빈약한 지적 활동의 이기주의자
>가몬과 마쓰코 사이의 감정의 기복, 그 승패의 관계만큼 기괴한 도착(倒錯)으로 가득찬 것은 없었다. (『겨울집(冬の宿)』, 52쪽)
‘내 기억은 모두 어떤 계절의 색깔로 물들어 있다.’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주인공 M은 학교와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적한 곳에 있는 기리시마 댁(霧島家)에 하숙하게 된다. M은 기리시마 댁에서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머무르지만, 기리시마 댁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쇠락해 가는 기리시마 댁은 보통 가난한 가족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위안이자 희망이라 할 수 있는 단란한 가족애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북극의 모든 얼음을 집 구석구석에 쌓아놓은 것 같은 무겁고 차가운 분위기가 집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간간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마저 장송곡처럼 집안을 짓누른다. 그래서 기리시마 댁은 ‘겨울집(冬の宿)’이다.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은 기리시마 가몬(霧島嘉門)은 방탕한 생활로 가사를 탕진하고 내각조사국의 경비로 근무하고 있지만, 근무복도 직장에 출근하고서야 갈아입을 정도로 내각조사국의 경비로 근무하는 걸 떳떳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그의 아내 마쓰코(まつ子)는 중매쟁이에게 속은 부모에게 이끌려 가몬에게 시집와 남편이 여자와 술, 사업에 유산을 탕진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갖은 고생을 다 겪어왔다. 그녀는 절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금치산자가 된 남편을 구원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고단하고 구차한 삶을 근근이 견뎌왔다. 그리고 이 부부 밑에는 가몬을 닮아 짓궂은 데루오(輝雄)와 늘 오빠에게 괴롭힘을 당해 울보가 된 사키코(咲子)가 있다.
과도한 지적 활동이 불러온 감정의 단절
M은 학교에도 별로 가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친구들이 앞다투어 투신한 사회운동에도 관심이 없다. 감정적인 대인관계에 염증을 느껴 사람을 회피하고 있었던 고독한 M은 뭔가 재밌는 거라도 관찰한다는 호기심으로 기리시마 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M은 처음 다짐한 대로 냉철한 관찰자가 되기는커녕, 보통의 부부 사이에 흐르는 봄처럼 훈훈한 기운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겨울처럼 싸늘한 냉기만이 감도는 가몬과 미치코 사이에서 본의 아니게 박쥐처럼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작은 악마가 되어 부부 사이의 냉기를 더 차갑게 얼어 붙이는데 일조하는 헤살꾼이 된다.
곧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눈앞에 둔, 한창 꿈과 열정으로 들뜰 나이의 청년이자 나름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M이지만,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그의 태도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삶에 대한 욕구를 일으켜주는 활기 같은 적극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이보다 M은 공허한 방관자에 가깝다. M은 가몬으로 인해 몰락한 기리시마 가족을 동정하며 성격 파탄자이자 가정의 불화를 몰고 온 가몬의 문제점을 직시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M은 가몬에게 동정과 우정이 섞인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M은 가몬에게 진심 어린 충고나 조언을 해주기는커녕 가몬에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면서 마쓰코가 남편에게 금지했던 술과 담배를 몰래 제공하는 나쁜 친구가 된다. 그렇다고 M이 일부러 술과 담배를 부추기는 건 아니다. 마쓰코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단지 말리지 않는 것뿐이다.
끊고 맺음이 확실하지 못한 M의 우유부단하고 무미건조한 성격은 한때 사귀던 이하라 하마에에 대한 미적지근한 태도에도 드러난다. 결핵에 걸린 하마에가 최후의 생명력을 불태워 죽음도 도외시한 생애 마지막 사랑을 갈구해도 M에게는 그 마지막 불길을 한순간이나마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게 지펴줄 의지도 열정도 없었다. 본능이 일으키는 대로 솔직하게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가몬의 정열적인 모습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M은 자기 생각에 침잠하여 모든 인간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인간의 감정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고 이성의 지배는 찰나이자 잠재적 희망일 뿐, 인간관계에서 감정을 배제하면 의미를 알 수 없는 공허한 껍질만이 남는다. M이 한참 후에야 데루오의 질투를 깨닫는 것은 감정이 배제된 인간관계가 어떠한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지 잘 보여준다. 지성과 이성만으로 모든 사물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은 M은 오만한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치면서...
일본 주지파 문학의 대표작가인 아베 도모지(阿部 知二)의 『겨울집(冬の宿)』에 등장하는 회의적이고 방관적이며 소심한 M은 탐욕적인 배금주의에 잠식당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삶과 물질적 가치에만 관심을 두는 이기적인 현대인들을 떠올린다. M이 사유와 관념에 몰두한 나머지 행동할 의지를 잃은 소심한 방관자가 되었다면, 현대인은 물질과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나눔과 공유의 기쁨을 잃은 이기주의자가 되었다. 한쪽이 과도한 지적 활동의 소치라면, 또 다른 한쪽은 빈약한 지적 활동의 소치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빈약한 이 시대에 M이 되어 살아가는 순수한 방관자가 있다면, 그자는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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