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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30일 월요일

[책 리뷰] 제국의 시간을 지탱한 폭력과 야만의 역사 ~ 야만인을 기다리며(쿳시)

Waiting for the barbarian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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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간을 지탱한 폭력과 야만의 역사

원제: Waiting for the barbarians by J.M. Coetzee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228쪽)

도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지대의 한 성을 30년 넘게 관리해 온 시골 치안판사인 ‘나’는 사막의 폐허 속에 파묻힌 오래된 유물들을 수집하거나 영양과 토끼를 사냥하면서, 때론 창녀와 시간을 보내는 등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며 은퇴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겐 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야만인들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크게 문젯거리가 될 것도 없을뿐더러 가끔 일어나는 산적질은 평화를 깨트릴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때그때 적당히 보복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에서 파견된 정보부 소속의 죨 대령이 오면서 ‘나’의 안일한 삶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죨 대령은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하고 서로 연합하고 있다며 조만간 제국이 야만인들과 전쟁을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나’는 얼마 전에 있었던 야만인들의 습격이 있은 직후 근처에서 잡아들인 노인과 소년을 대령에게 맡긴다. 노인은 종기로 고생하는 소년을 위해 의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소년은 팔뚝에 감긴 헝겊을 풀어 부은 종기를 보여준다. ‘나’는 이들이 무고하다고 생각하지만, 대령은 두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령은 이들을 고문한다. 고문 끝에 노인은 죽고 소년은 자백한다. 대령은 고문의 상처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소년을 안내자로 삼아 부대와 함께 성을 떠나고 행군 중 만나는 이방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 ‘나’는 대령에게 잡혀온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토착민들을 변호하다 불온한 자로 찍힌다.

대령은 붙잡아 온 토착민들을 심문한 다음 방면한다. 그들 중에는 고문 끝에 죽은 한 남자가 있었고 역시 고문으로 거의 눈이 멀고 발목이 부러진 그 남자의 젊은 딸도 있었다. 그녀는 혼자 도시에 남아 거지처럼 동냥하며 살아가다가 ‘나’의 눈에 띄게 된다. 그녀를 동정한 ‘나’는 그녀를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자리를 준다. 그리고 밤마다 그녀와 같이하며 그녀의 몸을 씻겨주다가 황홀경에 빠지며 잠이 든다. 대령이 수도로 보고하러 간 자리를 비운 어느 날 ‘나’는 그녀를 가족에게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고 고생 끝에 유목민과의 접촉에 성공해 그녀를 무사히 보내고 마을로 돌아오지만, 그 일이 빌미가 되어 ‘나’는 적과 내통한 배신자로 낙인 찍혀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자는 이전에 읽었던 J.M. 쿳시(J. M. Coetzee)의 다른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에서 얻은 메시지의 연장 선상에서 이 작품을 이해했다. 즉, 서구가 철석같이 믿는 이성과 그 이성의 단짝인 합리주의가 합작해서 나온 생산물인 식민주의에 기생한 야만적 폭력의 역사로서 말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배경 역시 제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다. 그리고 그곳을 지배하는 ‘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랑하는 그저 그런 치안판사다. 『어둠의 땅』에서처럼 토착민들은 야만인으로 불리며 멸시받는다. 수도의 정보부에서 온 죨 대령은 굴비를 엮듯 철사로 야만인들의 뺨과 뺨을 꿰어 엮기도 하고 잡아온 토착민들을 고문하고 죽이며 불구로 만든다. 또한,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여 시민을 자극하고 야만인과 전쟁을 벌인다. 왜 대령을 비롯한 제국의 앞잡이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굳이 파괴하면서까지 야만인을 토벌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제국이 만들어낸, 그리고 자신을 그 굴레에 가두어버린 역사적 시간 때문이었다. 제국의 시간은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 개념이 아니라 흥망성쇠의 시작과 끝,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원제 아래에 있는 인용문 참조). 제국은 제국의 유지와 지속적인 번영을 위해 서구 이성은 폭력을 합리화한다. 야만인이 아닌 야만인을 강제하고자 스스로 야만인보다 더욱 야만인 같은 야만인이 된다.

죨 대령이 패전하고 물러나면서 ‘나’는 원래의 지위를 찾고 도시는 다시 평화를 찾는 듯하다. 그러나 제국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 또 다른 ‘죨’은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는 그동안 정체된 역사를 강제집행할 것이며 민중들은 다시금 수난을 당한다. 이것이 ‘나’가 저주하는 역사의 굴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다고.

러한 식민주의적 폭력의 알레그로뿐만 아니라 우유부단하고 나태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 ‘나’의 성욕의 정체성도 무척 흥미롭다.

그는 젊었을 땐 여자라면 다 좋았을 정도로 난봉꾼이었다. 시시각각 뜨겁게 치솟는 젊음의 방탕한 욕구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고 그래서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인이 된 ‘나’는 죨 대령의 고문에 의해 반쯤 눈이 멀고 발목이 분질러진 소녀를 만나면서 표류하는 어선 같은 좌초된 욕망과 마주치게 된다. 욕망은 매일 떠오르는 하늘의 태양처럼 솟구치지만, 달처럼 차가우며 별처럼 희미하다. 그렇게 흐느적대는 욕망은 뚜렷한 목적이 없다. 그래서 해결하기는 더더욱 어렵고 ‘나’는 당황한다.

매일 밤 의식처럼 그녀를 씻기고 주무르지만 ‘나’는 만족하지도 못하고 그녀 역시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성적 욕망만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 그의 욕망을 정체시키고 있다. 그것이 무언지는 ‘나’도, 그리고 저자도, 방관자인 독자도 모른다. 권력과 돈으로 소녀의 육체를 얻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은 얻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 보내는 ‘나’는 공허하고 공허한 무언가 외에 달리 남는 것이 없다.

자에게 좋은 인상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남긴 작품은 결코 한 번의 정독으로만은 끝나지 않는다. 훗날 다시 읽는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읽고 또 읽어도 작품의 감흥은 샘솟듯 한없이 솟아 흐르며 매번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좋은 작품은 이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울 뿐만 아니라 첫날밤을 맞이하는 새신랑처럼 독자를 설레게 한다. 필자에게도 그런 작품들이 꽤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그렇고,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 그러하다. 한국 문학 중에서는 박태원과 염상섭이 있으며 조선작도 있고 박완서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리 두 번을 읽은 작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를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필자는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내리 두 번을 읽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첫째 이유는 작품의 난해함이다. 달리 말하면 작품의 심오함을 한 번 읽고는 대충으로라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읽었던 책 중에서 난해한 작품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필자의 저조한 독해력과 덜떨어진 집중력(이것은 주변의 그 빌어먹을 소음 때문이다!)의 한계로 그저 어렴풋이 이러한 작품이구나 하는 정도에 만족하며 대충대충 얼렁뚱땅 잘 넘어왔는데 왜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두 번을 내리읽어야 했을까. 그것은 참말로 무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처음 읽고 나서는 작품에 숨겨져 있는 오묘한 무언가를 놓친 것 같아 조바심이 들었고, 두 번째 읽고 나서는 그 오묘한 무언가는 애초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허무하기도 했다. 그저 막연한 뭔가를 찾아 안갯속을 방황하는 느낌이다. 방황하다 지치면 포기하고 다음 문장, 다음 단락으로 이어갈 수밖에 없다. 운이 좋으면 몇 장 못 넘겨서 숨은 뜻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끝내 모르고 넘어간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참으로 복잡미묘하다. 두 번 읽으면 좀 더 이해할 줄 알았더니 새로운 미로만 발견한 셈이다. 새로운 미로의 출구를 찾으려고 다시 작품을 찾는다. 그랬더니 또 다른 미로가 있다. 그렇게 미로와 그 출구를 찾고자 하는 작품과 독자와의 씨름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이 리뷰는 2016년 5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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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책 리뷰] 철부지 청년에서 혁명가로 채색되어 가는 ~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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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청년에서 혁명가로 채색되어 가는 드라마 같은 여정

원제: The Motorcycle Diaries: Notes on a Latin American Journey by Ernesto Che Guevara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임을.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244쪽)

의사에서 혁명가로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평가를 받은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그가 의대를 다닐 무렵까지만 해도 가난과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험난한 무장 투쟁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기미는 도통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따지고 들던 타고난 정의감과 고등학교 시절 무기 없이는 데모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는 투쟁 의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청년기에 접어든 젊은이들이 그렇듯 자신이 가야 할 길 앞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혈기 왕성하고 열정이 끓어 넘치는 한 젊은이로서 민중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아쉬움과 가난 때문에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을 도와주고자 의사의 길을 선택한다. 훗날 그가 의사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화학자이자 의사인 친구 알베르토와 1951년 12월 코로도바를 출발함으로써 시작된 기나긴 여정은 그 자신도 일지에서 밝혔듯 새사람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의사라는 직업도 민중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시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이다. 질병이 나타나는 증상만 다스리는 것으로는 병을 완치할 수는 없다. 완치를 위해서는 병의 근원을 밝혀내고 재발하지 않도록 밝혀진 근원을 뿌리 뽑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남미의 민중이 겪는 가난과 기아,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인 제국주의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혁명의 길이 될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편에 설 것을 다짐하다

게바라는 여행 초기까지만 해도 인상깊고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때마다 연방 감탄하며 그곳에 머물고 싶어한다. 언젠가는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안데스 산맥 호숫가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몰래 숨어 탄 산 안토니오 호에서 두 사람은 끝없이 펼쳐진 초록 바다를 바라보며 그들의 진정한 소명은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여행 초기까지만 해도 꿈 많은 청년다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던 체는 코르도바에서 출발한 지 6개월 정도 지나 들른 산 파블로 나환자촌에서 아래와 같은 고무적인 작별 연설을 한다.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을 여러 개의 불안정하고 실체가 없는 나라들로 쪼갠다는 것이 완전히 허구라고 믿고 있으며,이번 여행을 통해 이런 믿음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우리는 멕시코에서 저 멀리 마젤란해협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민족적 유사성을 가진 하나의 메스티조 민족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편협한 지역주의의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뜻으로,페루를 위하여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연대를 기원하며 축배를 제안합니다.” (217쪽)

짧지 않은 여행 동안 체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체 게바라는 발파라이소에서 잠시 신세 진 라 지오콘다 술집에서 종업원이었던 늙은 여자를 알게 된다. 그녀는 체처럼 천식환자였지만 제때에 치료받지 못해 이미 손쓸 방도가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심장질환으로 발전해 있었다. 의사로서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 체는 가난 때문에 가족마저 짐이 되고 생존경쟁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떤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 불쌍한 여자가 헐떡거리는 심장을 끌어안고 살기 위해 식당 종업원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던,바로 그 부조리한 체제를 타파할 변화 말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가난한 가족의 성원들은 가까스로 서로에 대한 적의를 감추고 살아간다. 그들은 더 이상 아버지,어머니,형제,자매가 되지 못하고 단지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부정적인 요소로만 존재한다. 혹시라도 그들 중 한 명이 환자가 되면 그는 부양해야 되는 나머지 가족들의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마련이다. (86쪽)

산 안토니오 호를 타고 도착한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에서는 제국주의 착취 현장을 목격한다.

냉혹한 효율과 무기력한 분노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함께 손을 잡고 그 거대한 광산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편은 생존 때문에,다른 한쪽 편은 이윤을 위해….
언젠가 우리는 광부들이 노동의 대가를 즐겁게 받아가고 먼지 낀 폐를 웃음으로 씻어낼 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101쪽)

체는 이들을 ‘생존 전쟁의 이름 없는 영웅들인 가난한 노동자들’이라고 부른다.

체는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에서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이 찬란했던 그들의 문명을 잊은 채 체념적이고 운명론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한다. 체는 그들이 과거의 영광에 자부심을 품고 정복자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원주민들은 백인들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뭔가 변화를 가져올 능동적인 삶을 살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그리고 착취에 찌들대로 찌들어 현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감각마저 잃었으며 그들의 아이들은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앙상한 모습으로 소심하게 기아를 선전한다. 거대 자본의 착취 때문에 만성적인 가난, 기아, 질병에 시달리는 부조리한 삶을 살면서도 개선하려는 의지보다는 고개 숙인 채 자포자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체는 깨닫는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임을.

철부지 청년에서 혁명가로 채색되어 가는 드라마 같은 여정

게바라는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The Motorcycle Diaries: Notes on a Latin American Journey)』에서 청년다운 낭만적인 기질을 마음껏 드러내며 한 편의 아름다운 로드무비처럼 남미를 경쾌하고 시원스럽게 질주하면서도, 경이로운 겉모습에 감추어진 삶의 이면에 드리운 암울한 그늘도 놓치지 않는다. 고대 도시가 남긴 흔적과 그 위에 새로 솟아난 식민시대 건축물 사이의 상스러운 조화는 그를 예술적인 감상에 빠트린다. 무기력한 원주민의 삶과 계급제도라는 부조리한 이념에 기반을 둔 현실의 질서에 굵직한 변화를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사라는 직업은 너무 작게만 느껴진다. 아직 철들지 않은 그들은 장난꾸러기 기질을 맘껏 발휘하며 무전여행의 파렴치한 특권을 만끽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왕빈대인 그들은 적중률 높은 구걸 메뉴얼까지 따로 준비할 정도로 철면피에다 막무가내다. 여행 내내 거지나 다름없던 그들은 살인자 같은 험악한 인상을 한 사람이라도 밥을 사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정도로 어린애 같은 단순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갈 곳 없으면 경찰서에 스스로 출두하여 구걸하거나 급할 땐 아무 병원의 의사를 찾아가 대놓고 뭔가 먹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다. 무전취식도 마다하지 않으며 무임승차는 말할 것도 없다. 순전히 호의로 그들을 초대한 어느 독일인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을 때 체는 창턱 위에 걸터앉아 설사하고는 다음날 아침 재빨리 도망치기도 한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혁명가이자 카리스마 넘치던 체 게바라가 손님으로 초대받은 집의 창가에 설사하고 줄행랑을 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낯선 손님이 급하게 남기고 떠난, 아침에 ‘햇빛에 말라붙어 복숭아 빛을 띠고’ 있던 ‘아주 볼만한 광경’을 본 집주인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이처럼 순수하고 철없는 청년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와 알베르토의 우여곡절 많은 여행을 기록한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거침없이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단풍처럼 울긋불긋한 가슴 아픈 사연들로 검붉게 물들어 있다. 솔직담백함이 듬뿍 묻어나는 문장 하나하나에는 꿈꾸는 젊은이의 뿌리를 땅에 내리고 가지를 하늘로 뻗어내는 양분으로 가득하다. 철부지 청년에서 민중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 체 게바라로 서서히 채색되어 가는 8개월간의 긴 여정이 담긴 이 한 편의 드라마는 언제봐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인간, 그리고 청년 체 게바라의 진솔한 모습이 담긴 소중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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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8일 수요일

[책 리뷰] 준수한 범인의 의외성, 그러나 뭔가 아쉬운 트릭 ~ 인형관의 살인(아야츠지 유키토)

Murder of the puppet museum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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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한 범인의 의외성, 그러나 뭔가 아쉬운 트릭

원제: 人形館の殺人 by 綾つじ行人
어떤 이유가 있든,과거에 어떤 죄를 저질렀든 나는 지금 죽기 싫다. (『인형관의 살인』, 289쪽)

고난 병약함으로 사교적인 사회활동은 못하고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는 히류 소이치는 어머니와 함께 교토의 녹영장으로 이사한다. 녹영장은 유명한 예술가였던 소이치의 아버지가 혼자 살다가 작년에 자살한 곳이다. 지금은 하숙집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세 명의 하숙생이 관리인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모자(母子)가 살게 될 낡은 단층집과 관리인 부부와 하숙생이 기거하는 서양식 2층 집이 서로 연결된 기묘한 구조의 녹영장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집안 곳곳에 마네킹이 세워져 있었는데 모든 마네킹의 얼굴은 반반하게 눈, 코, 입 등이 없었고, 이것이 끝이 아니라 여기에 왼팔이나 머리가 없는 둥 하나같이 몸의 한 부분이 모자란 기괴한 모습을 한 채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죽은 예술가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마네킹들을 치울 수는 없었다.

처음 보는 이에게는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마네킹들에게도 익숙해져 갈 무렵 히류와 그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작업실의 인형들이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진 흔적이 보이는가 하면 피처럼 빨간 물감이 흠뻑 묻혀 있는 날도 있다. 누군가 우편함에 몰래 넣어둔 유리조각에 히류의 손이 베이기도 한다. 현관 앞에 누군가 돌을 갔다 놓는가 하면 어느 날에는 머리가 납작하게 눌린 고향이 시체가 놓여 있기도 했다. 히류가 산책갈 때 사용하는 자전거의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져 있어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그리고 때맞춰 히류에게 도착한 협박 편지,

기억해내라. 네 죄를.

기억해내라. 네 추악함을.

기억해내라. 그리고 기다려라.

조만간 편하게 해주마.

혼자 고민하던 히류는 교토에 살던 옛 친구 가케바를 만나 상담한다. 그러면서 히류는 대화 도중 잠깐잠깐 현실 감각을 잃고 퍼즐 조각 같은 환영을 보게 된다. 아득한 풍경, 아득하게 들리는 소리와 목소리,쿡쿡 쑤시는 듯한 옛 기억……. 그러는 와중에 완전히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을 되찾는다. 다름 아닌 친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친어머니는 히류가 여섯 살 때 열차전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히류는 히류 미와코의 동생 사와코 이모 부부에게서 키워졌다. 그렇게 조금씩 잃어버린 과거의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되찾으며 서로 맞춰갈 무렵 사와코가 화재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조사 끝에 부주의로 말미암은 사로고 단정 지었지만, 그 이후 도착한 협박 편지로 히류는 사와코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방화임을 알게 된다.

자 아야츠지 유키토(綾つじ行人)는 후기에 일인칭 시점으로 화자와 어둑어둑한 내면을 끈적끈적하게 그려내는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며, 『인형관의 살인(人形館の殺人)』이 그 첫 도전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건대 추리소설 특유의 단순명쾌한 문장을 버리지 않는 한 그것은 어려울 것 같다. J.M. 쿳시(J. M. Coetzee)의 『어둠의 땅』에 수록된 중편 「베트남 프로젝트」의 주인공 유진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평범한 문장으로는 평범한 인물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이치의 육체나 정신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와의 대화는 평범했다. 그러나 쉽고 재밌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장점으로 독자들이 찾는 추리소설에 유진처럼 무슨 심각한 심리 삼당을 받는듯한 난해한 대화를 지껄이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 또한 모순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추리소설에서 ‘영혼의 투시자’ 도스토옙스키 흉내를 내려는 의도 자체가 조금은 과도한 생각일 수도 있다.

책 끝에 첨부된 「구판 해설(오타 다다시)」에는 지극히 사견이라는 전제를 달고 아야츠지 유키토는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이고 그 ‘세계’를 파괴하는 작가라고 설명한다. 독자는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장소로 안내받고 저택의 정경과 유래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머릿속에 새겨 넣게 되면서 저택과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진다. 그러다 사건이 일어나면서 독자 앞에 보이던 세계가 순식간에 붕괴한다는 것이다.

든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 이후 그것을 파괴하거나 변형하거나 아니면 고치든, 아니면 그대로 두든 작가 마음이지만 이런 식의 파괴는 영 찝찝하다. ‘파괴’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 작품을 읽으면서 키우고 간직해 온 필자의 어쭙잖은 감흥마저 몰인정하게 파괴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한, 범인의 의외성은 인정하지만, 그 트릭은 기발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트릭의 개연성은 충분했지만 신선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고로 필자가 추리소설 마니아는 아니라 그렇게 많은 작품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인형관의 살인』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또 다른 작품 『십각관의 살인』에 비해서는 조금 임팩트가 떨어지는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소감을 조심스럽게 밝힌다. 그래도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오타 다다시의 말대로 ‘그의 작품 세계에 푹 빠져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러한 몰입 때문에 더욱 실망이 컸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변화와 어이없는 상황이 사람을 기운 빠지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리뷰는 2016년 5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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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2일 목요일

[책 리뷰] 일상에서는 떠올릴 수 없는 ‘빅뱅 이전’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빠져들다

Once Before Tim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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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는 떠올릴 수 없는 ‘빅뱅 이전’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빠져들다

원제: Once Before Time: A Whole Story of the Universe by Martin Bojowald
자연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작아지지는 않는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 의해 많은 이들이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과학의 연구결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빅뱅 이전』, 440쪽)

반 상대성 이론, 양자 이론 등 기초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류는 자연에 대해 더 많은 설명과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해지면서 그저 막연히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만 보던 우주를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많은 과학자의 노력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아직 그 어떠한 이론도 우주를 완전하게 기술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공간과 시간을 합쳐 물리적 의미가 있는 시공간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빅뱅의 시작점을 설명하면 무한대로 높아지는 온도와 밀도에 의해 별의 모든 질량이 붕괴하고 우주의 부피가 사라지는, 시간 자체의 종말이라는 특이점과 만나게 된다. 이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특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 상대성 이론 자체도 확장이 필요하다는 증거이며 양자 우주론의 방정식들도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현재까지 두 이론은 상호 호환성도 없다. 빅뱅의 특이점으로 붕괴하는 우주를 방지하고 이것을 보다 유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등장한 이론이 ‘끈 이론’과 ‘루프 양자중력’이론이다.

끈 이론은 마술 같은 놀라운 면과 유일한 수학적 체계화의 가능성으로 깊은 인상을 주지만 넓고,광활하고,정리되지 않은 해들의 풍경이 메피스토펠레스의 지옥불 냄새처럼 쓴맛을 남긴다. 그리고 루프 양자중력의 역학은 너무 복잡해 파우스트가 영혼을 배척했던 것처럼 첫눈에 많은 연구자들이 이것을 배척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형식들 중의 하나로 세상의 진리를 힐끗 보았을지도 모르지만,우리는 진리를 모르고,절대로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440쪽)

반 상대성 이론이 보여준 특이점으로의 붕괴가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론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것인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만약 특이점이 이론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것이라면 빅뱅 이전에도 뭔가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루프 양자중력은 설명한다. 이 말은 우주는 빅뱅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잃어버린 우주의 기억을 찾아야 할 새로운 사명이 인류에게 부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우주를 치료하는 유일한 길은 빅뱅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것뿐이다. 그 길은 인류에게 아득하고도 막막한 아주 긴 여행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모험이기도 하다. 마르틴 보요발트(Martin Bojowald)의 『빅뱅 이전(Once Before Time: A Whole Story of the Universe by Martin Bojowald)』은 그 멀고도 험한 인류의 여정을 대중과 함께하고픈 한 과학자의 의지와 노력이 담긴 책이다. 참고로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의 『우주의 구조(The Fabric of the Cosmos)』가 주로 ‘끈 이론’에 비중을 두고 있다면, 『빅뱅 이전』은 ‘루프 양자 중력’ 이론에 큰 무게를 둔 책이다. 그러나 저자도 인정하듯 아직 두 이론은 불완전하며 두 이론에 집중하는 과학자들 역시 과학과는 거리가 먼 믿음을 이론 뒤에 감추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 마르틴 보요발트는 머리말에서 과학자가 대중적인 책을 쓰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면서 과학자가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명하는 진정한 시험은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진 비전문가에게 지식을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험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내게는 실패한 것 같다. 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끈 이론’에 비중을 둔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에 비하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을 위한 교양도서치고는 상당한 난도가 있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일상에서는 결코 떠올릴 수 없는 ‘빅뱅 이전’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필자의 뒤죽박죽 ‘호기심 만물상자’에 채워넣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자 한다. 비단 이것은 필자에게만 적용되는 사항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빅뱅 이전』을 통해 처음으로 루프 양자이론을 알게 되었고 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끝에 힘겨운 여행을 무탈하게 마친 듯하지만, 지금 루프 양자이론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공간을 원자적으로 취급한다는 것 정도이다. 아무래도 과학적 이해 능력이 부족한 필자에겐 작은 끈이 진동하는 동물적인 모습의 끈 이론이 더 상상하기 쉬웠나 보다. 그러나 각 이론을 연구하는 집단들의 지적인 족벌주의를 타파하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다양한 접근을 받아들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저자의 진심 어린 충고에는 충분한 공감이 간다. 그것은 비단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지구, 더 나아가 우주에 사는 모든 지적 생명체에게도 해당하는 조언이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2016년 5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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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6일 금요일

[책 리뷰] ‘야만’과 ‘이성’의 모호한 경계 ~ 어둠의 땅(J.M. 쿳시)

Duskland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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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이성’의 모호한 경계

원제: Dusklands by J. M. Coetzee
나는 이미지들로 가득 한 검은 중심 과총 한 자루가 들어 있는 투명한 자루다. 총은 자기 외의 다른 존재가 있다는 희망을 위해 거기 있다. 총은 여행길에서 우리의 고립을 막아주는 마지막 방어물이다. 총은 우리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구세주다. (『어둠의 땅(Dusklands)』, 133쪽)

벨상 수상작가 J.M. 쿳시(J. M. Coetzee)의 『어둠의 땅(Dusklands)』은 서로 다른 지역, 서로 다른 시대에서 벌어지는 두 이야기로 짜여 있다.

첫 번째 이야기 「베트남 프로젝트」는 케네디 연구소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군사전문가 유진 돈의 이야기이다. 그는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면서 전쟁 관련 문서와 사진 등을 통해 간접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사와 아내와의 갈등까지 겪으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고, 자신의 아들을 칼로 상처 낸 다음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두 번째 이야기 「야코부스 쿳시의 이야기」는 18세기 식민지 시대에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이야기이다. 저자 존 쿳시의 (가상의) 먼 조상으로 등장하는 동명의 쿳시는 네덜란드 태생의 사냥꾼이다. 그는 하인과 소가 끄는 각종 짐을 실은 수레를 이끌고 케이프 북쪽으로 코끼리 사냥을 떠난다. 여행 도중 쿳시는 심한 설사 증세를 보이며 탈이 나자 나 어쩔 수 없이 근처에 사는 원시 부족민들의 호의를 얻어 마을에 머문다. 쿳시가 몸조리하는 동안 그의 하인들은 부족민들에 동화되어 쿳시를 배반하고 쿳시의 짐을 약탈한다. 오직 나이 많고 충실한 하인 클라버만이 끝까지 쿳시 곁을 지킨다. 부족 아이들과의 사소한 싸움이 씨가 되어 부족 마을에서 쫓겨난 쿳시와 클로버는 약간의 식량과 옷가지만 겨우 챙긴 채 집과 도시가 있는 남쪽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쿳시가 아니라 클리버에게 탈이 생긴다. 쿳시는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병이 난 클라버를 황량한 대지 한복판에 홀로 내버려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듬해 충분한 사냥꾼들을 데리고 다시 그 마을로 되돌아간 쿳시는 자신을 배반한 하인들과 원주민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한다.

강의 줄거리는 이렇지만, 이 두 이야기는 보통의 소설들과는 다르게 가해자 처지에서 진행된다. 「베트남 프로젝트」에서는 신경쇠약으로 아들을 해치는 유진 돈의 시점으로, 그리고 「야코부스 쿳시의 이야기」에서는 식민주의자 쿳시의 시점으로 말이다. 그러하다 보니 두 이야기는 때론 역겨울 정도로 가해자의 처지를 대변한다. 두 가해자는 자기중심적으로 주변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변호한다. 유진은 자신의 아들을 칼로 찌르고도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쿳시는 부족민 아이들의 장난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한 아이의 귀를 물어뜯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한다. 그들에겐 폭력은 어쩔 수 없이 대처하는 자기 방어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일상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폭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유진은 베트남 프로젝트를 맡기 전까지만 해도 상사나 주변의 불만에 대해 용기 있게 반응하지 못하던 복종적이고 질서를 좋아하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면서 달라진 것일까. 유진은 베트남 전쟁 연구 자료를 설명하면서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준다. 첫 번째 사진은 거구의 미군이 어린 소녀로 보이는 베트남 여자와 섹스를 하는 사진이다. 유진은 이 사진에 엽기적이게도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아버지’라는 제목을 붙인다. 두 번째 사진은 특수부대 하사들이 적군의 잘린 머리를 든 사진이며 세 번째 사진은 수용소의 호랑이 우리 속에 갇힌 베트콩의 사진이다. 유진은 수위 높은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아이들에게 정서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폭력이 폭력을 낳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진은 거기에 한 술 더 떠 폭력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고 이성의 힘을 야만적으로 발휘한다.

내가 비통해하는 건 바로 그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어째서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걸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도 있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증오는 좌절된 희망에서 나왔다. (『어둠의 땅(Dusklands)』, 38쪽)

베트남 전쟁을 미국이 아닌 베트남 탓으로 돌리는 유진은 미국적 우월주의의 표상이다. 자국의 이데올로기나 존재하지도 않는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다가 도를 넘어 타국에 강요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야만을 제거하고 문명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났는가. 그들의 증오는 유진이 말한 ‘좌절된 희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좌절된 이익’에서 나온 것이다. 이익에 눈이 멀어 전쟁을 일으키고도 치사하게 전쟁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거나 스스로 생각해도 떳떳하지 못함을 아는지 어떻게든 전쟁의 명분을 세우려는 야만적인 미국의 모습이 유진을 통해 표출된다. 그런 유진이 전쟁을 끝낼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지도 상의 좌표까지 지울 정도의 무차별 폭격이었다. 이 얼마나 미국적인 해결 방법인가?

유진이 전쟁이 전쟁을 낳고 폭력이 폭력을 낳은 경우라는 쿳시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폭력의 표상이다. 그렇다면 식민주의는 무엇인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국의 권리나 타국민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으며 때론 마음껏 짓밟아도 된다는 서구식 이성주의가 고도로 농축된 국가적 이기주의의 결정체 아닌가.

이러한 튼튼한 방패막이가 있었기 때문에 쿳시는 자신이 행사하는 폭력에 따른 죄의식은 없다. 차라리 그가 쾌락적으로 폭력을 즐기는 정신병자라면 그나마 봐줄 수 있지만, 그는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처럼 감정적으로 폭력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이 무뚝뚝하게 서류를 처리하듯 사무적인 태도로 폭력을 행사한다. 그에게 폭력은 일상이며 삶의 한 양식이다. 그는 짓궂은 소년이 새총으로 참새를 겨누듯 항아리를 이고 개울로 가는 부족민 여자아이를 총으로 쏴 죽인다. 자신의 부하가 부족민의 어린 소녀를 강간해도 발정 난 개새끼들을 쳐다보듯 별일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바라본다. 자신을 배반한 노예를 처형할 때 한 노예가 피를 쏟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쉽게 죽지 않자 가해자의 유희적인 동정심을 보이며 역겨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내가 여느 다른 남자 이상으로 죽이는 것을 즐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고,내 자신과 내 동포를 위해 이 희생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원했던 검은 사람들에 대한 살인을 수행했다. (『어둠의 땅(Dusklands)』, 179쪽)

쿳시는 자신의 폭력을 ‘우리 모두가’ 원했던 일이라고 합리화시킨다.

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식민주의와 전쟁이 유일하게 증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성의 야만성이다. 저자는 두 이야기를 통해 그 점을 밝히면서 인간이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자부하는 이성이 한낱 뜬구름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이성이 폭력을 자극하고 합리화시킴으로써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성을 두 번째 이야기에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폭력을 부추기는 ‘이성의 야만성’은 자신도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임을 시사한다. 남의 잘못을 꼬집고 비판하기는 쉽지만, 자신의 잘못을 의식 속에서 깨닫는 것을 넘어 공개적으로 자아비판 할 수 있는 용기는 드물기에 충분히 찬탄을 받을만한 일이다. 이처럼 진지하게 자기비판적으로 문제를 받아들이는 겸손 때문에 더욱 공감된다.

다른 유인원들도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그들은 때와 장소를 가려 적절하게 행사하며 폭력의 수위를 조절한다. 유인원에게 폭력을 위한 폭력은 없으며 그들에게 폭력은 서열을 가리거나 집단과 번식 또는 개체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할 때만 행사한다. 물론 서열을 가리는 경쟁에서도 폭력으로 말미암아 누군가 죽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야만적인 전쟁을 합리화하고 억압적인 식민지 정책을 태연스럽게 행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이성은 폭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장치가 아니라, 폭력을 장려하고 각종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여 극대화하는 기폭제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만약 전 세계의 정치인들이 여성이라면 최소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감정적이고 동정심이 강한 여성의 마음으로는 처절한 살육으로 치닫는 전쟁만은 피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국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 최대한 전쟁은 피하고 가능한 외교적으로 평화스럽게 해결하려고 고심했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폭력에 전염되어 신경쇠약으로 치닫는 유진과 식민주의에 만행한 폭력을 대변하는 쿳시의 복잡한 내면은 문장으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성향만큼이나 그들의 생각은 모호하고 난해하며 심하게 굴곡져 있다. 『어둠의 땅(Dusklands)』은 작품의 주제도 그렇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읽히고 논의되어 인류문화의 유산이 될’ 소설을 썼다는 찬사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J.M. 쿳시의 작품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성과 야만의 모호한 경계를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또한, 작중 인물의 성격에 따라 문장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그의 탁월한 필력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이 리뷰는 2016년 5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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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Ambiguous boundaries between 'barbarism' and 'reason' ~ Dusklands(Coetzee)

Duskland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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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biguous boundaries between 'barbarism' and 'reason'

(This article uses Google Translate 'Korean-->English')
I am a transparent sack containing a black central fuller bag full of images. The gun is there for the hope that there is another being. A gun is the last defense against our isolation on the road. A gun is a savior that connects us with the world. (in thte text)

Nobel Prize Winner J. M. Coetzee's 『Dusklands』 is composed of two stories from different regions and different times.

The first story, [The Vietnam Project] is a story of a military expert, Eugene, who was working on the Vietnam War project at the Kennedy Institute. He is not a soldier in the war, but he is vulnerable to indirect violence through war-related documents and photographs while studying the Vietnam War. On the downside, he suffers from stress as he struggles with his boss and his wife. In the end, he shows nervous breakdown, his son is knife-scarred, and is hospitalized in a mental hospital.

The second story [The Narrative of Jacobus Coetzee] takes place in colonial South Africa in the 18th century. Coetzee, the same name as the author 's (imaginary) distant ancestor, is a Dutch - born hunter. He leaves the elephant hunting to the north of the Cape, led by a servant carrying loads of servants and cattle. During the trip, Coetzee falls off with severe diarrhea. He is forced to stay in the village in favor of the native tribes living nearby. While Coetzee is feeling well, his servants assimilate to the tribes, betraying Coetzee, and looting Kuci's luggage. Only the older, faithful servant Claverman keeps the Coetzee side to the end. Coetzee and his servants are kicked out of tribal villages as a minor fight between Coetzee and tribal children becomes a seed. They barely get some food and clothing and head southwards with their houses and cities. This time, Clever is sick, not Coetzee. Coetzee tells Clabber he'll be back again. Then he leaves a faithful servant in the middle of a desolate land and returns home alone. The following year Coetzee takes many hunters back to the village. Coetzee takes vengeful revenge on servants and natives who betray him.

This is a rough plot, but these two stories are different from ordinary novels and proceed from the perpetrator. The [Vietnam project] is the point of Eugene, who breaks his son with a nervous breakdown, and the view of colonialist Coetzee in [The Narrative of Jacobus Coetzee]. So, the two stories that represent the perpetrators are sometimes disgusting. Both perpetrators are self-centered and recognize their surroundings and defend their actions. Eugene stabs his son with a knife and that's because of the stress. So I think he is innocent. Coetzee responds sensitively to tribal children's play, bites the child's ear, but finds no fault of his own. For them, violence is just a daily routine rather than a self-defensive action. So where did their violence come from?

Eugene was a submissive and orderly man who did not have the courage to react to the boss or the surrounding complaints until he took on the project. Did he change as he studied the Vietnam War? Eugene explains the Vietnam War research data and shows some pictures. The first photo is a picture of a US soldier having sex with a Vietnamese woman who looks like a little girl. Eugene gives the photo a bizarre title 'The Father Who plays happily with the children'. The second photo is a picture of a special unit sergeant with a clipped head of the enemy. The third photo is of the Vietcong locked in the cage of the camp's tiger. Eugene may be the result of violence, just as emotional problems occur to children who are constantly exposed to high-level violence. However, Eugene is brutally exercising the power of reason to justify violence somehow.

It is because of those people that I do not do it! Why did not they accept us? We could have loved them. Our hatred for them came from frustrated hope. - Eugene.

Eugene is a symbol of American supremacy that turns war into Vietnam's fault. They show off their ideology or non-existent cultural superiority. They are so excited that they force them into another country. If they are not accepted, they cause war on the grounds of eliminating barbarians and establishing civilization. Their hatred came not from the 'frustrated hope' that Eugene mentioned, but from 'frustrated profits'. They only cause wars for profit, but they pass on the responsibility of war to their opponents. When they feel guilty, they somehow wield the sword of reason to establish the cause of war. This brutal figure of the United States is expressed through Eugene. Eugene suggested how to end the war, which was indiscriminate bombardment to erase the map coordinates. What an American solution?

The story of Eugene showed that war gave birth to war and violence gave birth to violence. Coetzee, on the other hand, is a symbol of violence created by colonial ideology. So what is colonialism? For the sake of national interests, it is not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rights of other countries or human rights of other people. Sometimes you can trample them as much as you like. In other words, it is a kind of national egoism that was created by the addition of reason to Western rationalism.

Because of this sturdy shield, Coetzee is not guilty of the violence he exercises. If he is a psychotic who enjoys hedonistic violence like a sadist, it is fine. However, he is not easily excited even in violent situations. He does not cope emotionally with violence like ordinary people. He acts in a clerical manner as if a civil servant were handling the paperwork bluntly. Violence against him is a routine and a form of life. He shoots a tribal girl carrying a jar as a gun as if a boy is holding a sparrow with his slingshot. He sees the little girl being raped as if it were nothing special. It was time to execute a slave who betrayed himself. The slave poured his blood and panted, but did not die easily. Then he shows off his mischievous compassion and shed disgusting tears.

I am not enjoying killing more than any other man. But I did my part in pulling the trigger, and by doing this sacrificial act for myself and my compatriots, I carried out murder against the black people that we all wanted. - Coetzee.

Coetzee rationalizes his violence as 'we all want'.

The only thing that proves colonialism and war that has been done in the name of reason is the 'barbarism of reason'. The author reveals it through two stories. In addition, the author warns that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human reason is a characteristic of human beings, but rather that the reason may cause human destruction by stimulating and rationalizing violence. In addition, the author suggests that 'barbarism of reason', which promotes violence by using his sex in the second story, is a universal problem of mankind that can never escape. It is easy to twist and criticize others' faults, but the courage to openly criticize oneself beyond conscious awareness of their own faults is rarely enough to receive praise. This is so empathic because of the modesty of accepting the problem seriously and self-critically.

Other apes also use violence. However, they control the water level by appropriately violating the time and place. There is no violence to enjoy violence against apes. Violence against them is only occasionally necessary to cover the sequence, group, breed or survival of the individual. Of course, it is very rare for someone to die because of violence even in the competition for sequencing.

But humans rationalize the brutal war and repressive colonial policies in the name of reason. Reason for mankind is not a device to control and control violence, but a catalyst to encourage violence and to develop and maximize various weapons of mass destruction. There is a story like this. If the politicians around the world were women, at least the war would not happen. In the minds of emotional and compassionate women, it is said that they will try to avoid the wars that come with sickening slaughter. In fact, Queen Elizabeth I of England said that when dealing with international issues, she was trying to avoid war as much as possible and to solve it as peacefully as possible diplomatically.

The intricate inner side of Eugene and Coetzee, who represent violence in colonialism, are exposed to violence as well as sentences. Their thoughts are as vague, intractable and severely bent as their tendencies are unusual. The subject of the work, though, is not a lightly readable book. However, his work, which received the Nobel Prize for his praise of writing a novel that "will be read and discussed for a long time and become a legacy of human culture," reminds us of the vague boundaries of reason and savagery that have been forgotten. Also, his outstanding ability to write freely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characters is amaz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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