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사람이 어디까지 비굴해지고 파렴치해질 수 있나
하나님, 어떻게든 견딜 수 있습니다!
새벽 5시, 이 시간이면 언제나 어김없이 기상 신호가 온 바라크 안을 울렸다. (p5)
1951년의 새해가 시작되는 오늘.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씨에도 제9호 바라크 제104 작업반의 CH-854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수용소 일과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언제나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그였지만, 오늘따라 찌뿌드드한 몸 상태 때문에 조금 늦장을 부린 것이 당직 교도에게 걸리는 바람에 영창 3일을 받았다. 슈호프는 억울했지만 사정해 봐야 아무 소용없을 것이고 그래도 예의상 형식적으로나마 용서를 빌러 간 것이 천만다행으로 영창 대신 교도실 마루를 닦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침을 먹고 남은 빵은 매트리스 속에 몰래 꿰매어 숨긴 다음 무리에 섞여 인원 점검을 마친 다음 작업 장소로 이동했다. 오랫동안 눈이 내리지 않아 돌처럼 단단하게 다져진 눈길을 규정에 따라 뒷짐을 진 채 터벅터벅 힘없이 걷는 그들의 고개 숙인 모습은 장례 행렬처럼 어둡고 쓸쓸하며 살아있는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그래도 오늘의 작업이 작년 가을에 세우다 중단한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작업으로 낙찰된 것은 작은 위안이었다.
그럭저럭 한나절이 지나고, 취사부를 노련하게 속여 점심으로 자랑스럽게 귀리 죽을 두 그릇이나 먹은 슈호프는 동료에게 담배까지 꾸어 피니 담배 기운이 사르르 전신으로 퍼지며 심신이 나른해지고 머리가 빙그르르 도는 것 같다.
오후에 슈호프는 벽돌공으로서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며 바쁘게 보냄으로써 잠시나마 수용소 생활의 일탈과 소소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같은 반원인 체자르를 대신에 소포 수령자를 위한 순번을 대신 서주고 체자르의 몫까지 해서 2인분의 저녁을 먹었다. 어디 그뿐이냐. 신발이나 조끼를 기워 주는 부업으로 틈틈이 모은 돈으로 쌈지 담배도 사고 체자르의 음식 꾸러미를 지켜주는데 거들어 줌으로써 크래커와 사탕, 그리고 소시지까지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재수가 썩 좋은 흡족한 하루였다.
신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그였지만, 이처럼 오늘 하루를 배부르게 무사히 보낸 것에 대해 감사기도까지 드리며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하나님, 덕분에 또 하루를 무사히 보냈습니다! 영창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여기서라면 어떻게든지 견디어낼 수 있겠습니다. (p216)
<소련 V3에 있는 Dekulakisation / Unknown. Thanks to Lewis H. Siegelbaum and Andrej K. Sokolov / GFDL> |
거지 같은 이유로 거지 같은 수용소에 거지 같지 아니한 사람들
구소련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Один день Ивана Денисовича)』는 저자가 스탈린 치하의 구소련에서 실제 겪었던 강제노동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 때문에 평범한 농민에서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탈바꿈한 슈호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가혹한 수용소의 ‘하루’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낸, 이른바 ‘수용소 문학’의 진수다. 비인간적인 혹독한 수용소 생활에 초점을 맞추었음에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루어 독자에게 불쾌함이나 괴리감을 주기보다는 가벼운 재치로 담백하게 그려낸 것이 오히려 그들의 희망 없고 절망스러운 현실을 절실하게 표현해낸 원동력이 된 것 같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나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소소한 만족이 깃든 슈호프의 초췌한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슈호프를 포함한 같은 작업반원들이 수용소에 들어온 이유를 현재의 상식에 비추어 들어 보면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반장 추린은 일급사수의 칭호와 군사훈련 및 정치교육 양면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음에도 아버지가 부농이라는 이유로, 유럽을 순회하고 북해를 무대로 용맹을 떨쳤던 해군 중령 부이높스키는 친분이 있던 영국 제독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침례교 신자 알료샤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이유로, 열여섯 살밖엔 안 된 소년 고프치크는 숲속에 숨어 있던 벤데르파(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우유를 갖다 주었다는 이유로, 전선에서 고막을 다친 세니카는 독일에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한 이유로, 꼬박꼬박 소포를 받는 부유한 체자르는 처음 감독한 영화의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사상과 관련된 실책 때문에 수용소로 끌려왔다.
올해 마흔 살로 한때는 결혼하고 처자까지 둔 성실한 농부였던 슈호프는 독 • 소 전쟁(2차대전)에 참여했다가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고 식량 보급도 끊기는 절박한 상황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목숨을 건 탈출이 성공했다. 평범한 군대였다면 그의 탈출은 영웅적인 행위로 칭송받았겠지만, 의심과 기만이 독처럼 온 나라를 좀먹었던 스탈린 치하에서는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자체가 반역이다.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보고한 슈호프는 10년 형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슈호프 때는 일률적으로 10년을 받았지만 1949년부터는 시대가 바뀌어 무조건 25년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자행된 ‘숙청’과 ‘날조’, 그리고 ‘밀고’로 희생된 무고한 인민이 어디 이뿐일까. 추린의 말처럼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니 부농이니 하는 것도 문제가 안 되었고,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역시 문제가 아니었다. 그 어떤 법칙과 상식도 통하지 않는 기괴한 공포 사회였다. 친형제까지도 믿지 않았다던 스탈린의 이유 없는 의심과 변명 없는 음모만이 있었을 뿐이다.
어딜 가든 약자의 삶을 고달프다
이미 8년의 수용소 생활을 겪은 슈호프는 이빨도 반은 빠져버리고 머리숱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날 이때까지 뇌물이라는 걸 주고받은 경험도 없고 소포로 온 동료의 먹음직스러운 식량에 군침을 흘리거나 공짜로 얻어먹을 추잡한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작업에서는 기술자로서 성실하게 한몫하며 손안에 여유가 있을 땐 동료에게 베풀 줄도 안다. 아무리 가혹하고 절박한 수용소 생활도 그의 타고난 천성은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같은 죄수지만 특권층으로서 포동포동하게 살찐 취사부를 속여 규정보다 두 그릇을 더 받아내고, 국그릇을 나를 때 사용할 쟁반을 둘러싼 싸움에서 자신보다 먼저 예약한 사내가 약해 보이자 매몰차게 힘으로 물리치고 쟁반을 빼앗으며, 늦잠을 이유로 영창 징벌을 받았지만 용서를 받은 기쁨에 큰 소리로 절대로 늑장을 부리지 않겠다고 외치기도 한다. 약자의 값싼 감격에 젖는 그의 처절한 모습에서 아무리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도 수용소의 철저한 약육강식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눈치껏 비굴하고 때로는 야멸치게 자신보다 약한 자를 적당히 짓밟을 줄도 알아야 하며, 필요할 땐 과감하게 상대도 속일 수 있는 두둑한 배짱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사실 수용소 생활에서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정부와 교도관들의 처우보다 더 무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 특권을 가진 동료 죄수의 횡포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조차 의지하고 믿기 어렵다는 수용소의 현실이 모질고 비정한 수용소 특유의 비극을 잉태한다. 같은 죄수임에도 바라크장은 동료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폭력까지 행사한다. 취사부에서 일하는 죄수들은 바짝 타들어 가는 다른 죄수들과는 반대로 몸이 옆으로 퍼진다. 교도들에게 뇌물을 두둑이 바칠 수 있는 부유한 그들은 쉽고 편한 일만 골라 하면서 먹는 것도 바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바깥이건 수용소이건 언제 어디서나 고달픈 인생은 가진 것 없는 약자다. 수용소에서도 보잘것없는 존재인 그들은 남이 먹다 남은 찌꺼기나 찾아다니는 역겨운 존재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을까?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그 번지르르한 껍질을 벗기고 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다면 검붉은 피와 차갑게 식은땀이 걸쭉하게 섞여 흐르는 ‘약육강식’이라 불리는 강이 있다. 현실에선 그럴싸한 문명이 우리의 눈을 그럴듯하게 속이기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수용소는 이것을 적당히 가려줄 문명도, 상식도 없다. ‘약육강식’의 강 옆에 자리 잡은 수용소는 강이 그들의 젖줄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이 흘린 피와 땀을 먹고 자라는 그들은 더더욱 그것들을 갈망한다. 그래서 한때 성실했던 농부는 약삭빠른 인간으로, 전용승용차까지 굴리고 다니며 관청에서 한자리했던 사람은 남이 먹다 남은 죽그릇을 차지하려고 덤비다 몰매를 맞는 게걸쟁이로, 바다에서 용맹을 떨쳤던 군인은 죽 한 그릇에 반색하며 덤비는 궁색한 사람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흘린 피와 땀으로도 모자라 동료에게서 짜내거나 아니면 자신이 흘린 것으로라도 보충해야 했던 것이다. 보통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의 역할을 나름대로 해낼 수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을 어디까지 비굴해지고 파렴치해질 수 있나 하는 그 한계를 시험하는 수용소의 잔혹한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수용소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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