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6

숨겨진 차원 | 에드워드 홀 | 공간이 숨 쉬는 도시

숨겨진 차원 | 에드워드 홀 | 공간이 숨 쉬는 도시는 사람이 숨 쉬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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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중 그 두 번째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침묵의 언어(The Silent Language)』에서 문화를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 분석하면서 사람의 의사소통 수단에는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언동으로 표현되는 시간과 공간의 언어인 ‘침묵의 언어’가 존재하며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 ‘침묵의 언어’도 문화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고 분석했다. ‘문화인류학 4부작’ 시리즈 중 두 번째인 『숨겨진 차원(The Hidden Dimension)』에서는 문화의 한 기능으로서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이 문화와 사람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적이고 통문화적으로 분석한다.

홀은 신경조직의 뿌리에 침투하여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인간은 제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사람들의 공간이용 ― 사람들이 서로 간에 유지하는 공간, 그리고 도시, 가정, 사무실에서 자기 주변에 설정하는 공간 ― 에 관한 연구를 책으로 내는 목적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오던 바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자기인식을 증진시키고 소외감을 축소하는 데 있으며 요컨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유기체라는 사실을 강조한 홀은 이 책을 통해 인간행동의 원천이 되는 생물학적 구조부터 탐구를 시작하면서 공간이 모든 생명체, 특히 인간에게 있어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조직화 된 체계의 하나라는 사실이라는 점을 동물행동학, 언어학, 사회심리학, 교육학, 역사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적 접근법을 동원해 논증한다.

숨겨진 차원 | 에드워드 홀 | 공간이 숨 쉬는 도시

나에게 다가오지마, ‘도주 거리’와 ‘치명적 거리’

특히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요구가 환경으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는가를 동물행동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결과들을 인용하며 사람과 동물을 비교연구를 한 점이다.

동물심리학자 헤디거(H. Hediger)에 따르면 동물들은 다른 종의 개체들과 마주칠 때 이용되는 ‘도주 거리’와 ‘치명적 거리’, 그리고 같은 종의 개체끼리 상호작용하는 동안 관찰할 수 있는 ‘개인적 거리’와 ‘사회적 거리’ 등의 공간유지법칙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인적 드문 새벽에 우리 집 강아지 다롱이와 생태공원에 산책가면 가끔 고양이나 고라니 등의 야생동물과 마주치는데, 고양이는 대략 2~3m 정도 접근하면 도망을 가지만 고라니는 사람의 인기척만 느껴지면 거리가 멀지라도 바로 숲으로 사라지곤 한다. 이것이 아마 공원에 거주하는 고양이와 고라니의 도주 거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동물이 사람으로부터 도망가다 장애물에 닿아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상태에서 거리가 좁혀지고, 이때 돌연 방향을 바꾸어 사람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리가 치명적 거리이다. 그래서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특히 동물의 치명적 거리는 센티미터까지 젤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정확하다고 한다.

사람은 문명의 발달로 ‘도주 거리’와 ‘치명적 거리’의 명확성은 희미해지긴 했지만, 놀이나 폭력적인 상황에서 종종 나타나곤 한다. 얼음땡 놀이할 때 술래 앞에서 실컷 약을 올리다가도 술래가 어느 정도 다가오면 잽싸게 줄달음치는 거리는 도주 거리이다. 또한, 상대방에게 상당히 화가 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서서히 접근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 서서 주먹을 쥐고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혹시라도 상대가 더 가까이 접근해오면 주먹을 날릴 기세일 때, 권투 시합에서 두 선수가 사각 링 안을 빙빙 돌면서 서로 견제하는 거리는 동물의 치명적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개인적 거리는 비접촉성 동물들이 자기들끼리 보통 유지하는 거리이며, 새들이 전깃줄 같은 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나 사람들이 줄을 설 때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놀랍도록 비슷한 간격으로 유지되는 그 간격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는 무리의 한계를 벗어나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심리적인 거리이며 한 집단을 결속시키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이라고 하면 처음엔 무질서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큰 원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사회적 거리의 한 예이다.

사람은 통신과 교통의 비약적인 발달로 사회적 거리는 많이 퇴색해졌지만, 문화나 개인 특성에 따른 개인적 거리의 차이와 비접촉성 문화, 접촉성 문화의 차이는 여전히 일상에 반영된다. 사람들이 버스를 타거나 표를 사려고 줄을 서는 간격은 접촉성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매우 촘촘하지만, 비접촉성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띄엄띄엄 줄을 선다. 그리고 폴란드처럼 아예 줄 서기를 거부하는 문화도 있다. 또한, 접촉성 문화가 발달한 아시아 사람들은 만원 버스 등의 과밀한 곳에서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접촉을 잘 견디는 편이지만, 비접촉성 문화가 발달한 서구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과 비비적거리게 하는 일본이나 한국의 지옥철 경험을 정말 ‘지옥’처럼 생각한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치명적 거리가 동물의 인구조절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모든 동물은 최소한의 공간적 요구를 갖는 데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생명체의 ‘치명적 공간’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더 이상 그 공간을 확보할 수 없게 되면 ‘치명적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 상황을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개체를 일부 제거하는 것이다. (p59)

문명이 뱉은 가래침 범벅으로 사는 우리들

에드워드 홀은 많은 동물행동학자가 동물들이 밀집 상태에서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순환기 장애, 심장질환, 병에 대한 저항력 약화 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연구결과들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꺼려 온 이유로 인간과 동물의 주요한 차이점 가운데 하나인 인간은 자신의 연장물들을 발달시킴으로써 자신을 길들이고 나아가 자신의 감각들을 차단해 보다 좁은 공간에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한 점을 꼽았다. 주택 구조의 벽 같은 감각 차단은 일시적인 도움은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체구조에 여전히 치명적일 수 있으며 상당한 기간에 걸쳐 누적된 극심한 도시밀집현상은 범죄와 자살, 환경오염과 전염병, 소외와 유대감 상실 등 도시화가 낳은 재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동물의 치명적 공간과 인구조절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홀이 제시한 과밀 문제, 공간으로 소통해야 하는 건축과 그 소통이 꽉 막힌 현대의 도시 문제가 우리의 혼잡한 삶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 머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다. 과밀로 말미암은 스트레스로 동물이 사망하거나 개체 수를 줄이고자 난폭해진다는 사실과 홀의 요지대로 인간이 존재하고 행동하고 지각하는 모든 것들이 공간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적절한 공간을 유지하고자 하는 ‘프록세믹한’ 욕구를 무시한 채 무계획적이고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도시를 지은 건축가와 도시계획자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한 체계로서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조화롭지 못하고 흉물스러운 한국의 도시가 낳은 고질적인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을 고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사람은 자신이 개발한 연장물 덕분에 눈부신 문명의 발전과 혜택을 입게 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연장물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고, 이제는 그 연장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총체적인 난국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도시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자신의 저서 『에밀』에서 '도시는 인류가 뱉어낸 가래침'이라고 말했는데, 자동차 때문에 내 집 앞 골목에서조차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없고, 빠르게 지나다니는 다른 차들에 방해될까 하는 기특한 마음으로 인도에 떡하니 올라선 자동차와 가뜩이나 좁은 인도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각종 전동차와 자전거를 보면 가래침도 아주 큰 가래침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도시는 사람을 위한 도시인지 아니면 차를 위한 도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높은 범죄율, 교통 혼잡, 소음, 환경오염, 이웃 간 대화의 단절, 불신, 그리고 소외 문제 등 우리는 도시가 뱉어낸 걸쭉한 가래침에 뒤범벅되어 흉물스럽게 변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문명의 혜택인 양 착각하며 산다. 이것이 우리 문화다.

Original Title: The Hidden Dimension by Edward T. Hall
인종위기, 도시위기, 교육위기는 상호연관되어 있다. 포괄적으로 바라보면 이 세 가지 모두 보다 큰 위기, 즉 인간이 자연을 앞질러 새로운 차원 즉 문화적 차원으로 발전시켜온, 대부분 숨겨져 있는 위기의 다양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자신의 차원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이다.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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