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 염상섭 | 설령 지옥일지라도 민중의 삶은 결국 피어난다
1932년에 발표한 염상섭의 장편 『삼대』는 작품의 주인공이자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앳된 청년 조덕기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 조상훈, 할아버지 조의관 등 일제강점기 속에서 각기 다른 신념과 주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3대 사이의 갈등을 다룬 시대소설이다. 한국 근대소설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유명한 작품이기에 중심 내용은 일부러 피해가고 여기에서는 그 외 변변치 않은 나의 소감을 몇 자 적어본다.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로서 3·1 운동 이후 일본이 기존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서 좀 더 부드러운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꾼 덕분에 훗날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가혹한 식민지 수탈이 정점으로 치닫기 전까지는 조선 민중들로서는 그나마 가장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시절이다. 조덕기가 필순과 함께 장사를 시작하는 것을 기회로 행랑살이에서 벗어나 제살이를 할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에 젖는 원삼 부부의 모습(Original Title 바로 아래 인용문 참조)은 식민지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원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의 소소하지만, 한편으로는 구시대적인 애처로운 희망에서 비록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민중 대부분에겐 독립보다는 밥, 즉 개인적 삶의 안정이 더 중요했음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당장 눈앞의 급한 불을 끄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민중들과는 달리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등 신사상의 급물살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애썼고 동시에 어설프게나마 사회 개혁 방면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다방면으로 활동하게 된다. 덕분에 김병화 같은 ‘마르크스 보이’도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격동기는 사상적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충돌도 있었지만, 의외의 합일점도 있었다.
조덕기는 온건한 사회주의자 김병화가 필순네 가족과 사상적 차이가 있음에도 충돌 없이 구순히 지내는 이유를 필순에게 묻는다. 이에 필순은 “허기야 일치점은 있거든요. 구차하니 서로 동정하는 것이죠. 피차에 배를 졸라매구 앉았으니 의견이 틀린다고 말다툼할 기운두 없어 서루 사폐를 알아주는 건가 봐요. 그런 점은 가정적이나 사회적이나 일반일 거예요…….”라고 답하면서 “사실이죠.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이나 확실히 그 점에 가서는 일치점이 있지요.”라고 덧붙인다. 굶주림 앞에는 양반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1920년대 중반에 오면 국내의 민족운동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크게 양분되며 일종의 대립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앞선 필순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잃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하나의 목표를 위해 굳게 단결되지 못한 지식층과 생업에 바쁜 민중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무관심은 필순 아버지처럼 독립투사들의 비극적인 생을 잉태하기도 한다.
필순은 반생을 감옥으로 끌려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매 맞아 돌아간 아버지를 떠올리며 “어떻게 된 세상이 이래요?”라며 개탄한다. 이에 조덕기는 “훈련이나 조직이 없는 사회이고서야 그따위 일이나 저지를 수밖에! 그야말로 무를 수 없는 횡액이요 값없는 희생이죠!”라고 마주 한탄한다. 조덕기가 말한 ‘훈련이나 조직이 없는 사회’는 단결되지 못한 사회, 조부와 부친의 실없는 반목처럼 배려와 관용과 대화가 없는 사회, 나라를 잃어 제 갈 길을 바로 가지 못하는 민중들의 방황으로 가득한 사회라고 말한다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말하면 나라를 잃은 참담함에 울분을 토하는 애국지사들과 일제식민지 정책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는 민중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다. 마음속이야 어떤 각오를 했건 간에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그것이 부당하고 이겨내기 어려운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하며 제 갈 길을 간다. 이것이 사람 사는 곳의 순리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의 근대화 물결 속에서 우리 민중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며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것은 그 당시 발표된 소설에서 근삿값을 찾아볼 수 있으며, 염상섭의 『삼대』는 그런 면에서 뛰어나고 섬세한 관찰력으로 작품 인물들 간의 다층적인 갈등을 풍부한 어휘력을 바탕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한국 근대 문학의 정수이자 고전으로 남을 문화유산이다.
원삼은 서방님이 이번에 횡액에 걸려 고생하고 나온 상급으로 한밑천 대서 장사나 시켜 주시려나 하고 신이 났다. 원삼의 처는 또 원삼의 처대로 이 아가씨가 우리댁 작은 아가씨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짐작도 혼자 해보는 것이다. 필순을 딸같이 귀엽게도 생각하던 터이라 몸조리하는 동안 시중을 들기도 아니꼽다거나 싫을 것도 없거니와, 저희 내외는 전방이나 아주 맡게 되고 이 색시는 작은아씨로 들어앉고 하면 얼마나 재미있고 좋을까 싶었다. (『삼대』, 「백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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