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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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30.

[책 리뷰] 생명은 ‘흐름’이다 ~ 생물과 무생물 사이(후쿠오카 신이치)

생명은 ‘흐름’이다

원제: 生物と無生物のあいだ by 福岡 伸一
즉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흐름,그 자체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표층,즉 피부나 손톱이나 모발이 끊임없이 생성되면서 옛것을 밀어내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표층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신체의 모든 부위,장기나 조직에서뿐 아니라 언뜻 보기에는 고정적인 구조인 것처럼 보이는 뼈나 치아에서조차 그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분해와 합성이 반복되고 있다. 새것으로 대체되는 것은 단백질뿐이 아니다. 저장물로 인식되던 체지방조차 다이내믹한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다. (141쪽)

‘생‘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뭔가 할 말이 많을 것 같고, 그래서 뭔가라도 말해보려고 애써 머리를 굴려보지만, 붕어처럼 입만 벙긋할 뿐 막상 소리는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고 자신을 못났다고 책망할 필요는 없다. 각 분야의 대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분분한 것이 생명에 대한 정의니까. 하지만, 사람은 애매모호하게 넘어가는 것보다는 미덥지 못하더라도 뭔가 딱 부러지는 설명을 더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분분하다고 해서 생명에 대해 나름의 정의가 없는 것도 아니니 몇 가지를 살펴보면, 마르크스의 동료인 F.엥겔스는 “생명이란 단백질의 존재양식이다.”라고 정의했고,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진보를 이룬 20세기에 와서는 “생명이란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다.”라고 정의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두 정의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이나 아름다움, 우아한 움직임과 유구한 질서를 떠올리기는 어려울뿐더러 생명 역시 하나의 기계일 뿐이며 화학과 전기의 문제라고 본 기계론적인 인식론의 차가움과 오만함만이 묻어나온다. 그렇다면 생명의 본질을 가장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정의는 무엇일까?

명이란 요소가 모여 생긴 구성물이 아니라 요소의 흐름이 유발하는 효과, 즉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다.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기존의 단백질은 제거되고 새로운 단백질로 대체되는 순환이 끊임없이 계속됨으로써 잠재적인 폐기물을 시스템 밖으로 배출한다. 만약 폐기물의 축적 속도가 배출 속도보다 빠르면 생명은 위기 상태에 빠진다. 그 전형적인 예가 구조적인 단백질 질병인 알츠하이머병과 광우병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노화도 이러한 동적 평형 상태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노화가 동적 평형 상태의 질서를 깨뜨려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아니면 어떠한 이유로 동적 평형 상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노화가 진행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인사를 나눌 때 보통 “여전하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반년 혹은 1년 정도 만나지 않았다면 분자차원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여전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과거 우리의 일부였던 단백질들은 오래전에 퇴출당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웃지 못할 이야기에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리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단지 인간의 미약한 지각과 인지 능력, 그리고 그 짧은 수명으로는 미처 감지할 수 없을 뿐, 1분1초가 무섭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천년만년 옴짝달싹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하고 묵직한 바위도 바람과 비, 그리고 세월이라는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풍랑 속에 조금씩 깎여나가 언젠가는 작은 모래알이 된다. 볼품없는 집들과 위압적인 회색 빌딩들로 가득 찬 도시를 지탱하는 이 땅도 쉬지 않고 이동하고 있으며, 태양도 나이를 먹으면서 노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일 것이다.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 자연에 대한 착취를 당연시하는 어리석음, 동족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가치를 통계 내고 계산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 이 모든 것은 둘째치고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자연의 법칙이라 믿으며 공존과 공생의 진짜 자연의 법칙을 여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다지 잘 나가지도 못했으면서도 역시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아무튼,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는 출판 당시 과학서로는 드물게 50만 부 판매라는 놀라운 히트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만큼 대중이 쉽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바쁜 현대인을 위해 책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생물과 무생물 사이』는 독자에게 지적 충만감을 주고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 속에서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 속에서 독자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가르는 ‘생명’의 본질은 ‘흐름’이며 이 흐름이야말로 자연을 바라보는 지적생명체가 느낄 수밖에 없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리뷰는 2016년 06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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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24.

[책 리뷰] 두말할 필요 없는 고품격 판타지 ~ 반지의 제왕(톨킨)

The Lord Of The Ring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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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필요 없는 고품격 판타지

원제: The Lord of the Rings by J.R.R. Tolkien
“마땅하다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살아 있는 이들 중 많은 자가 죽어 마땅하지. 그러나 죽은 이들 중에도 마땅히 살아나야 할 이들이 있어. 그렇다고 자네가 그들을 되살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죽음의 심판을 그렇게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네. 심지어 우리 마법사라 할지라도 만물의 종말을 모두 알 수는 없거든. ….” (『반지의 제왕 1 – 반지원정대 1』, 145쪽)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그 이상을 해낸 영화, 영화만큼이나 뛰어난 원작

화의 문외한이라도 피터 잭슨(Peter Jackson) 감독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를 안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한 영화이고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호빗(hobbit)’이라는 작고 통통한 앙증맞은 종족은 쉽게 잊히지 않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호빗뿐만 아니라 빼어난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돋보이는 엘프, 부를 사랑하는 완고한 드워프, 말도 행동도 굼뜨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도 숲을 사랑하는 엔트, 정의를 위해 샤두팍스를 타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달려가는 마법사 간달프, 절대반지의 노예가 된 가련한 골룸 등 가운데땅의 다양한 종족을 대변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이들의 무대가 되는 웅장한 대지, 그리고 신화와 전설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장엄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은 ‘판타지’라는 장르를 평가함에 빼놓을 수 없는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시냇물처럼 끊이지 않고 영화 속을 흐르는 은은한 감동과 소소한 재미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이면 상당히 길었던 상영시간조차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로 마약 같은 강력한 중독성을 내뿜는다. 그래서 필자는 SF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스타워즈에 버금가는 판타지 영화를 꼽는다면 주저 없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꼽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두 번 이상 보아왔으면서도 바보같이 몰랐던 것이 있었다. 바로 톨킨(J.R.R. Tolkien)의 원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톨킨의 원작 6권을, 아니 해설까지 포함해서 7권 전부를 읽은 지금 영화가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축약시키기 위해 각색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으며, 뛰어난 원작이 있었기에 그만큼 좋은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영화의 상영시간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기에 원작의 상당 부분을 빼거나 줄이고, 이런 가위질로 어색해진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주고자 때론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지만, 영화는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의 거대한 뼈대를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다. 영화 1부에서 이제 막 결성한 원정대가 깊은골을 출발하고 얼마 안 지나 호빗들이 보로미르에게 검술 수업을 받는 우스꽝스런 모습은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며, 영화 3부에서 사루만의 죽음은 원작보다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원작에서도 사루만은 뱀혓바닷(그리마)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지만, 막 폐허가 된 오르상크에서가 아니라 호빗들이 영웅이 되어 돌아간 샤이어에서 죽는다. 원작에는 호빗들이 고향 샤이어로 되돌아갔을 때 다시 한 번 사루만의 비열한 음모와 대결을 벌이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루만의 죽음을 앞으로 댕긴 듯하다. 그리고 영화 3부 미나스 타리스에서 벌어지는 전쟁 장면 중의 하이라이트이자 관객에게 악의 부대를 폭풍처럼 거침없이 덮치는 짜릿한 승리감을 전해주는 아라고른이 데리고 온 사자(死者) 부대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미나스 타리스에 도착하기 전에 아라고른이 사자 부대의 저주를 풀어주기 때문에 영화처럼 미나스 타리스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영화는 원작의 해설부분까지 충실히 참고했음을 알 수 있는데, 원작의 본문만 보면 보로미르와 파라미르 형제의 우애, 아라고른과 아르웬의 사랑의 서약, 감지네 샘과 초막골네 로즈와의 연인 관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7권 해설을 봐야 알 수 있다.

이야기 신의 재림과 영웅의 귀환

1권 서문에서 저자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쓴 동기와 의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일차적인 동기는 정말로 긴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었다.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 그들을 즐겁게 하고,기쁘게 하고, 때로는 흥분시키기도 하고 또 깊은 감동까지 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반지의 제왕 1 – 반지원정대 1』, 24쪽)
무슨 심층적인 의미나 ‘메시지’의 존재와 관련해 말하자면,작가의 의도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이 작품은 알레고리적인 것도 아니고 시사적인 것도 아니다. (『반지의 제왕 1 – 반지원정대 1』, 25쪽)

일찌감치 신랄한 비난에 대한 방패막이를 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평론가들의 부정적 평가와 비주류 문학이라는 평가절하는 피해갈 수 없었다. 반면에 그런 전문가들의 가혹한 평가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듯 일반 독자들은 톨킨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왔다. 그것은 톨킨이 이 작품을 쓴 일차적인 동기, 즉 독자를 ‘즐겁게 하고,기쁘게 하고, 때로는 흥분시키기도 하고 또 깊은 감동까지 줄 수 있는’ 이야기꾼으로서 매우 성공적인 작품을 썼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정교하고 웅장한 구상과 섬세하고 깊이 있는 묘사와 방대한 지리적 및 역사적 배경으로 현실과는 무관한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초현실적인 판타지 문학의 기초를 튼튼히 했으며,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절대반지’의 마력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데도 성공했다. 왜냐하면, 투명인간은 인간의 은밀하면서도 도발적인 욕망을 안전하게, 그리고 비밀스럽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완벽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현실에서는 문명인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별 희귀 망측한 짓을 투명인간이 되어 도덕과 양심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저지르는 자신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그런 헛된 망상은 부질없다는 듯이 절대반지도 결국엔 파괴되고 만다. 그 파괴로 말미암아 절대반지에 대한 간절했던 상상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아쉬움 속으로 추락하면서 안개산맥의 모리아 입구에 있던 돌문에 각인된 룬문자처럼 독자의 뇌리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또한, 우리는 거룩한 반지원정의 위업을 달성한 영웅들, 그중에서도 가장 연약해 보이는 호빗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키는 인간의 절반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먹고 노는 것도 좋아하는 순박한 그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굳센 의지력과 무쇠 같은 용기를 발휘하여 반지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완수하면서 일약 가운데땅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저 그런 시골농부 같은 호빗들이 자신들의 평화롭고 고요한 삶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반지원정을 위해 의연하게 목숨까지 내놓으며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영웅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체현한다. 부와 명성만을 좇는 너저분한 인간들이 득실대는, 진정한 영웅을 상실한 현실에서 그들은 귀환한 영웅이다. 부와 명성을 위해 음흉한 계략과 앙상한 인내만이 횡횡하는 시대에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인내, 우정과 신뢰, 그리고 변치않는 신념과 희망은 가치 있는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위안과 희망을 준다.

초록이 우거진 전원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하루일과를 마무리하는 저녁이면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흥에 겨워 춤을 추는 호빗 종족의 전원적이고 소박한 삶에서 첨단 문명의 이기가 결코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우리는 산업화가 가져다준 황폐하고 삭막한 삶에 자신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아직 ‘원정’이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절대반지’는 파괴되고 절대악 사우론은 제거되었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사악함은 여전히 건재하며 ‘절대반지’가 우리의 작은 영웅 호빗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지배하려 했다면, 현실에서는 ‘물질’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프로도는 끝내 자신의 의지로 반지를 파괴하지 못하고, 반지는 골룸의 운명적인 배신을 통해 파괴된다. 부정하게 축적한 돈다발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미련없이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갑자기 고개를 쳐든다.

마치면서...

M. 쿳시(John M. Coetzee)는 오랫동안 읽히고 논의되어 인류문화의 유산이 될 소설들을 썼다는 이유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또한, 도시는 인류가 뱉어난 가래침이라고 루소(rousseau)는 말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인류가 뱉어난 가래침 속에서 더러움과 비참함, 순수함과 깨끗함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도시인들에게 오랫동안 읽히며 풍부한 꿈과 아름답고 낭만적인 공상의 재료를 제공함으로써 위안과 휴식, 때론 도피처를 제공하기에 손색없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끝으로 무협소설에는 『영웅문』과 『소오강호』로 유명한 김용(金庸)이 넘볼 수 없는 존재로 우뚝 서 있다면, 판타지소설에는 바로 톨킨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리뷰는 2016년 6월 2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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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8.

[책 리뷰] 태어난 사람?, No! 우리는 심어진 사람 ~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The Lost Language of Plant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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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사람?, No! 우리는 심어진 사람

원제: The Lost Language of Plants by Stephen Harrod Buhner
생명사랑의 기질은 토착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 기질이 유기적으로 발현되면 생태지식이 생겨나고,그러면 자연세계에 대한 일련의 정보들을 얻게 된다. 생명사랑은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진화의 산물이므로,문명의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들처럼 끈질기게 계속해서 발현될 것이다.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The Lost Language of Plants)』, 117쪽)

미신 같은 이야기 속에 숨은 식물 세계의 비밀

속에 나타난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흙 속에 손을 묻는 순간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깨달으면서 잃어버렸던 삶에 대한 의욕을 다시 찾은 여자. 식물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아가씨. 집에서 기르던 식물이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려는 것 같다며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여자. 미신처럼 들리는 이런 경험담을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독자 중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더 나아가 식물이 그들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이웃하는 다른 생명체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때론 아주 먼 곳으로 이사도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니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와는 달리 우리의 조상은 식물과 소통하며 살았다. 아직도 전통적인 약초치료법을 고수하는 원주민들은 아플 때면 꿈속에서 받은 계시를 통해 몸에 필요한 약초를 찾는다. 그들이 식물을 채취하러 나갈 때 식물에 통사정을 설명하면서 도움을 구하면 필요한 약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또한, 필요한 약초를 찾았다고 해서 성급하게 꺾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약간의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된 식물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때론 간소하게나마 제물을 바치고 약초를 캤다.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 과학은 원주민들이 간직해온 약초치료법은 단지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로 얻은 지식일 뿐이라며 미신으로 몰아세우지만 그러한 가정을 증명할 길은 없다. 혹은 그렇더라고 해도 몸이 아플 때 식물을 먹으면 치유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누가 해주었을까? 그저 이 모든 것이 운이 좋은 인류가 잠시나마 지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연과 행운이 겹친 덕분일까?

인류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느리고 아득히 먼 식물의 언어

대 인류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긴 족보를 가진 식물은 지금 당장 지구 상에서 인류가 사라진다면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10년 묵은 체증이 확 풀리듯 시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을 비롯한 지구 상의 모든 동물은 식물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지구에 뿌리를 내린 ‘자연’이라는 생태계에 식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식물과 인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테리아라는 공통 조상을 만나듯 식물과 인류는 먼 친척이다. 식물은 동물 생태계에 필요한 각종 양분을 제공하고 공기 중의 산소를 일정량으로 유지해 준다. 그리고 식물과 그들의 다채로운 이웃들은 동물의 배설물과 시체를 자연의 대순환 속으로 흡수해 죽음과 삶의 순환을 영생시킨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식물이 인류에게서 분리시킨 분석과 통제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 서로 공존을 모색해야 할 협력의 대상임을 말하고 있다.

식물은 그들의 언어인 화학물질을 통해 경이로운 자연을 훌륭하게 이끌어 왔다. 비록 식물이 잎이나 줄기 등에 상처를 입으면 항생제와 항염제를 생성해낸다는 것이 식물이 통증을 느낀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해도, 자신의 몸에 어떤 상해를 입었을 때 적절한 반응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생존욕구가 사람만큼이나 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숨을 쉬고 또한 언어를 통해 주변의 곤충이나 박테리아 등 이웃들과 소통하면서 지혜롭게 공존의 삶을 선택해 왔으며 그들도 역시 죽음 앞에서는 방법만 다를 뿐 인간처럼 저항한다. 사람이 식물의 뿌리를 뽑는 것은 순간이지만, 식물의 언어와 행동체계는 상당히 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관념으로는 영영 그들의 생존 욕구와 투쟁을 눈치챌 수 없다.

그러나 식물은 사람과는 다르게 관대하다. 해충이 자신의 잎을 먹어도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면 굳이 방어물질로 저항하지 않는다. 비록 그 식물에는 해충으로 작용하지만, 가이아라는 생명의 대바다에서 보면 먹히는 식물이나 식물을 먹는 해충이나 유기적인 구성원으로서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는데 일조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 또한, 흔히 인류가 자연의 법칙으로 일컫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을 어설프게 이해한 사람들이 인류 문명에 만연하는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멋대로 만든 말이다. 자연에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과 그 이웃들은 서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과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법칙을 지켜왔으며 이 법칙에 거스르는 생명체만 도태될 뿐이다. 이 진화의 법칙에서 인류라고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이것이 가능했기에 수억 년 이상 경이로운 자연의 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우리는 자연에 대해 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몇 가지의 유용한 기술도 얻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찬탄을 금치 못하던 우주의 경이로움에 대해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우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막연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과학은 식물의 광합성조차 모방할 수 없다. 소통과 공생으로 수억 년을 지켜온 자연의 경이로움과 그 복잡한 생태적 환경에 대해 솔직히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기계론적 인식론에 묻힌 과학자들에게 자연은 인류의 문명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소모적인 자원일 뿐이다. 그들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몇 가지 지식과 도구에 득의양양해하며 이제는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실제로 시도했다. 자본은 사람을 착취했고, 자본과 결합한 과학은 자연을 착취했다. 그나마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고통을 호소할 수 있었기에 값싼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었지만, 식물이 설령 그러한 호소를 보여줬다고 해도 식물의 세계는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거북이보다 느리고 오대양처럼 넓다. 또한, 식물이 착취를 피해 멀리 이동하기에는 인간의 착취는 체계적이고 기술적으로 빠르게 진행이 되어 식물로서는 빠져나갈 틈이 없다. 결국, 인류의 오만은 인간의 시간개념으로는 영원에 가까운 세월의 회복 기간이 필요할 정도로 무참히도 자연을 파괴했다.

자연과 분리된 삶에서 ‘힐링’과 ‘웰빙’은 ‘개소리’일뿐!

명사랑과 생태지식의 상실로 우리는 상처를 입었다. 이것은 당연히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과 단절한 대가로 얻은 부끄러운 상처다. 이 상처가 얼마나 깊숙이 우리 몸에 새겨져 있는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과학의 이기로 잊었던 식물과의 소통법을 다시 되새기도 싶다면, 인위적으로 그럴듯하게 꾸며진 공원이 아니라 진짜 숲을 가보면 알 수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식물이 호흡하는 숲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청량감, 상쾌함, 그리고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은 우리가 식물들과 함께 호흡하며 소통했던 때가 있었음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해준다. 식물들이 내뿜는 수많은 화학물질이 우리에게 계속하여 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당신은 황폐한 도시에서 너무나 지쳤어요. 이제 제가 그것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어요. 제게 조금만 더 가까이 오세요. 저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설령 당신이 저를 해친다고 해도 말이에요.’라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숲 속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 몸이 먼저 느낀다. 그만큼 우리 몸과 식물은 때려야 땔 수 없는 사이이다.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The Lost Language of Plants)』는 말한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빈자리가 있다. 식물들만이 채워줄 수 있는 자리. 나무나 돌, 곰이 있어야 할 자리,지구 상에서 100만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진화해온 생명체들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자리. 이 빈자리를 채우지 않으면,우리는 반쪽짜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결코, 완전히 인간이 될 수 없으며,치유될 수도 완전해질 수도,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결코,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377쪽)

‘태어난’ 사람이 아닌 식물처럼 ‘심어진’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Stephen Harrod Buhner)가 쓴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를 읽은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알맹이 없는 ‘힐링’과 ‘웰빙’은 이득에 눈이 먼 자본이 집요하게 부르짖는 개소리라는 것과 자연이 식물 없이 존재할 수 없듯, 우리가 식물 없이 살아갈 수 없듯, 자연과 분리된 삶에서 ‘힐링’과 ‘웰빙’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리뷰는 2016년 6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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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2.

[책 리뷰] ‘완벽’이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한 혁명가에 대한 진중한 기록 ~ 체 게바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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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이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한 혁명가에 대한 진중한 기록

Original Title: Che Guevara by Jean Cormier
혁명이 다만 단순한 경제 사회적 변혁에만 한정된다면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인간’을 생성시키기 위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였다. (『체 게바라 평전(Che Guevara)』, p494)

을 단 베레모, 텁수룩한 구레나룻, 그리고 올리브그린 군복. 이 세 가지는 체 게바라(Che Guevara)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많은 사람의 마음과 머릿속에 각인된 상징이나 다름없는 한결같은 체의 모습이다. 공식적인 외교 방문 중에서조차 군복을 입었던 체가 군복을 벗는 날은 아마도 전 세계의 민중이 해방되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가난과 착취가 없어지는 날일 것이다. 그러나 체는 죽었다. 군복을 입은 채로, 그리고 그가 못 이룬 혁명과 그 혁명으로 이루고자 했던 장밋빛 이상을 남겨두고. 설령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군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체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해 이루고자 했던 전 세계 민중의 해방은 여전히 요원하기 때문이다.

산주의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교육을 통해 민중을 도덕적으로 개량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능력에 의한 분배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분배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아닌 필요에 의한 분배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그러나 ‘사유’의 개념은 마약보다도 더 지독하게 민중을 파고들었고 끝내 그들은 ‘사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혁명에 참여한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탐욕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들은 혁명에서 승리하자 그동안 감춰두었던 탐욕을 드러냄으로써 민중을 해방하기는커녕 민중을 옥죄던 올가미만 교체한 격으로 혁명을 서둘러 끝냈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달랐다. 그는 좀처럼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쿠바 혁명 성공 후 정부의 여러 요직을 맡으면서 충분히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아니면 좀 더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체가 국립은행의 총재로 있을 때는 자신이 이 나라의 화폐를 책임지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전투 중 획득한 포로를 무조건 방면할 정도로 관대했었던데 반해 스스로에게는 매우 엄격했다. 노동의 중요성을 실천으로 보여줬고 대장인 자신조차 커피 한 잔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마시는 일이 없도록 커피 양까지 통제했으며, 대장이라 해서 다른 대원들보다 한 숟가락의 음식을 더 받는 것도, 그리고 다른 대원보다 음식을 먼저 받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위에 걸맞은 어느 정도의 특권의식은 당연시되고 있는 점을 생각해볼 때 체 게바라가 얼마나 청렴결백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지는 굳이 두 번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아마도 그가 탐욕을 부렸던 유일무이한 삶의 요소는 바로 혁명 과업이었으리라.

1962년 10월, 체는 아바나에 모인 청년당 조직원들 앞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젊은 공산주의자의 의무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인간형의 완성입니다. 새로운 인간형의 완성이라는 말은 최고의 인간에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최고의 인간은 노동과 학문, 이 세계 모든 민중과의 부단한 연대를 통하여 정제된 인간입니다. 이 지구상 어디선가 무고한 목숨이 꺼져갈 때 함께 고통을 느낄 수 있으리만치 감성이 계발되어 있으며, 자유라는 깃발 아래 분연히 일어설 줄 아는 인간입니다.” (『체 게바라 평전(Che Guevara)』, p510~p511)

체 게바라는 스스로 주장한 ‘새로운 인간형’, 즉 교양 있고 윤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신념과 혁명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의 중점적인 견해를 이렇게 요약하기도 했다.

서구 사람들 대부분의 행동을 특징짓는 것은 개인주의다. 그 개인주의에 빠져든다면 거기에는 도덕이 있을 수 없다. 도덕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체 게바라 평전(Che Guevara)』, p707)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사르트르의 평가와 ‘전사 그리스도’라는 다소 과격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애칭은 체 게바라의 삶이 비상한 사람조차 흉내 내기 어려운 극기, 희생정신, 강철 같은 의지와 투쟁 그리고 혁명에 대한 신뢰와 확신 등으로 바위처럼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형’을 몸소 실천했던 체 게바라는 아내나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걸 남겨주지 못했고 이것은 체 자신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안타깝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국가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충분히 책임져주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바 혁명 전투 중 일부 농민들의 배반으로 혁명군은 위험에 빠지기도 했지만, 체는 끝내 민중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을 정도로 민중을 신뢰했던 것만큼 혁명으로 새로 태어난 쿠바 역시 신뢰했던 것이다.

체는 볼리비아 대장정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전략)

너희들은 더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중략)

특히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체 게바라 평전(Che Guevara)』, p558~p559)

이 세상 모든 아버지 중에서 체 게바라처럼 자녀에게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는, 더구나 그것을 행동으로써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었던 아버지가 과연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으라는 체의 말은 보통의 어른들이 도의상, 체면상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자녀나 학생들, 또는 타인에게 하는 위선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자녀가 불의를 보고 외면하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불의에 맞서 싸우다 죽을지언정 정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신념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자 혁명 정신의 뿌리였다.

계적인 전기작가 장 코르미에(Jean Cormier)의 『체 게바라 평전(Che Guevara)』은 체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와 체가 남긴 수기나 편지, 그리고 현장 답사를 통한 자료 수집 등 저자의 10년이 넘는 혼신의 노고 끝에 완성된 역작이다. 어떠한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체의 인생과 옥석 같은 신념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무협지보다 흥미진진하고 추리소설보다 더 긴장감 있으며, 어떤 문학보다도 감동적이다. 그야말로 체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성서나 다름없는 책이며, 그렇지 않은 독자라도 전 세계의 가난과 착취를 혁파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세상을 떠난 한 혁명가의 절대 평범하지 않은 삶이 담긴 진중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배부르고 등 따스한 현대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경계해야 할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 경계는 다름 아닌 안일한 일상과 적당한 물질적 풍요에 온순한 양처럼 길든 삶의 무기력에서 오는 나약함이다. 그런 우리에게 체는 고함치고 채찍질한다. 아무리 많은 식량이 생산되더라도 여전히 굶주리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의 불의를 외면하는 비겁한 인간이 되지 말라고.

이 리뷰는 2016년 6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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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6.

[책 리뷰]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을 상상하다 ~ 체 게바라(유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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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을 상상하다

Original Title: 소설 체 게바라 by 유현숙
나는 15세 때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찾게 되면 흔쾌하게 내 생명을 걸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소설 체 게바라』, p37)

게바라(Che Guevara)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 사르트르는 체를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정의감이 강했던 체는 안정된 직업인 의사가 되고도 세상에 만연하는 불평등을 외면할 수가 없었고,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과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 세계 민중 해방을 위한 혁명에 바쳤다. 그가 쿠바 혁명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콩고, 볼리비아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애국심을 넘어선 그의 순수한 혁명 정신을 증명한다. 그는 혁명을 위해 태어난 진짜 혁명가였다.

게바라의 극적이고 농후한 일생을 400쪽도 안 되는 한 권의 책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의 일생에 존경과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그럼으로써 그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픈 독자에겐 아무래도 실망스럽고 아쉬운 일이다. 한 권으로 체 게바라의 농도 짙은 삶을 묘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을 저자도 의식했는지 『소설 체 게바라』는 체에 대한 여러 저작물 중에서 호평받는 장 코르미에(Jean Cormier)의 『체 게바라 평전(Che Guevara)』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는 선에서 만족하는 듯하다. 즉, 평전에 자세히 기술된 쿠바 정부군과의 혁명 전투 과정은 간략하게 다루어졌지만, 체가 본격적으로 혁명 과업에 뛰어들기 전에 떠난 여행에 대한 묘사나 볼리비아 진입 후의 게릴라 전투 전개는 평전의 부족한 점을 소설이 보충해주는 듯하다. 특히 볼리비아 진입 후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전개하기 전 게릴라 부대원들을 데리고 산악 행군 훈련을 하며 비트를 구축하던 시기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다.

그러므로 평전에 더 비중을 두되 가능하면 소설도 같이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만, 평전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어 소설보다는 좀 더 신빙성이 가는 평전을 먼저 봐야 소설의 허구성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체가 의사 학위를 따기 전 친구 알베르토와 포데로사를 타고 여행 중에 잠시 머무른 산 파블로 나환자촌에서의 상황이 그렇다. 평전은 두 사람이 나환자촌 사람들이 만들어준 뗏목을 타고 함께 떠나는 것으로 나오지만(『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도 마찬가지), 소설에서는 알베르토는 마을에 남겨두고 체 혼자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여담이지만, 체 게바라의 일생을 소설로 다룬다면 김용의 대작 『영웅문』처럼 6권 정도는 돼야 깊이 있고 흥미진진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1부는 체 게바라의 소년 시절부터 친구 알베르토와 포데로사와 함께 하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2부는 알베르트와 동행한 여행, 3부는 알베르토와 헤어지고서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기까지, 4부는 쿠바 정부군과의 혁명 전투, 5부는 쿠바의 혁명 전개 과정, 6부는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전개 등 이런 식으로 구성하면 딱 좋을 것 같다.

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체 게바라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된 사실 중에서 나와 체 사이의 일치하는 습관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블랙커피를 고집하는 습관이다. 세상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 중 블랙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어디 한둘뿐이겠냐마는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추앙받는 체 게바라도 깊이 알고 보면 한 명의 사람이었음은 시가를 즐기고 블랙커피를 선호하는 그의 사소한 습관에서 엿볼 수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천식으로 고통받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도 낳는, 분명히 그도 인간이었지만 왜 많은 사람이 그를 잊지 못하고 영영 식지 않는 열렬한 존경의 마음과 찬사를 그에게 바치는 걸까. 그것은 나의 이 졸렬한 글재주로서는 과히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어쩌면 단 몇 마디 찬사나 경탄의 말로 그를 표현하려는 것 자체가 욕심이고 오만일 수도 있다. 진정 체를 만나고 이해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이 몇 마디 쓴 조잡한 글에 만족하지 말고 숭고한 그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조명한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 리뷰는 2016년 6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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