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 나쓰메 소세키 | 여자의 모호함이 의미하는 무서움에 대하여
Original Title: 行人 by 夏目漱石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네. 앞서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은 일찍 이 우리에게 멈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네. 도보에서 인력거,인력거에서 마차,마차에서 기차,기차에서 자동차,그다음엔 비행선,그다음엔 비행기,아무리 가봐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참으로 두렵다네.”(p327)
내지로의 형 이치로는 인정받는 학자이다. 그는 정직하며 학구적이고 사색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민한 신경과 종잡을 수 없는 변덕 때문에 그의 예민함을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에게는 그저 까다로운 사람으로만 비친다. 아내 나오와의 부부 사이도 화목하지 못하며 하나 있는 딸도 과묵하고 무뚝뚝한 아버지를 무서워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그는 나오의 정조까지 의심하기에 이른다. 괴팍한 사람답게 나오와 정을 통하는 상대로는 다름 아닌 자신의 친동생 지로를 의심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차마 할 수 없는 부탁을 그는 학자답게, 이론가답게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서슴없이 지로에게 부탁한다. 그는 자신의 의심을 지로에게 말하며 나오의 정조를 시험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한다. 그러한 부탁해 화들짝 놀란 지로는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하지만, 결국 ‘하룻밤’에서 ‘당일치기’로 타협한 지로는 형수 나오와 단둘이 와카야마로 떠난다. 그러나 갑작스레 태풍이 들이닥친 덕분에 이치로의 바람대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행인(行人)』에서 나가노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가져오는 갈등을 일으키는 삼각 구도는 주인공 지로와 지로의 형 이치로, 그리고 지로의 형수 나오이다. 나오는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처럼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다. 주변 상황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그녀는 감정의 기복이 없고 차분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혀 의사표현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의사표현이 일반적이지 않고 고승이 화두를 던지듯 다분히 암시적이다. 그것이 나오라는 인물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행인(行人)』을 비롯해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다 보면 주인공뿐만 아니라 작품 흐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안개처럼 흐릿한 존재감의 여주인공들이 떠오른다. 그녀들은 너무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거나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독자의 머릿속에 뚜렷한 윤곽을 그려내기 어렵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행인』의 나오를 비롯해 『산시로(三四郞)』에서의 미네코, 『문(門,)』의 오요네, 『그 후(それから)』의 미치요가 그러했다. 가부장제를 완벽하게 탈피하지 못한 남성주의의 잔흔이 남긴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독자의 빈약한 상상력을 풍부하게 부풀릴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되기도 한다. 특히 『행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로의 형수 나오가 그러하다.
작품의 몇몇 장면을 통해 그녀만의 의사전달법을 살펴보면, 나가노 집안에서 오랫동안 식객으로 일해왔던 여자 오카다의 중매를 논의하며 지로는 무심결에 이렇게 내뱉는다.
“하긴 이런 문제를 스스로 착착 진행시킬 용기가 일본 여성들에겐 없을 테니까 ”(『행인(行人)』, p87)
이러한 여성 폄하적인 발언을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나오는 ‘묘한 표정’으로 지로를 본다. 지로의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없다는 무언의 반항이다. 그리고 지로가 이치로에게 의심을 받고 그것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진 것 같아 결국 지로가 하숙을 구해 집을 떠나려고 할 때, 나오는 지로에게 부인을 얻으라고 조언한다.
“그런 건 빠를수록 좋아요,내가 찾아 드릴까요?” 하고 또 물었다.
“잘 부탁합니다 ” 하고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형수는 나를 깔보는 듯한 혹은 놀리는 듯한 엷은 웃음을 얄팍한 입술 양끝에 보이며,일부러 발소리를 높여 다실 쪽으로 갔다. (『행인(行人)』, p230)
내가 굵은 글씨로 강조한 ‘일부러’를 앞뒤 문장 속에서 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어감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무슨 감정을 싣고 ‘일부러’ 발소리를 높인 것일까. 비록 자신이 권했지만, 막상 지로가 부인을 얻는다는 상상을 하니 질투심이 발동한 것일까.
이번에는 지로가 오사카에서 만난 형수에게 형 이치로의 안부를 묻는 장면이다.
“형수님 , 어때요 요즘은. 형님의 기분이 좋은 편입니까, 나쁜 편입니까?" 하고 물었다. 형수는 “늘 그대로예요” 하고 단 한 마디만 대답할 뿐이었다. 형수는 그러면서 쓸쓸한 볼에 짝보조개를 띄워 미소지었다. (『행인(行人)』, p90)
와카노우라의 관광상품이었던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두고 시어머니가 나오에게 의사를 묻는 장면에서도 그녀는 유유히 쓸쓸한 보조개를 띄운다.
어머니는 공중으로 올라가는 철제 상자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오, 넌 어떡하련?”
어머니가 이렇게 물었을 때 형수는 늘 그렇듯 쓸쓸한 보조개를 띠며 “전 아무래도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행인(行人)』, p112)
그녀의 의사표현 대부분은 침묵을 동반한 미묘한 표정, 그리고 쓸쓸한 웃음, 그리고 “아무래도 좋아요.”라고 대책 없이 뒤로 물러나 버리기 때문에 그녀의 속내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그녀의 속내가 항상 만족스럽다고만은 볼 수 없다. 어느 날 가족이 모여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다른 누군가와 비교당하자 나오는 그나마 가정에 웃음을 안겨주는 외동딸 요시에를 데리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뜸으로써 자신의 불쾌함을 암묵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포커페이스인 그녀도 시동생 지로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는 예외적으로 돌변한다. 자신의 억눌린 심정이 불러온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인다. 때론 허물없이 장난을 치거나 얼핏 애교의 뜻도 비치며 요염한 여자가 되기도 한다. 묘하게도 시동생 앞에서만큼은 연약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태풍 때문에 와카야먀에서 하룻밤 묵었던 날 밤에 나오는 참고 참았던 속마음을 지로에게 터트린다. 자기처럼 얼빠진 사람은 남편 마음에 들 턱이 없다고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다. 비바람 때문에 전기가 나가 깜깜해진 방에서 잠시 전기가 들어와 환해진 틈을 타 재빠르게 화장을 하기도 한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기는 다시 끊어진다. 어둠 속에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자 나오는 마을이 태풍에 휩쓸리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놓친 것이 아깝다며, 죽는다면 목매달거나 목을 찌르는 그런 잔재주 부리는 건 싫고 홍수에 휩쓸리거나 벼락을 맞든가 해서 맹렬하고 단숨에 죽는 방법을 택하고 싶다는 등 무서운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그러면서 못 믿겠다면 지금이라도 파도에 뛰어들 수 있다고 저돌적으로 나온다.
어느 날 지로가 혼자 사는 하숙방에 느닷없이 찾아간 나오는 또 한 번 자신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쓸쓸한 처지를 하소연한다. 나오는 남자는 언제라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다며 이대로 말라죽을 때까지 꼼짝 않고 집안에 처박혀야 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나오는 매일 죽는 일만은 잊지 않는다고도 한다. 죽음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사무라이의 수양 방법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이런 속내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유유히 지로의 하숙방을 떠난다.
겉으로는 유순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 같은 격정을 간직한 나오가 지로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하소연할 데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품었던 지로에게 우연히 물꼬가 트인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이런 나오를 이치로는 구렁이를 들어 빗댄다. 어쩌면 나오는 능구렁이처럼 처세술에 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화가 안 통하는 고리타분한 남편 앞에서는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지로처럼 동정심이 많은 청년 앞에서는 여자의 연약함을 드러내며 연민을 일으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우자지간에 재미있는 것은 『그 후』에서 다이스케가 절친의 아내 미치요를 사랑하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변호할 때 들먹였던 ‘자연’이 『행인(行人)』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이라 볼 수 있는 이치로의 입을 통해 재등장한다.
불륜은 반사회적이면서도 비도덕적이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은 ‘자연’의 흐름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자연이란 인간이 세운 그 어떤 계획보다도 위대한 것이라고 믿었고,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인가,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번민에서 ‘자연’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치로 역시 도덕에 가담하는 자는 일시적 승리자임엔 틀림없지만,영원한 패배자이며 자연을 따르는 건 일시적 패배자이긴 해도 영원한 승리자다라고 말한다. 만약 이치로가 사랑 없이 윤리적으로 결합한 나오와 자신의 결합, 그리고 비윤리적이지만 진정한 사랑으로 결합한 나오와 지로를 떠올리며 이런 말을 했다면, 이것은 동생과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면서도 자신과 아내 사이의 불화가 사랑 없이 결혼한 탓이기 때문에 나오와 지로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인정할 각오도 되어 있다는 대범한 뜻으로 비칠 수 있다. 또한, 교양이 풍부하며 정직한 이치로는 아내에게 손찌검한 사실을 여행에 동행한 H에게 고백하지만 왜 아내를 때렸는지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남편에 대한 애교와 다정함이 부족한 것이 못마땅해 때렸는지, 아니면 나오가 지로에 대한 이치로의 추궁에 솔직 대담하게 고백해서 때렸는지는 해답은 독자의 머릿속에 있다.
지로와 나오가 단지 사이좋은 형수와 시동생인지, 아니면 그 이상 뭔가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 역시 독자의 몫이다. 독자는 감미롭게 흐르는 음악처럼 몽롱하게 하기도 하고 때론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나오의 알쏭달쏭한 언행과 태도에서 두 사람의 미래를 어슴푸레 짐작해 본다. 추리소설 같은 확실한 결말에 익숙한 독자에게 이런 미덥지 못한 결말은 다소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그것에 무한정 뻗어 나가는 상상력을 부과하여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소설은 정말로 좋은 작품이다. 차분하고 단조롭게 흐르는 문장 사이사이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깊은 뉘앙스를 남기는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은 그래서 더욱 맛깔스럽고 흡입력 있다.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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