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30

청년 모리 오가이 | 내면적 성찰과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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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모리 오가이 | 청년의 내면적인 성찰과 자각을 구체화한 성장 소설

Original Title: 青年 by 森鷗外
도쿄에 가면 하려고 고향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물거품과 같이 사라져서 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사람에게 의지해서 얻으려 하는 것은 대개 헛된 기대로 끝나는 것이라고 느꼈다. 이것에 반해서 생각지도 않게 접촉한 사람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아 꿀벌이 어느 꽃으로부터도 색다른 이슬을 빠는 것과 같이 내면에 뭔가를 얻었다. (『청년(青年)』, p268)

일본의 근대 소설가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청년(青年)』은 2년 정도 먼저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산시로』를 연상시킬 정도로 등장인물의 구성이나 대략적인 이야기 흐름 등이 『산시로(三四郞)』와 꽤 닮았다. 기억나는 대로 두 작품의 비슷한 점을 추려보면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청년이 주인공이며, 주인공들은 문학을 지망한다. 또한, 주인공들은 급격한 서구 문물의 수용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본의 사상과 번화한 대도시의 격렬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갈 길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조급해한다. 도시로 상경한 주인공들에게 낯선 도시의 생활을 안내할 길잡이로서 세속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달한 성격의 친구인 요시로(산시로의 친구)와 세토(준이치의 친구)가 등장하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두 주인공 모두 여자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숙맥이라는 점이다.

『산시로』의 주인공 산시로는 도쿄행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여자와 같은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산시로는 일부러 여자에게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쓰며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젊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안절부절못한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산시로와 하룻밤을 보낸 여자는 “당신은 어지간히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라는 묘한 말과 함께 웃음을 남기고는 떠난다. 또한, 산시로는 매혹스러운 여인 사토미 미네코와의 관계에서도 청년다운 열정을 발휘하지 못한다. 산시로는 미네코의 아리송한 태도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말들을 곱씹어 보며 청춘의 고민에 빠지지만, 자신감이 부족한 산시로는 그녀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적극적으로 다가갈 용기와 배짱을 발휘하지 못한다. 소설이 끝나갈 무렵까지 미네코에 대한 마음을 다잡지 못했던 산시로가 문득 미네코 때문에 겪는 번민이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청년』의 주인공 준이치는 미소년에 부유하게 자란 귀공자 스타일이라 여관을 가든 요릿집을 가든 뭇 여자들의 관심 어린 눈초리를 받는다. 어느 연말 모임에서 처음 만난 기생에게서는 나중에 혼자 오라는 은근한 속삭임도 듣는다. 이런 준이치에게 특별한 호감을 보이는 여자는 부유한 미모의 미망인 사카이 레이코다. 그녀는 자유극장에서 우연히 자신의 옆좌석에 앉았던 준이치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집으로 책을 빌리러 오라고 말한다. 책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준이치의 등 뒤로 하코네로 혼자 놀러 가니 시간 있으면 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다.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한 사카이 부인의 태도에 준이치는 심란하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을 굳혀 하코네로 서둘러 출발한다. 준이치는 차마 부인이 묶는 여관으로는 가지 못하고 근처에 묵다가 산책 나온 부인과 우연히 마주친다. 그녀 곁에 어떤 건장한 남자가 있는 것을 본 준이치의 마음은 불쾌해진다. 그날 저녁 부인의 방으로 초대되어 갔지만, 부인이 준이치를 대하는 태도에서 예전의 그 수수께끼 같은 미묘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Youth by Mori Ouwai
<20세기 초 일본 도쿄 / no credit given / Public domain>

산시로와 준이치 둘 다 일상에서는 소심한 면을 보이며 겉으로는 유유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내면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도시에서 맞닥트린 새로운 인물들과 새로운 문물은 구시대와 신시대, 구사상과 신사상,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으레 일어나기 마련인 갈등을 빚어내면서 두 청년의 내면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 자극은 왕성하게 불타오르는 청년다운 신선한 지성과 끈기 있는 고찰로 이어지고 이를 거듭 분석하고 해석하는 두 청년은 내면의 성장을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사회적인 비판으로 이어진다.

『산시로』가 주로 산업화한 일본 사회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을 주로 하고 있다면, 『청년』은 사상계, 특히 문학계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 그 예로, 하코네에서 만난 화가 오카무라는 대화의 화제가 되는 작품에 대해 읽어보지도 않고 주변의 말만 듣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저속한 인간이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예에 대한 비난은 대개 이 오카무라 같은 사람이 말을 퍼뜨리는 것이며, 작품 그 자체가 사회의 배척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고, 비평가끼리의 공격적 비평에 사회는 뇌동하는 것이라고 준이치는 생각했다. ‘비평가끼리의 공격적 비평’은 파벌을 형성하여 순수한 비판 의식을 잃은 비평가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순수한 비판 정신을 발휘하여 보다 더 풍부한 문학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문단을 좌지우지하여 개인적 야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다.

준이치는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거대한 근대화의 물결 앞에서 동요한다. 그를 보호하고 지탱해 주는 신념이 있지만, 거대한 도시와 거대한 사상가들 앞에서 자신은 제대로 된 소설도 발표하지 못한 미숙아일 뿐이다. 아직도 자신은 구습에 얽매이는 것 같아 불안하고 문학 지망생으로서 뭔가를 써야 하는 데 아무것도 쓰지 못해 조급하다. 이는 비단 준이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인들도 불투명한 미래와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대적 사명 앞에서 불안에 떨기는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워지는데 과연 나는 그 변화에 맞추어 제대로 따라가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해진다.

이것은 남들이 아는 것을 단순히 내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일까. 아니면 남들이 내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것을 가지고 뭔가 더 이득을 얻거나 내가 갖지 못한 좋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질투심에서 오는 실재적 불안일까. 아니면 그 둘 다일까.

어쩌면 ‘불안’은 산업 시대가 가져온 불치병인지도 모른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온 대가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불안에 떤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다 되는 만만한 세상은 아니지만, 불안에 떨며 걱정하던 것이 모두 현실로 일어날 만큼 그렇게 잔인한 세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병적인 집착을 버리고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면 그동안 우리가 놓친 ‘새롭지 않은 새로운’ 것들에서 우리를 깜짝 놀랄게 할 뭔가를 발견할 때가 있다. 삶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은 것이다. 명상을 통해서든, 문학을 통해서든, 아니면 여행을 통해서든 그렇게 발견한 삶의 또 다른 의미는 삶의 지평선을 확장시키며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그래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더는 병적인 불안에 떨 필요도 없다.

이 리뷰는 2016년 3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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