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6

타인의 방 | 시대를 발효한 문장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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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 최인호 | 시대를 발효한 문장에 취하고 시대를 요리한 안주에 배부르다

Original Title: 타인의 방(최인호 중단편 소설전집 1) by 최인호
잘 들어요. 소켓이 속삭인다. 마치 트랜지스터 이어폰을 꽂은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만 사근거린다. 오늘밤 중대한 쿠데타가 있을 거예요. 겁나지 않으세요? (『타인의 방(최인호 중단편 소설전집 1)』, p195)

단편 소개

「견습환자」

결핵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웃음을 잃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면서 알 수 없게도 그들을 웃겨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웃지 않는 병을 앓는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장난꾸러기 같은 짓을 감행한다.

「2와 1/2」

어느 토요일, 장티푸스 예방주사 부작용으로 고통과 피로감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일요일에는 새로운 주택단지 조성 문제로 아버지 산소의 이장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시외로 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가 하숙하는 집에서 매춘부 한 명이 살해당하는 바람에 그는 하숙집의 다른 남자들과 종일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무너지지 않는 집」

주인공이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의 집, 그러다 누군가에게 떠밀려나온 쓰라린 과거도 가진 집. 그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밀려나가는 바람에 그 집은 새 집주인의 의해 허물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루 이틀이면 깨끗이 해치울 거라던 인부들의 호언장담과는 반대로 그 집은 도깨비장난처럼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

「순례자」

‘나’와 어머니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 집을 보러 간다. 그러나 그들의 부푼 희망과는 달리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있었다. 종일 궂은 땀을 흘리며 발품을 판 끝에 마침내 안성맞춤인 집을 찾는다. 어서 빨리 가족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네를 되돌아 나올 때, 의심 많은 어머니는 도로 되돌아가 찜 해 둔 집 근처 아낙네에게 집값이 싼 이유를 듣는다.

「술꾼」

지독하게 못생긴 한 아이가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며, 죽어가는 엄마가 아버지를 찾고 있다며, 술집 술집을 돈다. 어른들에게 갖가지 술을 한잔 두잔 얻어 마신다.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잠든 주정뱅이의 돈을 훔친다. 아이는 이 사내가 날이 밝기 전에 동사해버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술을 직접 사 마신다.

「모범동화」

D 국민학교 앞 잡화상 강씨가 자살을 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한 아이를 빼고는 말이다.

그 아이는 항상 피로해 보이는 전학 온 아이로 ‘만물박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공부는 못했지만 어른들 세상은 도통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술사의 속임수도 쉽게 꿰뚫어보았으며 강씨가 아이들의 코 묻은 동전을 노려 선보인 원판 돌리기나 주사위 굴리기, 예술적인 강씨의 손놀림에서 놀아나는 심지 뽑기 등 이 모든 게임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강씨를 완벽하게 물리쳤다.

「사행(斜行)」

비 오는 새벽, 의사인 ‘나’는 남편이 병원에 입원 중인 옆집 여자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는다. 괴한이 침입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발기부전에 시달리던 ‘나’는 옆집 여자의 절박한 부탁을 눈치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급한 왕진을 가야 한다고 둘러대고는 우비를 걸치고 비 오는 거리로 나선다.

「예행연습」

열다섯 살의 ‘나’를 포함한 또래의 아이들 58명은 단 이틀 동안 박애 고아원에 채용된다. 외국인 후원자에게 잘 보이려고 일시 고용된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날의 환영식을 위한 군대의 사열식만큼이나 고된 훈련으로 땡볕 아래 하나 둘 지쳐 쓰러져간다. 그렇다고 낙오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일당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방」

겨우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는 없었다. 그는 아내가 거짓말을 하고 집을 비운 사실을 깨닫고는 심한 고독과 비애를 느낀다. 그 순간, 집안의 모든 물건이 들썩이고 술렁대며 오늘 밤 중대한 쿠데타가 있을 거라고 그에게 속삭인다.

「뭘 잃으신 게 없으십니까」

유물 전시회에서 발견한 조선 자기에 반한 대학생은 그 조선 자기를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경매에서 낙찰받으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는 그 물건을 사들일법한 유명한 외국인 수집가를 찾아다니며 사정한다. 그들은 대학생의 사연을 듣고는 흔쾌히 그 경매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막상 경매일이 되어 경매장에 들어서자 대학생이 만난 두 외국인을 제외하고서라도 수많은 외국인이 모여 있었다.

「침묵의 소리」

머릿속엔 오로지 일확천금으로만 가득 찬 형제가 어느 날 밤 두 여자를 술에 취하게 한 다음 그녀들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여관으로 향한다. 그들은 여자들이 잠이 든 틈을 타 지갑을 뒤져 돈을 훔친 다음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새벽같이 여관을 튀어나온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아침이 다가오는 한강을 지켜보고 싶다며 길가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훔쳐 타고 기세 좋게 달리다 그만 차에 치여 죽는다.

「미개인」

월남에서 한쪽 다리를 다친 최 선생은 한창 개발 때문에 땅값이 치솟는 S동네의 초등학교로 부임한다. 동네 강 건너에는 나환자의 자녀가 사는 동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정부 방침으로 강 건너에 살던 아이들이 S동네 학교로 통학하게 되면서 학교와 주민들 간의 마찰은 시작된다. 특히 나환자의 자녀를 감싸고 두둔하던 최 선생은 마을 주민으로부터 협박까지 당한다.

「처세술개론」

열 살의 ‘나’는 부모와 함께 구한말 시절 ‘하와이 사진 결혼’으로 이민 간 후 엄청난 부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사는 집으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이미 행실 나쁜 이모의 딸이 먼저 와 진을 치고 있었다. ‘나’와 이모의 딸은 바로 할머니의 유산을 노린 부모들의 계략으로 전방에 세워진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영악한 이모의 딸은 할머니가 곤히 잠든 틈을 타 집안의 갖가지 물건을 부수 것도 모자라 ‘나’에게 실컷 행패를 부린 다음 모든 일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데 성공한다.

「영가(靈歌)

‘나’가 어렸을 때 머물던 어촌에는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내던, ‘귀신’ 같던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어느 겨울밤, ‘나’는 할머니의 부탁대로 할머니를 등에 업고 산길을 올라 조상의 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할머니의 남편, 즉 할아버지의 묘가 있었다. 그런데 묘지 앞에서 평소에는 걷지도 못하던 할머니는 덩실덩실 춤도 추었으며 할머니의 손이 닿은 매화나무는 신기하게도 꽃을 피우며 만개한다.

타인의 방(최인호)

간과할 수 없는 텍스트를 읽는 재미

아무리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이라고 해도 읽기가 부드럽지 못하면 나처럼 읽기 능력이 좀 떨어지는 독자에겐 참 곤란하다. 한 장 한 장 쪽을 넘기는 일조차 지루하고 무의미한 반복 노동을 하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싸구려 탁주를 마시는 것처럼 목 안이 컬컬하다. 이는 독자의 읽기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비단 작품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독자가 부담 없이,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부터 문장을 거쳐 단락과 플롯에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집요하게 작품에 붙들어두는 힘은 단연코 작가의 몫이다. 번역서 같은 경우는 옮긴이의 몫이 될 수도 있다.

독자는 자신의 인내심만을 시험하기 위해 문학을 읽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독자가 처한 상황과 기분에 따라 소설을 읽는 목적은 천차만별이지만, 마음속 깊이 잠자던 감흥을 일으켜 세워 몽롱한 기운에 도취하고 싶어 하거나, 세상만사 모든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마약 같은 강력한 재미를 얻고자 하는 바람은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고로 나처럼 읽기 능력이 그저 그런 독자에게는 작품성과 재미를 두루 갖춘 책은 참말로 귀하고 반가운 존재이다.

그래서 소설가 최인호의 문학이 나에겐 무척이나 반가웠다. 바다에서 막 건진 물고기가 그러하듯, 내 눈앞에서 파닥파닥 물방울을 튀기며 힘차게 요동치는 그의 문장은 읽는 것 자체가 재밌다. 재밌으니 소화도 잘된다. 문장 하나하나에 취해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몇 장은 훌렁 넘어간다. 그리고 여지없이 마지막 장에 다다른다.

시대를 발효한 문장에 취하고 시대를 요리한 안주에 배부르다

그렇다고 재미로만 시작해 재미로만 끝나는, 서점에 쌔고 쌘 판타지 소설 (그렇다고 이런 소설이 다 재밌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부류로 섣불리 판단하면 정말로 크나큰 오산이며 일생일대의 실수다. 작가 최인호가 거칠지만, 아낌없이 따라주는 구수한 문장주(文章酒)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홀짝홀짝 받아넘기는 독자는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곯아떨어지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비수처럼 예리한 필묵으로 시대를 그럴싸하게 요리해서 내놓은 칼칼한 안주들이 작품 곳곳에 뱀처럼 똬리를 트고 도사리며 곯아떨어진 독자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쯤 취해 몽롱하던 독자는 검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단어 사이사이를 지그재그 돌아다니는 뱀을 발견하는 즉시 여우에 화들짝 놀란 토끼처럼 정신이 확 깬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한다. 문장에 취해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던 지난 줄거리들을 소처럼 되새김질한다.

이로써 독자는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 이미 얻을 만큼 얻은 재미를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감흥을 얻는다.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에는 비싸고 진귀한 요리를 먹은 대식가처럼 배를 동동 두드리며 포만감에 만족해한다.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제아무리 책이 두꺼워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사실은 허름한 동네 헌책방에서 기특하게 3년 동안 퀴퀴한 책 곰팡내를 참아오던 백구도 안다. 그러나 한껏 작품에 감흥이 오른 독자는 애써 외면한다. 이대로 끝난 것에 골이 난 독자는 작가의 무정한 처사라고 제멋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독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독자는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백구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새로운 기대를 품고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나선다. 그럼으로써 애독의 굴레는 변함없이 돌아간다.

마치면서...

70년대 출간된 수많은 소설 중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작품들이 얼마나 있는가를 떠올려보면 한국 문학에서 소설가 최인호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한국 문학이 소멸하는 그날까지 살아남는 몇 안 되는 소설가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의 소설들이 상업성과 작품성 양단 사이에서 비판과 호평을 두루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재미도 있고 그만큼 작품성도 있다는 뜻이다.

『타인의 방』에 수록된 여러 단편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강행된 도시화와 산업화에서 뭔가를 잃어버린, 그러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 채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도시 소시민들의 삶이 ‘최인호’라는 특수한 프리즘을 통해 투영되어 있다. 비슷한 시대 활동한 소설가 조선작이 하층민의 삶을 거친 그들의 말로 노골적으로 대범하게 표현했다면, 소설가 최인호는 때로는 환상적으로, 때로는 이리 꼬고 저리 꼬는 식으로 에둘러 도시 소시민의 삶을 유쾌한 필치로 그려냈다. 발표된 지 40년이나 넘은 그의 작품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재미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것은 비단 그 시대의 문제가 그 시대로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인호 문학은 죽지 않았고 아직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리뷰는 2016년 4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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