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30

게 공선 |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불경스러운 소설

The crab factory ship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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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 | 고바야지 다키지 |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불경스러운 소설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도,이곳에 비하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을 듯싶어.” (『게 공선』, 75쪽)

감히 불경스러운 소설

프롤레타리아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는 『게 공선(蟹工船, 1929)』을 발표한 다음 ‘불경죄’로 기소당했다. 이듬해 보석으로 출옥되지만, 당시에는 비합법적인 공산당에 입당하여 지하활동을 펼치다 첩자의 밀고에 걸려드는 바람에 또다시 체포되고 3시간 이상의 잔혹한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체포의 표면적 이유는 공산당 지하활동 때문으로 보이지만, 그에게 가해진 모진 고문의 원인에는 ‘불경죄’를 저지른 『게 공선』에 대한 불만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 공선』은 중편 분량의 작품이지만 당시 일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서구식 자본주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이제 막 돈맛과 함께 권력에 취한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봐야 할까? 심기가 불편해진 그들은 자신들이 흘린 떡고물을 먹고 사는 경찰을 수족처럼 부려 감히 반항적인 작품을 쓴 작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이권에 반항하는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말이다.

똥이 아니라 사람이 바글거리는 ‘똥통’

작품의 주 무대는 오호츠크 해로 게를 잡으러 가는 ‘게 공선’이다. 그런데 게 공선은 ‘공장선’이지만, ‘선박’은 아니었기에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장법이 적용된 것도 아니었다. 완전무결한 법의 사각지대 그 자체였다. 그래서 회사는 법의 빈틈을 이용해 게 공선에 승선한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었다. 1926년 9월에 실제로 일어난 ‘하쿠아이호(博愛丸)’ 사건에 작가의 추가적인 현장조사와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 이 작품이 묘사하는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는 사람이 한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하코다테 항에서 같이 출발한 다른 선박이 하쓰코 호로 긴급 구조 신호 SOS를 보내왔을 때 회사에서 파견한 감독관은 그 배는 큰 보험에 들어 있기 때문에 가라앉는 게 오히려 이익이라며 끝내 구조 요청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 배는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425명의 승무원과 함께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처럼 선박을 지휘하는 감독관들은 노동자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의료 지원은커녕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그들의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자꾸 목에 걸릴 정도로 소화하기조차 어렵다. 오죽하면 작가는 이들이 먹고 자는 숙소를 ‘똥통’이라고 표현했을까. 구타와 가혹 행위는 기본이며 이런 와중에 사망자가 발생해도 뭐라 하는 사람도, 뭐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야비한 감독관들은 혹시라도 노동자들이 단합하여 난동을 부릴까 봐 선원과 노동자, 잡일꾼 등 고용원들을 서로 이간질하여 경쟁시킨다. 이 모든 것을 국가를 위한 헌신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은 정당화시켰다. 그러하기에 군인도 이들의 무자비한 착취에 기꺼이 협력한다.

막노동 일꾼, 광부, 농부, 학생, 젖비린내나는 소년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게 공선 노동자들은 무지막지한 노동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해 간다. 선원과 보일러공이 없으면 배는 움직이지 않고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동전 한 푼도 부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단순 명확한 진리를 깨달으면서 차츰차츰 의식을 일깨운다. 그러다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 일이 일어난다. 특별히 누가 선동한 것은 아니었다. 각기병으로 죽은 노동자의 이름만 잠깐 거명될 뿐 나머지 노동자들은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을 정도로 작품은 철저하게 ‘집단 표현’에 중점을 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없고 혼자서는 의미가 없다는 듯 영웅적인 개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관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게 공선의 노동자들은 분기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약삭빠른 감독관이 근처 군함에 긴급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노동자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당하고 만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들은 ‘뭉쳐야 산다’는 말에 숨겨진 진리를 뼈저린 경험을 통해 깨달음으로써 더 큰 도약을 위한 견고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Crab Ship by Takiji Kobayashi

끝날 것 같지 않은 자본주의 독재

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993년에 일어난 대참사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의 사고 해역을 촬영한 수중 카메라에 우연히 찍힌 익사한 시체의 퉁퉁 부은 얼굴을, 그리고 세월호 침몰사고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사건 사이의 간격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럼에도, 바뀐 것은 없었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환상이고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이상은 애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것일까?

지금도 가난한 아이들은 굶어 죽는다. 헤픈 감상에 젖은 내가 꾸역꾸역 힘겹게 자판을 두드리며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아이들은 그렇게 죽어간다. 아파트 단지 내의 음식쓰레기 수거통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멀쩡한 음식들로 매일매일 채워지지만, 그 작고 연약한 아이들의 허기로 고통받는 볼록한 배를 채워줄 음식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고 꿈꾸던 그런 세상일까?

사회주의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자본주의는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어렸을 때는 살아있는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배우지만, 실상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는 서글퍼진 적은 없는가. 혹은 사람의 목숨조차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냉혹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자신도 알게 모르게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몸서리를 친 적은 없는가. 지금도 세상은 변하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지만, 그 세상을 추동하는 기본 틀은 지금처럼 대안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자본주의일 것이기에 좌절감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이 주는 충격은 히로시마 원폭급이며 메시지는 사시미 칼처럼 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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