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의 나라 | 이케가미 에이코 | 일본을 일으키고 침몰시킨 사무라이 문화
서양인의 눈에 미친 일본인의 모순
서구의 눈으로 본 ‘일본의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민에게 무엇보다도 집단주의 사고방식과 현상유지의 태도를 중시하고, 개인주의와 대담한 혁신은 저평가하도록 장려하는 사회가 공업화와 기업경영에서 어떻게 현재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 (『사무라이의 나라』, p26)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일본인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국화와 칼』, 「제1장 연구 과제 – 일본」, 을유문화사, 김윤식 • 오인석 옮김)』
그러면서 서양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을 모순적이라고 보았다. 애초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베네딕트가 일본인을 모순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다소 성급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도 일본 문화의 기저에 흐르는 ‘수치’와 ‘명예’, 그리고 ‘의리’의 문화복합체를 예리하게 통찰했다.
일본의 수수께끼를 풀다
서양인이 보기에는 모순덩어리로 보이기까지 하는 일본인, 같은 동양인인 내가 보기에도 특정 상황에서는 엄청난 집단성을 보이면서도 일상적인 삶에서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또 다른 독특한 개인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일본인을 보면, 우리와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같은 한자 문화권에다가 우리처럼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형성하여 서구 문화의 이질감을 일찌감치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한 그들의 문화적 적응력과 포용력은 정말 놀랍다. 한때 잠시나마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패전의 쓰라린 상처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음에도 유유히 극복하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그들의 저력은 확실히 높게 평가할만하다.
그 저력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지금의 일본을 만들었는가. 서양인의 눈으로는 모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일본 문화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을 푸는 열쇠는 바로 현대 일본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사무라이 문화’이다. 이케가미 에이코(池上 英子)는 『사무라이의 나라(The Taming of the Samurai)』에서 ‘일본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일본 근대의 국가형성 一 중세봉건 사회에서 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의 이행 ᅳ 과정을 고찰한다. 그 결과 일본 사회에서 사무라이의 명예 개념은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역사적으로 합류한 결과로 생긴 것이며, 이 개념의 문화적 발전이야말로 경쟁과 협조라는 현대 일본의 독특한 문화적 혼합을 만들어 낸 사회적 과정으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결론짓는다.
<武具を身に着けた侍。手彩色写真。元の写真は明治13年(1880年)頃の撮影。/ Kusakabe Kimbei / Public domain> |
‘할복’에서 ‘명예’를 추구하기까지
우리는 사무라이 하면 가장 먼저 그들의 강렬한 명예욕이 떠오른다. 지나가다 칼집만 얼핏 스쳐도 치욕으로 여겨 바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건 혈투로 승부를 내야 직성이 풀린다.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불굴의 투지로 싸움에 임한다. 문학이나 영화의 소재로도 많이 쓰이기도 했던 복수나 결투, 할복 등 폭력으로 명예를 쟁취하는 난폭하면서도 절도 있는 사무라이의 모습은 이방인인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된 사무라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기계적인 계약이나 세간의 평판 때문이 아닌 인격적 • 정서적 유대감으로 주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의 충성스러운 모습은 눈물겨운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사용한 폭력은 자립과 개인성을 추구하던 그들의 불타는 정열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자립과 개인성이야말로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무라이 문화의 근본을 지배한 속성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할복자살은 죽음까지도 스스로 결정한다는 확고부동한 자립성의 최상위 표현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전국(戰國) 시대까지만 해도 폭력은 사무라이가 명예를 획득하는 주요 수단이었으며 폭력 행사 기술의 숙련 정도는 그들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이런 점이 그들을 다른 사회집단과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상하 관계 원리를 기반으로 재편성된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에서는 사무라이들이 사사건건 휘두르는 폭력은 쓸데없는 정치 사회적 긴장만 가져왔다. 쇼군은 사무라이끼리의 사소한 충돌을 규제하고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해 ‘공의(公議)’를 강조했다. 무력이나 그동안 존중해 온 관습이자 상식인 ‘도리’에 의해서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된 사무라이들은 때론 거칠게 반항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새로운 명예문화를 이끌어갔다. 그들은 바쿠후 궁정에서 명예 서열을 높이고자 고군분투했으며 어떤 격한 상황에서도 인내하는 것이 무사의 새로운 미덕으로 떠올랐다.
도쿠가와 국가의 통합적이며 분권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사무라이들은 ‘통제’와 ‘변화’에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유연한 그들의 개인의식은 정치 사회적인 요소와 국가적 요구에 끊임없이 반응해 사무라이 문화를 지속적으로 재편성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 엘리트층의 경쟁적인 개인성과 질서 바른 순응성이 공존하는 도쿠가와 양식의 문화복합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상민들이 양반들의 특권적인 문화를 동경하며 무리하면서까지도 양반들의 관혼상제를 모방하려고 애썼듯 일본 상류층의 사무라이 문화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서서히 피지배층으로 전파되었으며, 현대 일본의 독특한 명예 문화로 이어졌다.
일본 아이들은 패스하고 우리 아이들은 슈팅한다!
‘사무라이’에 대한 책이라고 하면 무사들의 대활약이 난무하는 흥미진진한 책으로 오해하기 쉽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 따라서는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 사무라이의 사회적 역할과 그 역동적인 사무라이 문화의 변화 과정을 역사 사회학적으로 기술한 『사무라이의 나라』는 굉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소 학술적인 면이 강한 내용은 일반적인 교양서적으로 여기고 보이에는 다소 책장을 넘기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물론 중간마다 그 유명한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 등 역사적 예증을 거친 부분은 다소 그러한 부담감을 벗어날 수 있는 짬이 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확실히 보통의 교양서적보다는 다소 난이도가 있으며 두께 역시 만만치 않다. 그래서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는 했다. 사무라이 명예문화를 악용한 군국주의자들 때문에 우리와 더불어 많은 동아시아 민족들이 피를 본 것만 떠올리면 다소 사무라이 명예문화를 예찬하는 듯한 뉘앙스가 조금은 껄끄럽다. 그럼에도, 이 책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유에는 일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금은 웃기게도 책 앞부분에 쓰여있는 「역자 서문」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축구 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본 아이들에게 공을 주면 둥그렇게 늘어서서 패스 연습부터 하고, 우리 아이들은 다 잘 아시겠지만 바로 골대로 가서 슈팅부터 한다. (『사무라이의 나라』, p16)
최근에도 이러한 경향은 여지없이 나타난다. 일본의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패스 축구는 이미 일본 축구의 특성이 되었다. 그에 반해 히딩크 감독 아래에서 달성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한국 축구는 그 어느 색깔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축구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축구 이야기를 꺼낼 만큼 잘 알지도 못하지만, 어찌 보면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상의 비교를 통해 나타나는 양국 간의 차이는 극명하다. 두 나라 다 한자 문화권이며 유교와 불교를 수용했지만 19세기 말, 근대화라는 범세계적인 대세에 적응한 결과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매우 대조적이다. 도쿠가와 시대에 유학자는 현실을 유교에 억지로 꿰어맞추려고 무리하기보다는 거꾸로 유교를 현실에 맞도록 재편성했다. 반면에 조선에서 유교는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위했던 백호 윤휴 같은 개혁가는 처형당할 정도로 매우 교조적으로 뿌리내렸다. 그 결과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과는 달리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망국의 치욕을 겪었다.
퇴행하는 사무라이 문화
사무라이 하면 굉장히 고집 세고 성질 급한 호전적인 무사를 떠올리기 쉽다. 사무라이 시대 초기에는 한때 ‘도당(徒黨)’으로 불리기까지 했을 정도로 사무라이들이 저돌적이고 난폭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를 끝까지 고집했다면 지금의 일본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사무라이 문화의 핵심은 ‘순응’과 ‘변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상황이 그들에게 호의적이건 그렇지 않건 일단은 순응하면서도 사무라이 문화 기저에 흐르는 개인성과 자립성을 추구하는 정열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적 긴장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음에도 결국엔 그 긴장을 변혁의 밑거름으로 끌어올렸다. 그 변혁의 힘은 메이지 유신과 패전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또한, 사무라이 명예 공동체는 경쟁과 협력이 서로 어우러지는 역동적인 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명예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사회적 평가로 결정되기 때문에 ‘세간’에 드러내지는 명예문화를 유지하려면 묵시적으로라도 사무라이들 간 공동의 협의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높은 명예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에서도 사무라이 명예 공동체의 조직력은 유지되었다. 이렇게 경쟁과 협력이 냉정하게 조화를 이룬 사무라이 명예 공동체의 특이성은 서구인에 비친 현대 일본인의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진정한 사무라이 정신은 칼(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세상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여 자립하려는 그 열정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혼란스러웠던 전국 시대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맞이한 평화로웠던 도쿠가와 시대에 맞게 문화적 재설정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사무라이의 본질은 무사다. 전쟁이 없었던 시대에도 그들은 항상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님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적 신분을 과시했다. 그러나 평화로웠던 도쿠가와 시대에는 칼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좀이 쑤셨던 것일까. 그들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사무라이 문화의 예견된 부작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무라이 문화가 일부 지배층에 의해 오용되면서 진정한 사무라이 문화는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케가미 에이코는 “자신의 육체와 생명을 스스로 지배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도덕적 행동과 결단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사무라이 명예문화가 태어났다.”라고 말했듯 패전 후 모르쇠로 전쟁 책임을 회피해 온 일본에 남아있는 사무라이 문화는 진정한 사무라이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날조되고 조각난 사무라이 문화의 명백한 부작용이며 오용이다. 일본이 다시 한번 진정한 사무라이 문화를 꿈꾸고 싶다면 일단은 깨끗하게 과거 청산부터 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스스로 치욕과 불명예를 맞아들이는 것이자, 한편으론 명예스럽게 일생을 살다 갔던 진짜 사무라이 무사들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시아와 일본의 역사 인식 차이의 엄청난 괴리감을 극복하고 진정한 탈아시아적 평화를 추구하려면 일본을 지배했던, 그리고 지배하고자 하는 사무라이 정신의 사회정치학적 변천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세밀한 일본 이해하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사무라이 명예문화의 본질은 논리적이고 정서적으로 상호연관은 있지만, 각각 분명히 다른 상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화복합체였다. 그것은 다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의미 자체는 명예의 정서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다면적인 문화복합의 중심에는 평판에 민감한 의식이 있었고 이것이 차례로 개인의 자기인식이나 자존심 속에 깊게 내면화되었다. 따라서 사무라이 명예문화는 광범위한 정서와 관념을 포함하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나라』,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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