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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3일 일요일

[책 리뷰] 인류학 패러다임의 변화를 한 눈에 ~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앨런 바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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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패러다임의 변화를 한 눈에

Original Title: History and Theory in Anthropology by Alan Barnard
인류학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나 인류의 보편적 특성을 이해하려고 할 때 유용한 학문이다.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p7)

런 바너드(Alan Barnard)의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History and Theory in Anthropology)』은 인류학의 토대가 형성되었던 17세기 • 18세기 계몽 시대의 자연법과 인류학의 시발점이 된 사회계약 이론을 시작으로 인류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은 19세기 중반을 거쳐 현재까지 등장했던 모든 인류학 이론의 역사를 요약한 개론서이다. 앨런 바너드의 인류학 이론 강좌를 위한 강의 노트에서 시작한 이 개론서는 인류학 이론에 관한 논쟁들을 사상의 역사, 국가별 전통과 학파의 발달, 개별적 인류학자들과 그들이 인류학에 도입한 새로운 시각 등의 측면에서 여러모로 검토했다. 이로써 “인류학 이론을 최대한 다양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리라고 생각되는 독특하지만 절충적인 접근법이 탄생”했는데, 이러한 저자의 목적은 “각자 나름대로의 가정과 의문을 가진 인류학자들의 관심이 수렴되고 분기되는 현상을 배경으로 인류학 이론이 발달하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인류학 기초가 되는 이론을 정립한 루소나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 시대 사상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성립한 진화론,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진화론의 압도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인류학자에게 제공한 전파론, 전파론이 미국 인류학으로 스며들어 변형된 문화영역 이론,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저술을 통해 인류학적 시각으로 확고히 정립된 기능주의와 구조기능주의, 20세기 전반부 미국 인류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던 보아스의 상대주의, 1950년대 이후 형식적이고 사회중심적인 구조기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보다 개인적이고 행위중심적인 인류학을 추구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난 행위와 과정에 중심을 둔 접근 방법과 『자본론』 제1권에 표현된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초한 생산양식을 중요 개념으로 채택한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내용보다 형태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이론적 시각인 구조주의와 형식적 틀을 고집하는 기능주의와 구조주의에서 벗어나 문화와 사회적 행위의 관계를 좀 더 유연하고 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후기구조주의와 여성주의, 인류학이 과학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인류학을 인문학으로 정립시키고자 시도한 해석주의와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든 ‘근대적’ 이해를 비판하듯 인류학의 거대이론과 민족지 기술의 완결성이란 관념을 모두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인류학 등 실로 광범위한 이론과 그 배경을 개괄하면서 동시에 무수히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앨런 바너드는 부록에 인류학 용어에 대한 설명과 함께 본문에 언급된 거의 모든 학자의 생몰년을 부록에 포함하면서 여기에 빠진 소수 인물은 주로 아직 살아있는 비교적 젊은 인류학자들이라고 밝혔는데, 내가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문화의 패턴』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 역시 보아스의 상대주의 이론을 설명할 때 등장한다.

바너드는 결론 장에서 현재 인류학의 흐름에 대해 오늘날 많은 인류학자는 하나 이상의 패러다임에 속하며, 둘 이상의 패러다임을 섞는 이들도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곧 패러다임이 없는 것이 현재의 패러다임이라는 뜻으로도 풀어볼 수가 있다. 하나의 이론에서 벗어나 상황에 따라 여러 이론을 적절하게 고려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진 국경을 넘어선 이론 간의 원활한 소통 덕분일 것이다. 학자들 간의 상대적 거리가 가까워지고, 학문적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이론적 반목도 줄어든 것이 학자의 융통성과 학문의 포용력을 넓이는 데 일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은 인류학이나 관련 학문을 전공하거나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가 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류학 이론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은 방대한 분량의 논문들을 단 몇 줄로 요약한 것이기에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실례로 본문 8장에 나오는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구조』는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것은 단 몇 페이지로 요약했으니 실로 엄청난 축약이다. 그나마 나는 『문화의 패턴』 덕분에 보아스와 베네딕트가 등장하는 상대주의 이론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History and Theory in Anthropology)』은 어떤 특정한 인류학 이론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다양한 인류학 이론들의 대략적인 개요와 그 이론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그로 말미암은 인류학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서로 다른 이론 간의 상호작용 등 인류학 이론의 변천 과정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을 선택함에 흥미로운 예증으로 문화의 상대성을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문화의 패턴』 같은 인류학 고전을 떠올려서는 안 되며, 저자 앨런 바너드가 이 책은 인류학 이론 강좌를 위한 강의 노트에서 시작했다고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대학 교재의 그 딱딱함을 상상하면 어떤 책인지 쉽게 감이 잡힐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인류학 이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자신이 아는 인류학 이론과 그 이론을 반영하는 조각들을 책장을 좀 더 가볍게 넘기면서 책의 구성에 맞추어 머릿속에서 자유자재로 끼워 맞출 수 있다면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인류학 이론사의 큰 그림을 좀 더 쉽게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리뷰는 2015년 8월 23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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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책 리뷰] 검은 피를 흘리고, 검객은 눈물을 흘린다 ~ 다정검객무정검(고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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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를 흘리고, 검객은 눈물을 흘린다

Original Title: 小李飞刀1: 多情剑客无情剑 by 古龙
다른 사람이 베푼 은혜를 잊기란 매우 쉬운 일인 듯하나 다른 사람이 진 원한을 잊기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엔 근심이 늘 기쁨보다 많은 법이었다.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劍, 1968) 중에서』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설 속에서 갈래머리 손녀와 함께 강호를 떠도는 이야기꾼(說書人) 손 노인이 객잔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뻐금거리며 막 강호 이야기를 시작할라치면, 그때까진 거의 텅 비어 있던 객잔은 갑작스러운 손님들로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시끌벅적한 개인적인 담소들도 뚝 그친다. 객잔을 빈틈없이 채운 이들은 대부분이 강호와 연관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강호의 이야기에 자기 일처럼 귀를 곤두세운다.

이에 대해 또 한 명의 이야기꾼인 작중 화자는 강호의 일들이란 언제나 자극으로 넘쳐 있기 마련이었고 누구든지 그것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저마다 마음속에 크든 작든 억눌려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리라고 말한다. 객잔에 모여든 사람들이 강호 호걸들과 무림 기협들에 관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동일시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세속적인 슬픔과 고통으로 짓눌리고 찢긴 영혼이 흘린 피가 뭉치고 굳어 생긴 뻐근한 응어리를 한순간이나마 시원하게 풀어주는 약이 되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라고 이들보다 더 나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성냥갑처럼 갑갑한 집,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지 않고는 하늘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이 들어선 빌딩 숲, 이런 빌딩 숲이 연출하는 위압감과 삭막함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마지못해 살아가는 우리는 무한 경쟁의 빠듯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복수와 원한, 야심으로 가득 찬 강호에서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둘 다 끊이지 않는 긴장의 연속으로 고단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며 패배와 죽음, 낙오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다만, 현대인은 돈을 흘리고 강호인은 피를 흘릴 뿐이다.

그래서 우린 손 노인의 이야기에 벌떼처럼 몰려드는 객잔의 손님들처럼 잊을만하면 무협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샘 솟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사랑, 증오, 질투, 원한, 복수, 살인, 응징 등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원시적 감정을 아우르면서 통쾌하고 강렬하며 웅장하고 짜릿한 경험을 전해준다.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평소에 책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도 때론 무협지를 찾는다. 그만큼 무협지는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의 텁텁한 갈증을 해결해 주는 시원한 맥주,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잊게 해주는 따끈한 차 한잔처럼 무협지는 삶에 지친 나머지 피폐해지고 딱딱하게 굳은 우리의 마음을 한결 시원하고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한시름 덜어주는 시원한 맥주이자 따끈한 차 한잔이다.

첫 출수가 생사를 가늠한다

리즈 소이비도(小李飛刀)의 첫 번째 편인 고룡(古龙)의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劍, 1968)』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심환(李尋歡)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다정한 검객’이자 ‘무정한 검’을 소유한 비상한 인물이다. 그의 비도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매섭다. 그러나 그는 타인을 대신해 기꺼이 자신의 눈물과 피를 흘린다. 그는 남이 자신에게 폐를 끼치게는 할망정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못할 사람이며 자신이 남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묵인할 정도로 마음이 약하다. 이러한 그의 고결한 인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왕왕 눈물을 흘리게 하는데 바로 그것은 감동의 눈물이자 감격의 눈물이다.

총명한 소년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기인한 우연과 기연을 통해 새로운 무공을 익히고 연마함으로써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고수로 성장하여 의(義)를 행한다는 설정이 무협지의 전형적인 줄기이다. 그러나 『다정검객무정검』의 주인공 이심환은 이미 40세, 즉 중년의 나이로 소설에 등장하며 무공은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단계이다. 이심환의 친구이자 기이하게 빠른 검법의 소유자인 아비 역시 강호에 첫발을 디뎠을 때 이미 20대 초반의 젊은이며 그만의 독특한 무공도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이다. 또한, 무협지에 빠지지 않는 소재라고 할 수 있는 강호의 일대 사건인 비급을 두고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무공이나 비급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그래서 무공 대결을 묘사하는 부분은 매우 간결하다. 주요 인물들의 무공 대결은 한 두 초식 안에 끝난다. 이렇게 말하니 좀 싱겁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묘미는 독자의 눈앞에서 난해한 무공 이름들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어지럽게 추는 비무(比武)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를 건 대결을 앞두고 첫 출수가 이루어지기까지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팽팽한 긴장감이다. 첫 출수의 실패는 패배로, 그리고 패배는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순간을 간결한 필치로 단호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입안을 바짝바짝 마르게 한다. 더불어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사건 전개도 이 책을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변수이다.

마치면서...

설 『다정검객무정검』은 부정할 수 없는 무협지지만 ‘무공’ 그 자체에 비중을 두기보단 천편일률적인 선과 악의 구분을 경멸하는 심도 있는 성격과 인간성을 지닌 영웅들의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그려냄으로써 기존의 무협지의 틀을 벗어남과 동시에 하늘과 땅, 끝이 있을망정 이 한(恨)은 그칠 날이 없는 강호 세계의 비정한 인간사를 완성한 특색 있는 무협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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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9일 일요일

[책 리뷰] 사랑의 번뇌가 싹 틔운 근대적 자아 ~ 무정(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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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번뇌가 싹 틔운 근대적 자아

Original Title: 무정 by 이광수
나는 선형을 어리고 자각 없는 어린애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선형이나 자기나 다 같은 어린애다. 조상 적부터 전하여 오는 사상(思想)의 전통(傳統)은 다 잃어버리고 혼돈한 외국 사상 속에서 아직 자기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줄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오라비와 누이, 생활(生活)의 표준도 서지 못하고 민족의 이상도 서지 못한, 세상에 인도하는 자도 없이 내어던짐이 된 오라비와 누이────이것이 자기와 선형의 모양인 듯하였다. (『무정』)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 에 연재된 이광수의 『무정』은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이 부잣집 딸 김선형과 옛 은사의 딸 박영채 사이의 삼각관계 속에서 번민하는 구시대적 가치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자아의식의 성장을 이루어가는 이형식의 성찰에 자주적 계몽을 통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저자의 염원을 투영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다. 그런 고로 유교적인 결혼 관습의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있다.

이형식은 재산과 명성을 가진 김장로의 딸 선형과 고아인 자신을 보살펴주고 가르쳐준 박진사의 딸 영채 사이에서 고민한다. 선형을 선택하면 미국 유학과 함께 출세가 보장될 것이지만, 옛 은사와 은근한 언약까지 있었던 영채를 버리는 것은 보은의 도리와 은사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영채는 오직 형식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뜻을 은연중에 비치지만 영채와 함께 자라 정도 어느 정도 들은 형식이 영채를 섣불리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영채가 기생 계월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을 구하고자 옛글에 나오던 열녀를 본받아 기생이 된 영채지만, 형식은 영채가 정조를 잃지 않고 어찌 7년 동안이나 기생 노릇을 할 수 있었는가, 하고 의심을 하며 부유한 양반댁에서 곱게 자란 선형을 떠올린다.

형식이 선형과 영채를 두고 출세와 의리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습은 나쓰메 소세키가 1907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우미인초(윤혜영 옮김, 궁미디어)』의 주인공 오노를 떠오르게 한다.

고아이며 가난한 오노는 고도선생의 은혜를 받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우등생으로 졸업해 천황에게 은시계까지 하사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다. 오노는 도쿄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결혼 상대로는 교토에 있는 고도선생의 딸인 사요코가 아니라 자신의 장래를 위해 재력가이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후지오를 선택하기로 하지만, 오노는 친구 무네치카의 설득에 감흥을 받아 은사에게 받은 은혜를 갚는 ‘의무’를 실천하기 위한 도덕적인 삶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에게 가장 큰 모욕인 ‘의리도 모르는 놈’이라는 비난을 듣기 때문이다.

스 베네딕트는 자신의 저서 『국화와 칼(김윤식, 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에서 “기리(義理)를 고려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방침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일본인에게 의리와 의무는 특별하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미인초』를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무정』에서 형식은 『우미인초』의 주인공 오노처럼 은사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과 더불어 ‘처녀’, 즉 영채가 미래의 남편에 대한 의무로서 정절을 지켰는지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스스로 깬 사람, 개화된 문명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아내를 선택함에는 구시대적 가치관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모순을 지닌, 아직 근대적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해 구식과 신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형식은 스스로 만든 번뇌의 올가미 속으로 죄어들어간다. 영채 역시 형식을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짝을 지어준 사람으로 자신이 응당 섬겨야 할 사람으로만 여겼지 형식을 사랑하는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영채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결정된 미래의 혼약을 거절하지 못하는 유교적인 효(孝)의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채가 청량사에서 강간을 당하고 자살을 하러 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나자, 형식의 친구 우선이 영채의 자살을 두고 가장 좋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는 달리, 형식은 영채가 비록 효(孝)와 정(貞)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지만, 그 두 의무는 영채가 가진 전체 의무, 즉 충(忠)이나 세계, 동물, 산천, 성신 등에 대한 의무 중에 일부분에 불과하므로 생명을 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살을 다짐한 영채가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동경 유학생 김병욱 역시 영채가 죽는 것은 조상, 동포, 자손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고 죽는 것이므로 죄라고 설득한다.

형식과 영채를 이어주는 매듭에는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 우선시되지 못하고 보수적인 유교 문화에서 출발한 ‘이유를 불문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의 관습이 남아 영향을 미치듯, 부모의 일방적인 명령에 의해 남편을 맞게 된 선형에게 형식은 마땅히 아내로서 남편을 섬겨야 할 의무의 대상이었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것은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하는 것이지 사랑하니까 아내가 된 것이 아니다.

선형의 아버지 김장로는 형식과 기생 계월향과의 소문을 들은 날부터 형식을 못마땅해하며 딸을 형식에 준 것을 후회하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을 체면상 깨트릴 수도 없고, 훗날 일이 잘되건 못 되건 그것은 선형의 팔자로 돌려버린다. 루브 베네딕트는 앞의 책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인을 가리켜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리, 즉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김장로에게 파혼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리라.

부부 사이의 애정보다는 ‘이유를 불문하고 마땅히’ 아내로서, 또는 남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만을 내세웠던 유교적 결혼 관습의 부작용은 『무정』 곳곳에 등장한다. 형식의 친구 신우선 부부와 영채를 새 삶으로 인도하는 김병욱의 오빠 김병국 부부가 그러한데,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관계를 운명이나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묵묵히 서로의 할 일만 하며 하릴없이 살아간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무미건조하며 소원한 부부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줄 수 있는 자녀의 생산과 양육은 소위 말하는 ‘애정의 산물’이 아니라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의 결과이다. 이렇게 겨우겨우 위태로운 부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이들을 두고 작품의 화자는 “조선의 흉악한 혼인제도는 수백 년래 사랑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라고 비난한다. 이것은 이광수 자신이 중매로 결혼하여 애정 없는 결혼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비참한지를 체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렇다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자신을 조선 최고의 문명인이라고 자만했던 형식이 자신의 부족함과 오만함을 뉘우치는 자각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형식이 선형을 사랑했다면 그것은 외모의 사랑이다.

외모의 사랑은 옅다. 그러므로 얼른 식는다. 정신적 사랑은 깊다. 그러므로 오래간다. 그러나 외모만 사랑하는 사랑은 동물의 사랑이요, 정신만 사랑하는 사랑은 귀신의 사랑이다. 육체와 정신이 한데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무정』, 「110」 중에서)

또한, 형식은 그동안 선형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너무 유치하고 근거나 내용이 빈약했음을 깨닫고 동시에 자신의 정신 발달한 정도가 아직도 유치함을 깨닫는다. 이런 자신은 인생을 논할 때도 아니므로 사랑을 논할 때도 아니다. 더불어 오늘날까지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은 극히 외람된 일이었음을 느끼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더구나 형식은 아직 ‘나’를 모른다. 내가 세상에 처하여 갈 인생관이 없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할 만한 무슨 표준이 없다. 형식의 이와 같은 자각은 자기 철학, 자신의 신념이 없이 주변에 휩쓸려 자본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현대인도 한 번쯤 되새겨 볼 만한 화제다.

이렇게 근대적 자아의 눈을 뜬 형식의 조선 근대화는 조선의 과거부터 바로 알고자 하는 올바른 역사 안식에서 시작한다.

조선 사람의 품을 이상과, 따라서 교육자의 가질 이상을 확실히 잡았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필경은 어린애의 생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선의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모른다. 조선의 과거를 알려면 우선 역사 보는 안식(眼識)을 길러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현재를 알려면 우선 현대의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의 대세를 살펴서 사회와 문명을 이해할 만한 안식을 기른 뒤에 조선의 모든 현재 상태를 주밀히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나갈 방향을 알려면 그 과거와 현재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지금껏 생각하여 오던 바, 주장하여 오던 바는 모두 다 어린애의 어린 수작이라. (『무정』, 「115」 중에서)

원 이광수는 작품을 통해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민족이 깨어야 하고 인생을 운명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헤쳐나가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참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러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계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계몽주의적인 춘원 이광수의 뚜렷한 의도가 현대인에게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형식과 영채, 선형의 삼각관계 사이에서 애정 문제로 고민하는 그네들의 의식을 통해 문화의 흐름과 단절, 그리고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소중한 간접 체험이 될 수 있으며 서구화의 겉멋만 든 김장로의 억지스러운 신식 생활은 현대인이 품은 소박한 허영의 원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 리뷰는 2015년 8월 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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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3일 월요일

Windows 10 장치 드라이버 강제 업데이트 막기

윈도우 10에서 업데이트를 통한 장치 드라이버가 자동으로 설치되는 것을 막으려면 서비스 항목에서 [Device Setup Manager]와 [Device Install Service]를 [사용안함]으로 설정하고 재부팅하면 된다.

필자는 윈도우 업데이트를 통해 설치된 리얼텍 사운드 드라이버를 언인스톨한 다음, 위의 두 서비스 항목을 [사용안함]으로 설정한 상태에서 윈도우 업데이트를 해보았다. 그 결과 첫 번째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업데이트 목록에 뜨기는 했지만, 설치 도중 오류가 났다. 작업표시줄을 유심히 보면 리얼텍 드라이버가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윈도우 사운드가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두 서비스 항목을 시작시키자마자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리얼텍 사운드 드라이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설치되면서 작업표시줄의 윈도우 사운드도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두 서비스가 죽어 있으면 사용자가 인스톨하는 드라이버도 설치가 안 된다. 고로 인터넷 연결을 끊고 사용자 드라이버 설치를 모두 완료한 다음, 위의 설정으로 윈도우 업데이트를 하면 장치 드라이버 강제 업데이트는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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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일 일요일

[책 리뷰] 먼저 간 친구에게 보내는 생애 마지막 편지 ~ 루스 베네딕트(마거릿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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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친구에게 보내는 생애 마지막 편지'

Original Title: Ruth Benedict: A Humanist in Anthropology by Margaret Mead
인류학이 아주 흥미로운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 새 학문에서 자신이 존중할 수 있는 어떤 실체를 발견했다. 이 학문에 모든 재능을 쏟아 부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왜 나는 현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에 답변을 얻을 것 같았다. (루스 베네딕트』, p52)

자기 정체성 고민에 빠진 조숙한 소녀

찍 아버지를 여의고 과부 생활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호소하던 어머니 밑에서 한쪽의 청력까지 잃은 우울한 아이였던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는 소녀 시절 일기장의 한 페이지에 "인생의 문제점은 해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 라고 적었을 정도로 또래의 평범한 소녀들처럼 명랑하고 활기차고 약간의 허영심도 내세우는 수줍은 소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침체한 내성적이고 차분한 소녀로 성장한다.

조숙한 그녀는 사회가 권장하는 가치와는 상관없이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갈망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보이는 ‘나’와의 내면에 침체한 ‘나’ 사이에서 무엇이 진정한 나인지 갈등을 겪으며 끊임없이 고뇌한다. 이것은 훗날 그녀가 명상과 화두를 통해 무아(無我)의 도를 깨닫는 일본의 선종(禪宗) 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주변의 생활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주체하기 어려운 우울증을 억제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속으로는 대혼란을 겪으면서도 겉으로는 침착하고 눈물 없는 외양을 꾸미려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일기에는 “이 세상과 마찰하고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잃지 않는 확고한 신념, 그게 필요하다” 라는 성찰이 담겨 있는데, 이 짤막한 문장에서 그녀가 주변과의 혼란과 마찰, 무언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우선 그녀는 여자로서 쉽게 떠올리고 선택할 수 있는 결혼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화목하지 못한 부부생활에 어려운 수술을 받지 못하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의사의 날벼락 같은 판정까지 겹치자 베네딕트는 가정에 대한 희망과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 길은 '노력과 창조의 개성적 세계'를 만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찾은 해법은 바로 인류학이었다.

일탈자가 되더라도 내 갈 길을 걷는다는 것

녀는 자신과 사회를 속이는 위선의 삶을 버리고 비록 사회의 일탈자로 낙인이 찍힐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동성애자의 길을 선택한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새로운 각오와 자신감으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고, 노골적인 성차별과 사회적 편견 속의 무수한 난관까지 극복한 그녀는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세 부족의 예증으로 명철하게 설명한 인류학의 영원한 고전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을 완성함으로써 위대한 인류학자로 거듭 태어나는 데 성공한다.

루스 베네딕트가 몸담았던 컬럼비아 대학은 대학원에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등 당시로써는 좋은 전통을 가진 대학 중 하나였다고 평가를 받았지만, 여자 교수들은 남자 교수들의 식당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성차별은 시대의 지성인이라 자부하던 교수들 사이에서도 당연시되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베네딕트의 전기를 두 번이나 지은 마거릿 리드조차 솔직하게 밝히지 못했을 정도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 박해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베네딕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결정한 이후에도 공개적으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고 이것은 마거릿 미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회적 역경 속에서도 베네딕트는 청각장애와 수줍은 성격, 우울증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학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미드의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자이며 동시에 20세기 위대한 여성인 루스 베네딕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다. (참고로 1980년대 이후에 마거릿 리드의 딸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함으로써 베네딕트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심이 밝혀졌다.)

두 권의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특별했던 사랑

1922년 바너드대학 프란츠 보아스의 인류학 입문 강좌에서 베네딕트를 처음 만난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A Humanist in Anthropology)』의 저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베네딕트보다 15세 연하였지만, 그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동료 학자이자 다정한 친구, 그리고 비록 한참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때때로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베네딕트가 사망하는 1948년까지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친구에 대한 사랑과 우정이 오죽했으면 한 권도 모자라 두 권의 전기를 집필했을까. 그만큼 미드의 베네딕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특별했으며, 베네딕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존경도 남달랐다. 이에 대한 평가는 부록의 추천사를 쓴 낸시 러트키호스의 말이 정말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다.

이 전기는 마거릿 미드가 먼저 간 친구에게 보내는 생애 마지막 편지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루스 베네딕트』, p402)

당시 (1970년대) 인류학 분야에서 베네딕트에게 쏟아진 비판이 미드에게는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웠을 것일까. 첫 번째 전기와 비교하면 이 두 번째 전기는 그러한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베네딕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 좀 더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래서 베네딕트의 삶을 담은 부분은 비교적 적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대신에 베네딕트의 주요 연설문과 논문들이 실려 있다.

난 이 전기를 읽기 전에 『문화의 패턴』을 읽었고, 베네딕트의 또 하나의 명작 『국화의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을 읽기 전에 그녀의 배경을 좀 더 알고 싶어 이 책을 선택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전기는 베네딕트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강조가 꽤 주요하게 다뤄지니만큼 『문화의 패턴』과 『국화의 칼』을 다 읽고 이 전기를 보는 것이 그녀의 삶과 학문을 이해하기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을 부적응자라고 느끼는 한 여성이 사회 내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또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감동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확고한 신념과 그에 따른 단호한 행동, 그리고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완벽한 설명 스타일이다. 절제되어 있고, 자신감에 넘치고, 보석을 세공하는 듯하고, 무엇보다도 단호하다. 단정적으로 표현된 단정적 견해”라는 극찬을 받은 베네딕트의 논문을 통해 어설픈 교양서적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의 충족과 그로 말미암은 지적 만족감과 성취감을 만끽하는 데는 충분하리다 본다.

이 리뷰는 2015년 8월 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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