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 황석영 | 낯설지는 않지만 사라져가는 정情
쓰레기장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사람들이 돈 주고 물건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사 다 가 쓰고 버린 것처럼 자기네도 더이상 쓸 데가 없어져서 이곳에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47쪽)
14살 딱부리가 엄마와 함께 정든 산동네를 떠나 도착한 곳은 꽃섬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어여쁜 섬 이름과는 다르게 악취 나는 쓰레기로 뒤덮인 곳이었다. 강 건너 화려한 도시의 온갖 잡다한 쓰레기들이 그곳으로 모였고, 꽃섬에 판자촌을 형성하여 주거하는 주민들은 그 쓰레기들로 먹고살았다. 딱부리와 딱부리 엄마는 아빠 친구 아수라 백작의 주선으로 그곳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고, 아수라 백작의 약속대로 그곳의 수입은 산동네에서 장사하던 때보다 훨씬 좋았다. 새사람이 되려고 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간 아빠를 대신하여 딱부리도 엄마처럼 고무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쇠스랑을 쥐고 작업에 나섰다. 쓰레기들은 더럽고 볼썽사나웠다. 악취는 매캐하고 비릿하고 숨이 막히고 구역질 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낯설었다.
세 가지 세상이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에 등장한다. 작품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휘황찬란한 백화점의 진열장처럼 다양한 물품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도시, 그리고 그 도시에서 버려진 쓰레기들로 먹고사는 꽃섬, 마지막으로 신내린 증상이 있는 빼빼엄마가 남몰래 보살피는 김가네 대가족이 살았던 꽃섬의 목가적인 옛적 삶이다.
자본주의에 먹힌 도시는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과 소비를 부추기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역시 이에 발맞추어 자나깨나 새것을 강조하면서 소비자를 쉴 새 없이 자극한다. 도시민에게 절약은 웬 말이며 소비야말로 자신의 가치증명에 다름없다. 이로써 사람들이 매일 먹고 마시고 그에 따라 똥오줌을 진탕 싸대는 것처럼 탐욕과 허영을 먹으며 대량의 쓰레기를 배출하는 소비지상주의 엔진은 완성된다. 그러나 도시민의 낭비는 꽃섬 주민들에겐 매일매일의 양식이다. 꽃섬 주민들은 자본주의적 탐욕에 의해 낭비된 물건들, 즉 쓰레기에 의지해 생존하기 때문이다. 또한, 꽃섬 주민들은 도시에서 수거된 쓰레기를 통해 도시의 존재를 실감하고 도시적 삶을 꿈꾼다. 즉, 쓰레기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인 도시와 꽃섬을 은밀하게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땜통이 딱부리와 함께 딱 한 번 구경했던 백화점 동네를 꿈에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도시는 꽃섬 주민들에게는 눈앞에 훤히 보이지만 차마 갈 수 없는, 꿈속에서나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아득한 곳이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꽃섬에 살았던, 가끔 도깨비불이라는 신비한 모습으로 땜통 앞에 나타나는 김가네 가족들이 있다. 어느 날 딱부리와 땜통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가네의 막내는 좀 창백해 보이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막내는 식구들이 아프다며 메밀묵을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딱부리와 땜통에게 도움을 구하고 두 사람은 빼빼엄마와 그녀의 아버지인 고물장수 할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 폐허가 된 여울목 당집서 제사를 지낸다. 덕분에 원기를 회복한 김가네 가족들은 저마다 고마움의 말을 한마디씩 던지고 당집을 떠나고, 딱부리와 땜통은 막내를 따라 그들이 사는 옛날 꽃섬을 보게 된다.
잠시 멈춰 서서 강을 내다보면 한가운데 숲이 우거지고 나직한 산도 있는 이웃 섬이 보였고 돛을 단 조각배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강변 풀밭에는 송아지를 거느린 어미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풀꽃이 가득 피어난 강가에는 오리가 날아앉거나 물장난을 치는 게 보였다. (『낯익은 세상』, 136쪽)
딱부리와 땜통이 본 옛날 꽃섬의 모습은 어느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딱부리는 김가네 가족들의 실상을 보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각자의 정든 물건에 깃든 영혼의 현신이었던 것이다. 당집 근처에는 마른 샘이 있었고, 그 말라버린 웅덩이 안에는 나뭇결이 갈라지고 터진 절굿공이, 끝이 모두 닳아 버린 수숫대 빗자루,뒤축이 떨어져 나간 남녀 고무신 한 짝씩,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 등 살아생전 정든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딱부리가 이런 못쓰는 물건들을 왜 소중하게 감춰두느냐고 빼빼엄마에게 묻자 그녀는 서로 간에 정들어서 그런 거라고 대답한다. 이번에는 딱부리가 쓰레기장 물건들에 대해 묻자 빼빼엄마는 야멸치게 말한다.
“저것들은 사람들이 정을 준 게 아니잖아!”
딱부리와 땜통이 김가네 가족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정 때문이었고, 어느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김가네 가족들의 옛 꽃섬이 아직까지도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때가 스며든 정든 물건들 때문이었다. 쓰레기로 뒤덮인 현실의 꽃섬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밭을 갈고 고기를 낚으며, 여타 시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이 존재했던 옛 꽃섬을 이어주는 것은 사물에까지 깊숙이 스며드는 사람의 정(情)이었던 것이다.
그랬다. 정말 예전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건이 귀했던 시절이라 그럴지는 몰라도 애지중지 사용하던 물건 하나하나에는 주인 특유의 손때가 타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매끈하게 손때가 묻은 물건은 왠지 더럽다기보다는 사람의 피부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필자의 집에도 국수를 삶을 때는 쓰는 거진 30년을 사용한 커다란 양은 대야가 있다. 사람으로 치면 어른으로 성장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으니 사람의 피부가 생기를 잃어가는 것처럼 대야의 색이 바래는 것은 당연하지만, 딱히 국수 삶는 일 외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바닥과 옆구리는 곰보처럼 긁히고 파인 자국들로 도배되어 있다. 마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며 생기는 주름처럼 말이다. 그래도 보기 흉하다는 생각은커녕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한 생각이 먼저 든다. 오랫동안 우리 식구의 국수 삶는 일을 책임져왔으니 대견하고 고맙지만,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듯 이 녀석도 언젠가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 제구실을 못하는 날이 올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다. 이 녀석이 없다고 국수를 못 먹는 것은 아니고 특별히 이 녀석으로 국수를 삶은 면이 더 맛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오래 사용했던 정든 물건이 제구실을 못해 쓰레기로 버려야 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편치 못하다. 마음이 편치 않을 뿐만 아니라 버리고 나서도 쉽게 잊지 못한다. 아마도 이 녀석을 떠나보내고 나면, 새 양은 대야에 국수를 삶을 때마다 생각날 것이다. 비록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하등의 사물이지만, 사람은 이런 사물에까지 정을 붙이고 살 정도로 다정다감한 동물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처럼 다정다감했던 우리가 사리사욕만 채우는 이기적인 좀스러운 동물로 변했다.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은 낯익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사람의 따스한 정을 되새겨준 따뜻한 작품이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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