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희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 아, 질투여. 그대는 정령 사랑의 형제란 말인가!
Original Title: La Dame aux Camélias by Alexandre Dumas fils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은 돌아오지 못하실까요? 그러니 우린 이대로 영원히 다시 못 만나는 건가요? 당신이 오시면 내 병이 나을 것만 같아요. 하지만 나은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p294)
너무 유명한 것도 선택의 장애가 될 수 있다!
사실 원작보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가 각색한 오페라 ‘춘희’가 더 유명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의 소설 『춘희(La Dame aux Camélias)』는 줄거리까지는 몰라도 제목만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원작을 읽어볼 엄두가 쉽게 나지는 않는다. 작품성이 좋아서든지 아니면 단순히 내용이 재밌어서든지 어찌 되었든 세상에 제목이 너무 알려진 유명한 책들은 여기저기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도배된 리뷰들을 대강 읽고 나면 원작을 읽지 않아도 왠지 읽은 것 같은 오만한 착각이 들기 때문에 실제로 원작을 읽으려고 하면 다른 책 읽을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다. 너무 유명한 소설을 읽는 것은 왠지 유행을 좇는 것 같아 싱겁기도 하고, 이미 남들 다 읽었던 것을 뒤늦게 읽으려고 하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너무 기대가 큰 나머지 실제 작품을 읽고는 실망할까 봐 지레 겁먹기도 한다.
그러나 직접 읽어보지도 않은 작품에 대해 세간의 말만 듣고 이런저런 평을 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며 저자와 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제목만큼은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두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이 작품을 선택했다. 나는 『춘희』에 대해서 제목과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고급 매춘부와 순진한 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통속소설이었다.
<2010년 노르망디에서 열린 한 콘서트에서 / Christophe Le Glatin / CC BY> |
아, 질투여. 그대는 정령 사랑의 형제란 말인가!
언제부터인지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에서도 로맨스 장르를 꺼려왔다.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SF 영화 속의 미래보다 더 먼 거리감이 느껴졌으며 솔로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달콤하면서도 느끼한 장면들은 나의 비쩍 마른 옆구리를 더욱 시리고 건조하게 하였고 까닭 모를 질투심까지 솟구쳐 오르게 했다.
이 모든 장애에도 『춘희』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슬픈 비극으로 끝난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나를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발명하자면 나는 절대 그런 냉혈한은 아니다. 다만, 가진 것만큼 가진 배부른 사람들의 불행보다 가진 것도 별거 없이 음지를 살아가는 소수를 더 동정하고, 사람보다는 사람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동물들을 더 불쌍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소수’를 더 동정한다고 말했듯, 나 역시 『춘희』의 주인공 창녀 마르그리트를 저자 뒤마만큼이나 진심으로 동정하며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아르망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음속 깊이 애도했다. 그 슬픔은 ‘가슴이 찢어지도록’까지는 아니지만, 나의 홀쭉한 가슴 이곳저곳에 약간의 생채기가 날 정도로 쓰라렸다. 설령 그녀가 평생을 다른 사람의 신세를 망치는 파렴치한 일만 저질러 온 악녀였더라도 그녀의 죽음은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에서 언제가 있을 자신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어갈 때, 마르그리트처럼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보고 싶은 누군가를 못 본 채 눈을 감는다면? 그 이유가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사이처럼 사소한 다툼이나 오해 때문이라면, 그 묵은 앙금과 옥죄던 매듭을 끝내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이의 원통함과 안타까움을 어찌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르그리트의 죽음은 더더욱 애달프다.
병마로 피폐해진 그녀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문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눈만은 번쩍번쩍 빛났다. 혹시나 아르망이 돌아왔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무정한가. 마르그리트의 메마르고 새파란 입술이 죽어가는 나비의 마지막 날갯짓처럼 미약하게 떨리며 아르망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음에도 스스로 불을 지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매몰차게 마르그리트를 내버렸던 아르망. 그 잔인하도록 무정한 후레자식을 땅에 떨어진 담배꽁초 짓밟듯 마구 밟고도 성에 안 차 껌처럼 잘근잘근 씹었지만 그래도 울분을 토할 길이 없다.
아, 질투여. 그대는 정녕 사랑의 그림자로 남아 다정한 연인들을 불행과 어둠의 나락으로 끌어내려야만 만족스러운가. 사랑과 증오가 ‘감정’이라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니, 이 얼마나 가혹하고 냉정한 운명의 섭리인가.
마치면서...
남자들에겐 한낱 놀잇감 상대로, 같은 여자에게선 멸시와 냉대를 받으면서 늑대처럼 포악한 남자들을 순간이나마 온순한 양으로 길들였던 양치기 소녀들을 뒤마는 진심으로 한 사람의 여자로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창녀 마르그리트가 그 어떤 사랑보다도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며 새벽이슬처럼 순수한 사랑을 아르망에게 바친대서 알 수 있다. 또한, 진실한 사랑을 믿지 못하고 순간의 질투에 눈이 멀어 마르그리트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다 못해 증오심에 불타 복수까지 결심한 아르망을 통해 남자들의 욕정만 채우기에 급급해 남발하는 부질없는 사랑의 약속을 질타한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통속소설임에도 당시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던 창녀들을 동정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마에게 머리를 숙여 깊은 공감의 뜻을 표하며, 원래 남자란 그런 동물이라는 더럽고 파렴치한 속성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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