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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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일반 볼륨' 장치를 지금 중지할 수 없습니다 …….

가끔 USB 외장 하드나 USB 메모리를 컴퓨터나 노트북에서 안전하게 분리하려고 하면, "'일반 볼륨' 장치를 지금 중지할 수 없습니다.(Windows can't stop your 'Generic volume' device)"라는 경고가 떠서 곤란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냥 분리하면 자료 손실이나 외장 메모리의 물리적 손상까지 입을 수 있기에 섣불리 손댈 수도 없다.

이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면 실행 중인 모든 창을 닫고, 그래도 안 되면 explorer.exe를 강제 종료하고 나서 [작업 관라자]를 열어 [새실행]에서 explorer.exe를 재실행하거나 백신의 실시간 감시를 끄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그래서 로그오프/로그온을 해도 안 되면 할 수 없이 컴퓨터를 종료하거나 재부팅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해결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관리도구]-[디스크 관리]를 열어서 아래 그림처럼 외장 저장 장치에 해당하는 디스크를 클릭해서 선택한 다음, 빨간 네모 칸 위에서 마우스 우클릭으로 메뉴를 연 다음, [오프라인]을 클릭해서 외장 디스크를 윈도우에서 내린다. 이는 논리적으로만 윈도우에서 분리된 상태이다. 당연히 탐색기에서도 안 보인다.

위 작업이 성공하면 다시 마우스 우클릭 메뉴에서 [온라인]을 클릭해서 살린 다음, '하드웨어 안전하게 제거" 를 실행하면 깔끔하게 분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최종 작업을 하기 전에 외장 저장 장치에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종료하고 해야 데이터 손실이 없을 것이다. 긴가민가하면, CMD.exe로 명령 프롬프트 창을 열고,

chkdsk g: /f
('g'는 외장 저장 장치의 탐색기에서 표시되는 드라이브 이름)

구문으로 디스크 검사를 실행하여 혹시라도 남아 있는 연결을 안전하게 분리할 수 있다.

이 리뷰는 2013년 12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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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책 리뷰] 정사에 실리지 못한 궁중의 뒷이야기 ~ 한중록(혜경궁 홍씨)

book cover
review rating

정사에 실리지 못한 궁중의 뒷이야기

원제: 閑中錄 by 惠慶宮 洪氏

세자빈의 꿈

선시대 후기, 영조 20년(1744)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이듬해 10살이 되면서 동갑내기 남편이자 세자가 있는 궁중으로 시집을 와 순조 15년(1815)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년의 세월을 조선 권력의 중심이자 핵심인 궁중의 모진 풍파 속에서 살아간 한 여인이 있다. 바로 『한중록(閑中錄)』의 저자이자 지금까지도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조선 제22대의 왕인 정조의 어머니이고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의 할머니이기도 한 혜경궁 홍씨이다.

훗날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자들 주위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내게 될 혜경궁 홍씨는 가족과 함께 큰 탈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를 떠나 가마를 타고 궁중으로 들어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소하고 엄격한 궁중 생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남편이 영조의 뒤를 이어 당당한 조선의 왕이 되면, 자신은 그 시대 여자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중전, 즉 조선의 국모인 왕비가 되는 부푼 희망과 설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오래 살아 욕심을 부린다면 임금의 어머니인 왕대비가 되는 생각도 해보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아마도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 반 걱정 반에 작은 두 손으로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감싸면서 남몰래 눈물도 흘리며 한숨지었으리라.

보통의 백성이라면 한낱 꿈으로만 끝났을, 아니 생각만으로도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을 이러한 일들이 그녀에게는 그저 꿈만은 아니었다. 바로 눈앞의 현실과 미래에 닥친 일이었고, 그녀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모든 것이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그녀는 조선의 국모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었다면 조선의 최고 문학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중록』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현실과 미래는 그녀가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순조롭고 평화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리가 먼 것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누구도 겪지 못했을 혹독한 시련을 그녀에게 무책임하게 떠넘겨주었다. 그 시련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행복과 권력을 주어야 했을 남편에게서 왔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묻힌 그녀의 꿈, 그리고 가문의 몰락

린 시절부터 계속된 남편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와의 불편한 관계, 이로 말미암은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자신의 남편을 달래면서도 그런 불행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 그녀에게 닥친 첫 시련이었다.

결국, 남편 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 한여름에 뒤주에 갇혀 굶어 죽는 참사를 당하고, 그녀의 첫 번째 꿈은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가고, 동시에 또 한 번의 가혹한 운명의 시련을 만난다. 그 시련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목숨과 하나뿐인 아들 세손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와는 달리 눈치 빠르고 민첩한 세손에게 마음이 기운 상태였고,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이나 사도세자의 친모 선희궁, 영조의 사랑을 받고 있던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 등이 세손과 혜경궁 홍씨를 편들어 일단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무사히 모든 것이 넘어가고 세월이 눈 감아 준다면 세손이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라도 된다면 왕비가 되는 꿈은 이미 저 산 넘어 저물었을지언정, 여전히 왕대비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혹시 또 몰랐다. 어린 세손을 남기고 연로한 영조가 이대로 승하한다면, 자신은 왕대비로서 발을 치고 정사를 펼치는 수렴청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2년 후인 영조 40년(1764) 2월, 세손을 오래전에 죽은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대를 잇게 하라는 하교를 내린다. 하루아침에 혜경궁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생전 본 적도 없는 아주버님에게 빼앗기고, 그렇게 그녀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은 그나마 세손이 무사히 왕위를 이어주는 것뿐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세손에 문제가 생겨 사도세자의 서자가 왕이 된다면, 과거 폐비 사건이 있었듯이 그녀가 궁에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말이지 궁중 생활은 비정함 그 자체였다. 그나마 까다롭고 변덕이 심한 영조가 세손만은 애지중지하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칠 줄 몰랐다. 아버지 홍봉한은 ‘뒤주를 가져다 놓았다.’, ‘은언군 • 은신군(정조의 이복동생)을 추대하려 한다.’라는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끝내 역적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고,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친아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삼불필지(三不必知)’가 문제가 되어, 역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다. 그리고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한 혜경궁의 가문을 그녀가 칠순이 되는 1804년에 모든 걸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녀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아들 정조마저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갑작스레 승하한다. 그리고 손자 순조가 그 뒤를 이었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자신과 적대적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면서 셋째 동생 홍낙임마저 천주교 신자로 몰려 사사된다.

한도 풀고 가문의 죄도 발명하고

녀가 자랑스러워 하고 애지중지했던 가문이 이렇게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에 엮이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몰락의 처참한 과정을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그녀의 한 맺힌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기록이 바로 『한중록』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작품을 읽을 때는 혜경궁의 정치적 의도에 너무 휘말리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지만 그녀가 정적들에게 수없이 당한 공격과 그로 말미암아 품게 된 원한 등이 알게 모르게 작품 곳곳에 깊숙이 배여 있기 때문에 그녀의 정치적 견해와 그녀의 가문에 대한 변명은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과 오빠를 비롯한 남동생들에 대한 (읽는 이로 하여금 반감을 품게 할 정도로 지나친) 극찬의 연속은 앞서 말한 내 의견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한 예를 들어 그녀는 “ … 내 여편네로 오래된 역사는 모르지만, 우리 조선 사백 년 역사에 아버지의 공처럼 큰 공은 없으리니 ….”라고 말하면서, 아버지를 조선 최고의 신하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 가문의 남자들은 정말 대단한 능력과 재능의 소유자들이며 청렴결백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실록에 적힌 ‘홍봉한의 졸기’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몇 자만 살펴보자.

“ …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왕실의 지친(至親)임을 가탁하여 특별히 영종의 위임(委任)을 받았으므로 … 10년 동안 정권(政權)을 잡고 있으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였으며 선류(善類)들을 미워하여 은밀히 중상(中傷)당한 사람이 많았다. 아들 셋과 아우 둘이 모두 조정에 포열(布列)되어 권병(權柄)을 농락하여 마구 휘둘렀는데, 권세의 기염이 대단하여 감히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 (『정조실록』, 정조 2년 12월 4일)

혜경궁의 주장과는 너무나도 다른 평가이다.

정사에는 실리지 못한 역사의 뒷이야기

런 단점에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시대 궁중과 명문가의 생활과 정치적 사적 배경까지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실록 같은 정사에서 어떠한 이유나 우여곡절로 기록할 수 없었던 사건과 사실에 대한 보충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영조 47년(1771) 2월 5일에 영조는 갑자기 국가의 형세가 위급하다며 궁성 호위령을 내린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후궁이었던 양재 임씨와 그녀가 낳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 은신군 집안의 사람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실록에서는 이렇다 할 글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혜경궁은 이 사건의 발단을 그해 정월 그믐께 있었던 ‘밤 사건’ 때문이라고 말한다.

궁중에서는 해마다 정월 보름에 동상(東山: 창덕궁 후원에 있던 작은 산)의 밤을 따 각 궁전과 군주(郡主)들까지도 나누어 주곤 했는데, 그해에는 그 밤이 인(은언군)이와 진(은신군)이 형제에게도 간 것 때문에 영조는 급한 변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화를 내며 궁성 호위령을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에는 홍봉한이 인이와 진이와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었고, 혜경궁은 이 소문에 대해 아버지는 단지 그들이 경모궁(사도세자)의 골육이니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만약 영조가 홍봉한이 인이와 진이 형제를 추대하려고 한다는 소문과 ‘밤 사건’을 연관지어 궁성 호위령을 내렸다면 결국 인이와 진이 형제에게 밤을 가져다준 사람은 홍봉한이거나 그의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2월 5일에 영조는 뜬금없이 궁성 호위령, 즉 지금의 계엄령을 발동하고 정승과 승지의 청대를 거절하다가 2월 9일 홍봉한을 청주목에 부처시키고, 인이와 진이 형제는 대정현에 안치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홍봉한에게 내려진 명령은 혜빈(혜경궁)을 위한 것이라며 며칠 후 환침된다.

한때 궁궐을 휩쓴 ‘밤 사건’ 소란은 『한중록』을 통해서나마 그 원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궁중 뒷얘기를 통해 실록 같은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아니 기록할 수 없었던 임금의 세세한 언동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짐작건대 숙종에게 있었던 가끔 ‘욱’ 치밀어 오른다는 화병 비슷한 것이 영조를 통해 사도세자에게 유전되어 그러한 비극의 종말을 맞게 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중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명해지기보다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노인네로 변모해 가는 노년의 영조 모습을 쉽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영조는 때로는 지나친 엄격함으로, 때로는 관대함을 넘어선 수수방관으로 아들을 대했고 그러한 변덕스러운 아버지 밑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자학했을 사도세자의 고통도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을 매정하게 아사로 몰아세웠던 그 순간의 영조는 또 한 명의 사도세자였을지도 모른다.

영조는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였을까?

았던 화가 치밀어 올라 순간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영조 스스로 변명하기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주림과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순간은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에 임금을 설득해 죽어가는 세자를 구원해 주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영조의 성격은 불 같은 면이 있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아버지 김한구가 홍봉한을 공격하면서 ‘영조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아도 화를 잘 내는데 술까지 마시면 어떻게 되겠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조가 신하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신하들은 감히 말은 하지 못했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이 어떤 면에서 영조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었다고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조나 사도세자나 백성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성군의 모습을 보였을지는 몰라도 매일 마주 대하는 신하와 궁성 근무자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하고 바로 후회를 했다. 처참한 아들의 시신을 보고서야 화가 가라앉고 정신이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영조 또한 얼마나 참혹한 심정이었을까. 혹은 영조가 앓고 있던 정신적 질환은 누군가를 괴롭히면서,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끼는, 일종의 도착증 비슷한 정신적 질환은 아니었을까. 비록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스스로 불러온 화 때문에, 바로 광증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누누이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과 영조, 아버지 홍봉한, 친어머니 선희궁 등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애써 변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옮긴이 정병설 교수가 책 속에서 대충 얼버무릴 때 쓰는 말처럼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이다. (참고로 ‘납득’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로 ‘이해’라고 쓰면 좋을 것이다.)

‘광증’을 앓는 세자는 쉬운 먹잇감이었을까?

도세자는 뚜렷한 광증이 있었기 때문에 적들에게 쉬운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과 실제로 그런 이유로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 등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이들이 노론의 음모에 의해 그러한 일을 꾸민 것인지, 아니면 사적인 원한이나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노론의 ‘택군(擇君)’에 의해 왕이 된 영조와 치세 초반과는 달리 중후반으로 갈수록 노론으로 권력의 무게가 옮겨지면서 무용지물이 된 영조의 탕평책, 훗날 일어나는 정조 암살미수 사건과 선대 임금인 효종이나 현종, 경종의 의심스러운 죽음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서인이나 그들의 후손인 노론에게 왕은 단지 ‘선택’일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소론 대신 조재호를 불렀다. 이것만으로 평소 소론과 남몰래 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노론과 처가에서 버림받은 사도세자가 도움을 구할 수 있었던 곳은 노론과 적대적인 소론뿐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노론은 평소 그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사도세자의 광증이 훗날 그대로 왕이 되었을 때 노론에게 어떤 불행을 안겨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역대 수많은 사화를 통해 보았듯이 왕이나 권력을 가진 무리가 마음만 먹으면 수십 명쯤 저세상 보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고, 노론은 경종 때 목호룡의 고변으로 일어난 신임사화로 처참한 죽음의 패배를 맛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소론에게 빈틈을 보이면 어떤 화가 닥치는지 노론은 뼛속 깊숙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광증’을 앓는 세자는 쉬운 먹잇감이다. ‘화를 잘 내는 왕을 자극해서 아들을 죽이게 한다.’라는 ‘완전범죄 시나리오’가 기다리는 것이다. 정말 영화나 추리소설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이야기이지만, 고사를 보는 독자라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는 고사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일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영화보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것이 바로 고사다. (‘역사’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그래서 ‘고사’라는 말을 써봤는데 조금 어색하긴 하다. 참고로 ‘역사(歷史)’라는 한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면서...

무튼, 영조는 왕위와 권력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친아들을 독살한 인조에 이어 어떤 이유가 되었건 역시 친아들을 아사시켰다는 조선사에 길이 남을 불명예를 가지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 최고의 폭군이라고 불리는 연산군조차 천수는 누리지 않았던가. 비록 제 마음에 차지는 않는 자식이지만, 제 손으로 친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심지어 친어머니까지도 아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비극적인 상황은 도대체 어떠한 상황이었을까? 또한, 왜 혜경궁의 기록에는 병을 앓기 시작한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간호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혜경궁은 남편이 일을 저지르고 나면 기억을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혹시 사도세자는 다중인격자 비슷한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리뷰는 2013년 12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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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1일 금요일

[책 리뷰] 내 마음속 소중한 ‘작은 악마’ ~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바스콘셀로스)

내 마음속 소중한 ‘작은 악마’

원제: O meu pe de laranja lima(My Sweet Orange Tree) by Vasconcelos, Jose Mauro de
"마음속에 정말 악마가 있나 봐요. 충동이 일면 참을 수가 없거든요. 이번 주엔 에우제니아 아줌마네 집 울타리에 불을 냈어요. 꼬르델리아 아줌마한테는 안짱다리라고 했더니 화를 불같이 냈어요. 또, 헝겊 공을 찼는데 그 바보 같은 공이 창문으로 날아가서 나르시자 아줌마네 큰 거울을 깨버렸어요. 그리고 새총으로 전등을 세 개 깼고, 아벨 아저씨네 아들 머리에다가 돌도 던졌어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중에서)

빠가 일자리를 잃은 제제의 가족은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산다. 엄마와 누나들은 새벽같이 공장에 다니거나 집안일을 돌보느냐 바쁘고, 축 처진 어깨에 시무룩한 아빠는 멍하니 허공만 쳐다볼 뿐이다.

다섯 살의 제제는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동생 루이스의 손을 잡고 상상의 동물원으로 데리고 가면서 다정한 형이 되기도 하지만, 짓궂은 장난으로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매를 벌고 욕을 먹는 것 또한 제제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제제의 주변 사람들은 제제가 자신도 모르게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장난을 치는 것만을 보고 ‘악마의 자식’이라고 부르며 때리고 화를 내기만 한다. 이런 고달픈 사연을 안고 사는 제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열다섯 살의 글로리아 누나와 제제가 밍기뉴라고 부르는 라임 오렌지나무뿐이다.

그러한 제제에게 어느 날 진실한 사랑과 우정을 깨우쳐주는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제제가 자신의 차에 매달리는 위험한 장난을 치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제를 꾸짖어 제제에게 창피를 준 것 때문에 한때 제제의 원수가 되기도 했고, 또한 동네 아이들에게는 뚱뚱하고 험상궂은 외모 때문에 식인종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제제의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은 포르투갈 남자이다.

그는 자신의 좋은 차를 타고 제제와 드라이브를 즐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제가 사랑에 굶주리다 지쳐 자포자기한 상태라는 걸 깨닫고는 제제에게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을 베푼다. 그리고 제제가 하루하루를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탐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정도로 호기심에 가득 찬 조숙하고 영리한 아이임을 깨닫는다.

제야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었다. 지금까지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빌려 보면서 이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빼먹은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갓 볶은 따뜻한 원두의 그윽한 향기 같은 가슴 뭉클하고도 진한 감동과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지금 노트북 앞에 앉아 후기를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착하고 얌전한 사랑스러운 동생 루이스를 작고 야윈 다섯 살의 제제가 다정하게 돌보는 모습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내 눈은 촉촉하게 젖어온다.

제제는 다섯 살에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글을 깨우쳤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이는 학교에서의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도 나타난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러한 제제를 격려하고 기특해하기는커녕 그 재능조차 악마가 준 것이라고 험담할 정도로 제제를 편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물론 제제가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장난은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하게 볼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제제의 장난에는 누구에게 악의를 가지고 골려주겠다는 목적의식 없는, 그냥 보통의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재미삼아 하는 그러한 장난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제는 낡은 검정 스타킹을 뱀처럼 보이게 해서 길 가던 여자를 놀래주지만, 그 여자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알고는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잘못될까 하는 후회와 걱정을 넘어서 두려움에 떠는 모습에서 제제의 마음 깊은 곳에는 다정함과 따뜻함이 듬뿍 담겨 있는 천성은 착한 아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제제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듯이 가끔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자신도 모르게 장난을 치는 겉모습만을 본다. 그러니 그 평가는 공정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가난에 지치고 지친 어른들은 잔인하게도 어린 제제를 동네북 두드리듯이 때리고 악담을 퍼부으며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한 화풀이 상대로 전락시켜 버린다. 제제가 키가 크고 날씬한, 무엇보다 노래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일자리를 잃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취직을 못 하고 늘 기운 없이 축 처진 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래서 가엾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아빠에게서조차 매를 맞는 상황이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면서 독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이렇게 제제를 사랑해주고 아껴주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사랑보다는 미움을 받는 제제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환상과 상상의 나라뿐이다. 그리고 외로운 제제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말동무는 새로 이사한 집 뒤에 있는 라임 오렌지나무이다. 그러나 라임 오렌지나무는 상상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동무를 넘어 서로 교감을 통한 사랑 같은 실질적인 감정을 주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순간에 제제에게 나타난 구원의 천사는 제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친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까이 사는 이웃도 아니고 더군다나 또래도 아닌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은 포르투갈 남자이다.

포르투갈 남자가 제제의 조숙한 재능을 인정하듯이, 역시 제제와 제제의 가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학교의 담임선생님만이 제제의 우수한 재능과 자신보다 더 가난한 친구에게 자신이 가진 빵을 나누어 주는 따뜻한 마음을 알아주고 칭찬해준다. 아이러니하게 가족에게서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 칭찬을 전혀 예상치 못한 제삼자에게 받아야 하는 제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자신의 텅 빈 운동화를 보고 순간 참지 못하고 제제는 외친다. “아빠가 가난뱅이라서 진짜 싫어!”라고. 하지만 곧 제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말을 지나가다 우연히 듣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 아빠를 위로해주기 위해 구두닦이 통을 들고 온 시내를 돌아다니며 반은 구걸하다시피 하여 마련한 담배를 아빠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훗날 그러한 아빠에게 사소한 오해로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가죽 혁대로 얻어맞아야 했던 다섯 살 제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들은 가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에 잠깐 참지 못하고 넘어가 짓궂은 장난꾸러기가 되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면 마음 편하게 악마에게 영혼을 몽땅 팔아 버리고 자신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작은 악마’는 사소한 장난으로 끝나지만, 이 ‘작은 악마’가 자라 완전한 뿔이 달린 ‘어른 악마’가 되면 더는 장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멈출 수 없는 광기와 끊임없는 욕망으로 부풀어 올라 전쟁과 기아, 죽음과 파괴를 낳기도 한다. 어찌 보면 제제는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해 있는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정말 인간다운 인간이다.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어른들은 솔직하게 제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세속적이며 자존심이 강하다. 그래서 제제는 예수처럼 수난과 멸시를 당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제제는 스스로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는 자신을 끊임없이 뉘우치고 반성한다. 그리고 포르투갈 남자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통해 사랑과 이별, 죽음을 알게 되면서 철이 들게 된다. 이제 제제의 마음속에서 라임 오렌지나무는 잘려나가며 멋진 카우보이와 인디언들의 환상과 상상의 나라와도 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일찍 어른이 된 제제는 묻는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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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0일 일요일

[책 리뷰] 사형된 혁명 전 과거에 대한 편집증적 향수 ~ 사형장으로의 초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사형된 혁명 전 과거에 대한 편집증적 향수

원제: Priglasheniye na kazn'(Invitation to a Beheading) by Vladimir Nabokov
“시계의 숫자판은 비어 있지만 30분마다 간수가 옛 바늘을 지우고 새 바늘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렇게 색칠된 시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계 소리는 보초가 내는 것이고,그래서 그는 보초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사형장으로의 초대』 중에서)

소련 문학 몇 작품을 읽다 보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긍정적인 체제로 표현한 작가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한 작가도 만나게 된다. 앞의 작가에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막심 고리키가 대표적으로 할 수 있고, 그 반대편에는 『수용소군도』의 솔제니친, 『우리들』의 예브게니 자미아틴, 그리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구덩이』 등이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 역시 자신의 가족이 망명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인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가져온 이질적인 사회 풍조에 대한 불만이 드리워진 작품이 아닌가 싶다.

명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혼자만 투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은 작품의 주인공 친친나트의 감옥 생활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상상, 그리고 내적 불만 표출을 위한 글쓰기가 주요 일과이다. 그에게는 현존하는 모든 사물이나 인물들이 ‘무의미한 환영, 불쾌한 꿈, 쓰레기 같은 헛소리, 악몽의 잡동사니’이다. 그래서 이러한 허구의 세계에서 탈출하려면 ‘이론적으로 잠에서’ 깨어나야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형집행인 므슈 피에르의 도움으로 죽음을 통해 그는 마침내 허구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자신이 꿈꾸던 모든 자유가 보장된 세계로 나가게 된다.

작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친친나트는 구소련 사회의 무엇이 그렇게도 불만이었을까.

부유한 귀족 출신의 작가는 혁명이 가져온 가문의 몰락과 공산주의 사회가 가져온 전체주의적인 삶, 즉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보다 집단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집단화되고 획일화된 사회가 가져온 경직된 분위기와 사회적 냉대 속에서는 더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더불어 혁명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과 작가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에 암살당한 사실도 그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아쉬워하지 않았고 ‘과거’에 대한 이해 자체도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렇게 그는 과거에 애착과 미련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가 잊지 못하는 과거는 혁명 이전의 러시아이다. 즉 그는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부유한 귀족 계층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귀족이 볼 때 노동자와 농민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어서 벌거벗은 투명한 존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는 자유보다는 당장 눈앞의 끼니와 추위에 대한 걱정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부유한 귀족 출신의 작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영글지 않은 예술에 대한 섣부른 욕구는 때로는 배부른 자의 오만과 허영으로 보일 수 있다. 같은 귀족 출신인 톨스토이 백작과는 사뭇 다른 관점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바라본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며 외롭고 고달픈 오랜 망명 생활에서 오는 억울함과 지친 몸과 마음을 러시아 혁명 이전의 과거를 기억하고 되살리는 것을 넘어, 글쓰기로 재가공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한다. 그가 러시아 어를 버리고 영어를 선택하며 미국 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했지만, 죽는 그 날까지 정착하지 않고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호텔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결국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향을, 혁명 이전 러시아를 애타게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독자가 쉽게 읽으면서 즐겁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어쭙잖게나마 후기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도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설을 보고 조금은 특이하게 작가의 귀족 출신을 작품과 연결지어 본 것이다.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그러한 특별한 과거가 있었기에 과거와 기억, 그리고 상상을 재가공하여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불행한 과거는 친친나트의 사색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 나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표현하기가 너무 어렵다! 아니, 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친친나트의 고뇌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유럽으로 망명하기 전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렇게 정당하게 표출하지 못하고 쌓이고 쌓인 억압된 재능은 작가에게 심적 부담과 표현의 갈증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러한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간수의 열두 살 딸인 말괄량이 소녀 엠마치카는 서른 살의 유부녀 친친나트의 품에 안기며 자신과 같이 감옥을 탈출한 다음 결혼하자고 고백한다. 훗날 『롤리타』를 예상한 심오한 한 수였을까.

이 리뷰는 2013년 10월 2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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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책 리뷰] 역사 속 화가의 미스터리에 추리 소설적 상상력을... ~ 샤라쿠 살인사건(다카하시 가츠히코)

역사 속 화가의 미스터리에 추리 소설적 상상력을 접목시킨

원제: 寫樂殺人事件(The Case of the Sharaku Murders) by 高橋克彦(Katsuhiko Takahashi)

본 우키요에(일본의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에 서민 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의 한 양식, 두산백과)의 권위자 니시지마 교수의 유일한 경쟁자이자 재야 우키요에 학자인 사가 아츠시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경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살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던 어느 날 니시지마 교수 밑에서 우키요에를 연구하는 츠다에게 사가의 처남을 통해 우연히 화집 한 권이 들어온다. 그런데 그 화집을 살펴본 츠다는 그 화집 안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샤라쿠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여 10개월 동안 14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추어진 우키요에 화가였다. 츠다는 샤라쿠의 최고 권위자인 니시지마 교수의 동의와 격려 속에서 직접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던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일본 미술계를 떠나 전 세계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학설을 자신이 발표하기에는 학계에 전혀 이름이 없었던 츠다는 결국 샤라쿠의 최고 권위자인 니시지마 교수의 설득에 넘어가고 츠다는 자신이 그동안 조사하고 발견한 모든 것의 결정체인 논문과 함께 화집, 그리고 새 학설 발견의 명예와 영광 모두를 교수에게 양보한다.

그런데 화집 발간을 얼마 앞두고 한창 주가를 올리던 니시지마 교수는 저택에서 일어난 화재로 화집과 함께 세상을 떠나고 경찰은 조사결과 지난번 사가의 경우처럼 자살로 처리한다. 그러나 지난번 사가의 사건부터 의문을 품고 니시지마 교수 사건까지 따라온 오노데라 형사와 츠다는 서로 협력하여 두 우키요에 권위자의 잇따른 죽음에 의문을 품고 그 뒤에 숨겨진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와 비열한 배신의 거대한 그림자를 추적하면서 조금씩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드러난 진실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과 충격의 시한폭탄이었는데… .

리소설 『샤라쿠 살인사건』은 일본 에도 시대 실존했던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이자 지금도 여전히 정체불명인 도슈사이 샤라쿠의 정체를 추적하는 주인공 츠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일본 에도 시대 문화와 그 당시 정치에 낯선 한국 독자에게는 조금은 버거울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샤라쿠 살인사건』의 뒷부분에는 추리소설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색인과 페이지 곳곳에 많은 양의 각주가 들어 있다. 보통의 추리소설을 생각하며 머리를 식힐 겸 가볍게 책장을 펼쳤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있다. 참고로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샤라쿠 살인사건』은 일본의 주간문춘 선정 20세기 걸작 미스터리 베스트 8위에 오를 만큼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이 중에서 내가 읽어 본 것은 2위 화차(1992, 미야베 미유키, 한국과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된 두 편을 모두 보았지만, 아직 책은… .), 4위 점성술 살인 사건(1981, 시마다 소지), 7위 이유(1998, 미야베 미유키), 17위 내가 죽인 소녀(1989, 하라 료) 정도뿐이다.

마도 단순히 추리소설의 재미를 넘어서 일본 최고의 우키요에 화가인 샤라쿠의 정체를 추리소설 소재로 삼은 점과 그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기존의 여러 학설에 대한 작가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명쾌한 반론, 그리고 『샤라쿠 살인사건』의 주인공 츠다를 통해 새로운 가설로 샤라쿠의 베일을 벗겨 내려는 참신한 시도 등이 크게 주목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지만, 그럼에도 역시 전혀 예상 못 한 마지막 반전은 역시 추리소설이 독자에게 제공해야 할 기본적이자 필수적인 조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졌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초반에는 샤라쿠에 대한 학설을 조금 비중 있게 다루다 보니 전개도 느슨하고, 나처럼 에도 시대와 우키요에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는 조금은 고역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상파에 영향을 미쳤다는 우키요에에 대해서 이 기회에 대충이나마 배운다고 위로하며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하면 그 뒤에 기다리는 작가가 준비한 보상은 앞의 모든 지루함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샤라쿠의 실제 작품은 네이버 지식백과 또는 구글 이미지에서 ‘토스사이 사라쿠’나 ‘샤라쿠’ 등으로 검색하면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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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2일 토요일

[책 리뷰] 밑바닥 인생의 진솔한 토로 ~ 고역열차(니시무라 겐타)

추천하는 책

밑바닥 인생의 진솔한 토로

원제: 苦役列車 by 西村 賢太
뿌리가 그런데다 후천적으로 다른 사람과 사귀는 일에 일종의 체념과 두려움 같은 것을 지닌 채 인격 형성기를 지내버린 그에게는 어차피 백 명의 친구보다 한 잔의 술이 훨씬 더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오로지 물질적인 것에서 곤란을 느낄 따름이었다. (『고역열차』, 47쪽)

벽 일찌감치 동트기 전에 집에서 간단하게 몸을 풀고 집을 나와 한강 둔치에 있는 생태공원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면, 요즘 같은 아침저녁으로 쓸쓸한 계절에는 그제야 희미하게 날이 밝기 시작하고, 아파트 후문에 있는 사거리 한 모퉁이에는 허름한 복장에 운동화나 작업화를 신고 배낭을 멘 아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문을 보는 사람, 멀거니 서 있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등 그들의 가지각색의 모습에서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일용할 양식을 위한 일터로 데려다 줄 차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들을 조금 치켜세우면 우리 사회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접이나 관심을 못 받는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쉬고 편하게 잠을 자는 집과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지어 주었고, 우리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도록 반듯한 길과 쭉 뻗은 도로를 닦아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가 필요한 상품을 날라다 주었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과 전기, 그리고 가스를 집까지 공급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지어주었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것, 발을 디디는 곳, 어디 하나 빠짐없이 그들의 땀과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 그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가 문득 이런 감상적인 생각을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니시무리 겐타의 『고역열차』를 읽고, 그들의 황량한 뒷모습에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간타가 아침 일찍 회사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그날그날 바뀌는 작업 장소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야마 가타이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실격』의 다자이 오사무로 완성된 일본 특유의 사소설(私小說)의 전통을 이었다는 니시무라 겐타. 그래서 그의 작품 『고역열차』는 그가 중학교 졸업 후 집을 나와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온 처절한 삶의 황량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게 작가의 치부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방끈 짧았던 작가의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그대로 담은 『고역열차』는 독자에 따라서는 불쾌감과 동시에 거부감을 안겨줄 수도 있는 진솔한 작품이다. 솔직히 한낱 실마리 같은 희망하나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하루살이 같은 고달픈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거기에는 행복한 결말도 없고 더는 떨어질 곳도 없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표지 안쪽에 실린 한 성격 할 것 같은 작가의 사진을 보면, 순탄치 않음을 넘어 작품의 제목 그대로 작가의 험난한 인생을 고역스런 열차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달려온 고행 같은 삶의 흔적이 느껴진다.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로서는 막심 고리키의 단편집 등 다수의 작품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작품들과 니시무라 겐타의 『고역열차』 분위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니시무라 겐타의 소설에는 꾸밈이나 과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독자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희망도 없다. 아니 애써 희망을 품으려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진정한 밑바닥 하루살이 인생이 아니겠느냐는 식이다. 『고역열차』를 읽는 내내 나는 40년 넘은 으슥하고 허름한 공동주택을 혼자 떠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나사 한두 개를 넘어서 수십 개는 빠진 듯한 축 처진 어깨와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듯한 유령 같은 몰골로 복도에서 마주치는 말이 없는 주민들, 재래식 공동화장실에서 공동주택 구석구석으로 풍기는 방문자에게 충격을 넘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끔찍한 악취. 그래서 그럴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꼭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제대로 뒤처리를 하지 않은, 뒤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다.

래도 난 『고역열차』를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을 보고 그나마 내 삶은 다행이라 여기는 나약한 자의 염치없는 감상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품 속의 주인공 간타가 외줄 타기 같은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패배자의 인생이라고 낙담하면서도 구차스럽게나마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이 나태하고 우유부단으로 점철된 나의 게으르고 염치없는 삶보다 훨씬 값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읽지 않고 도중에 포기한다는 것은 왠지 작가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죽을죄를 저지르는 것 같은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조금은 험상궂어 보이는 작가의 사진 때문일까. 꿈에서라도 작가가 날 찾아와 흠씬 두들겨 패줄 것 같았다. ‘포기할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를 말지 뭐하러 읽었느냐.’라고 꾸짖으며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툭하면 시비를 걸고 짜증도 잘 내지만 그런 불량배기질을 끝까지 밀어붙일 배짱이 턱없이 부족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소심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간타의 처량하고 쓸쓸한 뒷모습에서 진정 내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책을 덮고 후기를 다 쓴 지금도 영 뒤가 개운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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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5일 토요일

[책 리뷰] 풀어야 할 ‘오해’, 풀지 말아야 할 ‘오해’ ~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노리즈키 린타로)

풀어야 할 ‘오해’, 풀지 말아야 할 ‘오해

원제: 生首に聞いてみろ(THE GORGON'S LOOK) by 法月 綸太郎

‘일본의 조지 시걸’이라고 불리는 전위 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가 오랫동안 공백을 깨고 회고전을 준비하던 준 지병인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미모의 외동딸 에치카를 라이프캐스팅 기법으로 모형을 뜬 전신 석고상이었고 이 작품은 21년 전 에치카의 어머니이자 조각가의 전처인 리쓰코가 에치카를 임신했던 모습을 모델로 한 ‘모녀상’ 시리즈의 완결판이었다. 그런데 이 ‘에치카 조각상’의 얼굴 부분이 절단되어 묘연히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각가의 동생 아쓰시의 부탁으로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가 조각상 도난 사건에 끼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카마저 실종된다. 그리고 그녀의 절단된 머리만 가와시마 이사쿠의 추모전이 열릴 예정인 미술관으로 보내지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석고상 머리 도난 사건은 예고 살인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16년 전 조각가 부부와 리쓰코의 동생 유코 부부들 간에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각관계와 유코의 자살이 에치카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걸까.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조각가가 완성한 석고상의 머리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은 작가의 이름인 노리즈키 린타로이고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인 주인공의 아버지는 경찰관이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이 같고, 탐정의 아버지가 현직 경찰관! 이쯤 되면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독자와의 대결’로 유명한 본격파 추리소설 작가의 거장 ‘엘러리 퀸’이다. 참고로 ‘엘러리 퀸’은 필명이고 실제 작품을 쓴 작가는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이고 두 사람은 사촌 형제 사이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 또한 엘러리 퀸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하니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마니아에게는 마냥 반가운 작품이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리 퀸의 수사 방식, 즉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이곳저곳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실수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하나하나씩 잘못된 단서들을 제거해나간 끝에 결국 정제된 하나의 또렷한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 또한 다름이 없다. 거기에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일반 대중이 가까이 가기에는 조금은 먼 조각이라는 예술의 세계, 그중에서도 조각가가 석고상의 ‘눈’을 표현하는 어려움과 조각으로 표현한 ‘눈’의 의미에 대해 조각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 있어 한층 독자의 지식을 넓힐 기회도 주고 있다.

래도 추리소설 하면 역시 트릭을 빼놓지 않을 수 없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독자가 무심코 읽고 지나갈 수도 있는 페이지 여기저기에 복선이 깔려 있다. 그리고 나중에 사건 주변 인물들 간에 뒤엉킨 오해가 서서히 밝혀지고 풀리면서 독자는 무심코 흘려보낸 복선을 떠올리고 전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복선을 관통하는 핵심은 작가도 인정하듯 ‘오해’다.

조각가는 21년 전 ‘모녀상’ 시리즈를 만들 때만 해도 잉꼬부부로 소문났던 사랑하는 아내 리쓰코에 대한 오해와 라이프캐스팅으로 만든 석고상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인 ‘눈을 감은’ 석고상을 뛰어넘고자, 허용되지 않은 예술적 탐미를 이겨내지 못하고 악마와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아내를 잃고 동생과도 절교한다. 하지만, 악마는 결코 그 일을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고 나서 하나뿐인 딸 에치코도 결국 ‘악마와의 계약’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비록 그가 며칠 차이로 딸보다는 먼저 죽지만 말이다.

보통 오해가 풀리면 그동안 오해의 대상자와의 쌓이고 묵은 앙금도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일도 있다. 조각가 이사쿠는 사망하는 해 초반에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동생과 극적으로 화해한다. 그 결과 16년 전 헤어진 아내에 대한 오해도 풀리자 이사쿠는 예술가적인 독창적인 기질로 16년 전의 진실을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어찌 보면 조금은 비뚤어진 방법으로 세상에 알릴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모녀상’ 시리즈의 완결판인 ‘에치카 석고상’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핵심은 바로 ‘에치카 석고상’의 도난된 머리에 있었다. 이사쿠가 오해를 안고 그대로 죽었더라면 딸 에치코만은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만약’은 독자를 안타깝게 한다. 보통 우리는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감정이 더욱 불거져 서로의 감정이 더 악화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도 있듯 때로는 지나친 호기심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도 세상사는 지혜일 것 같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일반적인 추리소설로서 좋은 작품인 건 분명하지만, 진정한 본격 추리물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완성된 트릭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16년 전 유코 자살 사건의 개연성이 좀 찝찔했다고나 할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적을 수는 없지만, 노리즈키 린타로가 “본격 미스터리의 경우, 리얼리티와 트릭이 서로 경쟁을 벌이죠.”라고 말했듯이 트릭의 완성을 위해 사실성을 조금 감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래도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주요 단서들이 16년 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증거들이 물질적인 증거보다는 정황증거일 경우가 좀 있다 보니, 매우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완성된 추리일지라도 그것들을 가리키는 단서들과의 연결고리들은 좀 느슨한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시건방진 생각을 해보면서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지루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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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책 리뷰] 인간의 가증스러움과 뻔뻔한 탐욕에 대한 음울한 통찰 ~ 그림형제 동화전집

추천하는 책

인간의 가증스러움과 뻔뻔한 탐욕에 대한 음울한 통찰

원제: Kinder- und Hausmärchen by Jacob Grimm, Wilhelm Grimm

가 요즘처럼 도서관과 책을 가까이 한 시기는 불과 몇 년이다. 그래서 자랑은 못되지만, 학창 시절이나 그 이후에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소설 두세 편 정도 될까나. 어렸을 때 집에 아동이나 청소년을 위한 괜찮은 책들은 좀 있었음에도 말이다. 지금은 그 책들마저 이사를 몇 번 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으니 그저 아깝기가 그지없을 따름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 시절 동화를 읽어 본 기억이 거의 없기도 하고, 최근에 감상한 미국드라마 『그림형제 시즌 1(Grimm, 2011)』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시즌 1(Once Upon Time, 2011)』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늦게나마 그림동화를 펼쳐보게 되었는데, 원래 제목은 『어린이와 가정의 옛날이야기(Kinder und Hausmärchen)』라고 한다. 그러나 드라마 『그림형제』와의 상관관계는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의 경우에는 드라마 배경이 되는 동화의 원작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룸펠슈틸츠헨' 등등이 그러하다.

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신화, 민화 등 총 210편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그림형제 동화전집 완역본』은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라 치부하기에는 아깝고 소중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독일 민족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본다는 이 책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

두산백과 사전에서는 동화(童話, fairy tale)를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을 기초로 해서 지은 이야기로서 아동문학의 한 부분”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렇게 어린이를 위한답시고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장면 등은 따로 편집을 하다 보면 원래의 내용과는 당연히 달라진다. 그래서 이러한 여과장치 덕분에 어른들은 동화와 관련된 것들은 유치하다는 선입관이 생겨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는 동화는 너무 노골적으로 인간의 본능과 탐욕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러한 탐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는 순수하지 못한 우리 어른들은 차마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속셈을 솔직하게 타인에게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반대로 누군가의 그러한 일방적이고 솔직한 진심을 듣는 것도 그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부담감 때문에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제작하면서 착한 일을 하거나 정직한 사람이 언제나 승리하거나,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 처음에 고생하더라도 나중에 충분한 보상을 받도록 이야기를 꾸민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 이렇게 아이들에게는 동화 같은 아름다운 세상과 미래를 꿈꾸게 하지만, 막상 어른들은 그러한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동화에 등장하는 나쁜 사람처럼 오로지 개인의 탐욕을 만족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이 모순되고 암울한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어른들을 동화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 『그림형제』이 완역본이라 그런지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장면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 불행을 자초한 ‘나쁜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왕자의 어머니라 할지라도 그 처벌에는 전혀 동정심이나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나 아이들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의 실체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되면서 타인과 만나 대화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좀 더 성숙한 면모를 보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다고 무조건 숨기고 멀리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좋지 않는지를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어차피 살아가면서 마주쳐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도 조심해야 할 1순위인 인간의 가증스러움과 뻔뻔한 탐욕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해주는 그림형제의 이야기야말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인생에서 한 번쯤은 꼭 읽어야 할 책이지 않을까.

이 리뷰는 2013년 09월 21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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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4일 금요일

Camera Raw에서 JPEG 파일을 보정하면 RAW 파일처럼 원본 파일 역시 보존될까?

어도비 브릿지(Adobe Bridge)에서 JPEG 파일을 "Open in Camera Raw..."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보정한 다음 나머지 작업은 "Open Image" 단추를 클릭해 어도비 포토샵(Adobe Photoshop)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내 작업 흐름이었다. 그리고 브릿지에서 JPEG 파일이라도 Camera Raw에서 보정한 내용은 다시 Camera Raw에서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원본 파일은 수정된 것이 아닌 줄 알았는데, JPEG 파일을 Camera Raw에서 보정하고 "Done" 단추가 아니라 "Open Image"를 눌러서 포토샵으로 넘어가도 파일 크기가 변하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Done" 단추를 눌러도 원본 파일의 크기는 변한다.

디카가 없는 관계로 Raw 파일과 나머지 테스트에 사용된 파일은 『좋은 사진을 만드는 김주원의 포토샵 사진 강의 』에 포함된 예제 파일을 사용했다.

우선 04.jpg 파일을 보자.

위의 jpg 파일을 Camera Raw에서 간단하게 화이트 밸런스와 노출에 "Auto" 옵션을 적용하고, "Open Image"를 눌러 포토샵에서 열고 저장하지 않고 바로 닫았다.

그러나 jpg 파일의 크기는 미세하게 증가했고, 더불어 수정한 날짜도 변했다.

이번에는 RAW 파일로 테스트했다

jpg 파일처럼 Camera Raw에서 화이트 밸런스와 노출을 "Auto" 옵션으로 적용하고 "Open Image"를 눌러 포토샵에서 연 다음 저장하지 않고 닫았다. 똑같은 그림을 올리는 격이니 따로 올리지는 않았지만, 역시 파일 크기나 수정한 날짜는 변하지 않았다. 그 대신 RAW 파일이 있던 폴더에 작업 전에는 없던 파일이 새로 생겼다.

바로 XMP 파일이 Camera Raw에서 작업한 내용을 담고 있어 RAW 파일을 수정해도 원본 파일은 그대로 보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JPEG 파일에는 위의 시스템이 적용이 안 되는 것일까.

아무튼, 나처럼 JPEG 파일을 Camera Raw에서 어느 정도 보정한 후 포토샵 작업으로 넘어가고 싶지만 원본 파일은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면, JPEG 파일의 속성을 '읽기전용'으로 해두면 된다. 그러면 브릿지에서 '읽기전용' 속성이 체크된 사진 우측 상단에 조그맣게 자물쇠 마크가 생긴다. 아니면 브릿지에서 "마우스 우클릭 - Lock Item"을 해도 같은 효과가 적용된다. 이 상태에서 JPEG 파일을 Camera Raw에서 보정하고 포토샵으로 넘어가도 원본 파일은 변하지 않는다.

또는, Camera Raw에서 JPEG 파일을 보정하고 포토샵으로 넘어갈 때 "Open Image"가 아니라 ALT 키를 누르고 "Open Copy"를 이용해 포토샵으로 넘거가도 원본 파일은 수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위 테스트에 사용된 04.jpg 파일을 브릿지에서 "마우스 우클릭 - File Info"로 자세히 보면 아래와 같은 "Camera Raw Properties"의 태그가 생겼다. 즉, RAW 파일 같은 경우는 파일이 있는 폴더에 Camera Raw에서 보정한 내용이 담긴 XMP 파일을 따로 생성해서 원본 파일을 보존하는 것이고 JPEG 파일의 경우는 아래 그림처럼 파일 자체에 XMP 태그를 포함시키기 때문에 위의 테스트처럼 파일 크기가 증가한 것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브릿지에서 위의 태그만을 삭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ExifTagRemover 유틸로 위의 테스트에 사용된 04.JPG 파일의 XMP 태그만 삭제해 보았다. "Camera Raw Properties" 태그가 삭제되면서 처음에 측정한 파일 크기값보다 조금 더 감소했다.

이렇게 04.jpg에서 XMP 태그를 제거한 04_cleaned.jpg 파일을 Camera Raw를 이용해 앞에서 테스트 했던 것처럼 화이트 밸런스와 노출을 "Auto"로 설정하고 "Done" 단추를 눌러 빠져 나온 다음에 파일 크기를 보았더니 역시 예상대로 약간 증가했다. 다시 ExifTagRemover 유틸로 XMP 태그만 삭제해 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7KB가 감소하면서 Camera Raw 수정 전의 파일 크기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참고로 이 7KB라는 파일 크기는 위 테스트에서 사용한 RAW 파일을 Camera Raw에서 보정 후 생긴 xmp 파일의 크기와 일치했다.

이로써 JPEG 파일의 경우는 Camera Raw에서 작업한 내용을 RAW 파일처럼 따로 XMP 파일을 만들어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JPEG 파일 자체에 "Camera Raw Properties" 태그를 입력함으로써 Camera Raw에서 수정한 내용이 저장 됨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JPEG 파일의 원본도 RAW 파일처럼 손상 없이 보존되는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그리고 xmp 태그를 삭제하자마자 브릿지의 미리보기에서도 Camera Raw에서 수정하기 전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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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책 리뷰] 그녀를 성인 배우로 만든... ~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기리노 나쓰오)

그녀를 성인 배우로 만든 잿빛 과거

원제: 天使に見捨てられた夜 by 講談社文庫(Natsuo Kirino)

느 날 ‘무라노 젠조 조사탐정사무소’에 페미니즘 계열의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는 와타나베가 찾아온다. ‘성인비디오의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그녀의 손에는 <울트라 레이프 이제 나도 자기부정>이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가 들려 있었고, 그 테이프 갑에는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한 여자를 남자 넷이 강간하는 선정적인 장면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탐정과 함께 본 그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에는 잇시키 리나라는 여자가 여러 남자에게 강간과 폭력을 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와타나베는 비디오 속에서 무참히 짓밟힌 리나를 찾아 영화 제작자와 남자 배우들을 강간죄로 고소하고자 설득하기 위해 ‘리나’를 찾아달라고 무라노에게 부탁한다.

무라노가 와타나베의 의뢰를 받아들이고 얼마 후, 7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블루스 밴드 ‘소울 게인스’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도미나가 요헤이가 죽는다. 그는 교살 되기 전에 한 젊은 여자와 마지막으로 같이 있는 것이 목격되었지만, 경찰은 끝내 그 여자를 찾지 못했다. 관속에는 요헤이가 살아생전에 부탁한 대로 그가 애지중지 아꼈다던 흙구슬이 든 유리병이 놓였다. 생중계로 방송되는 요헤이의 장례식을 보던 무라노는 문득 <울트라 레이프>의 배경이 된 방에서도 요헤이의 관에 있던 흙구슬이 든 유리병과 같은 것을 봤음을 기억해낸다.

성인 비디오에 출연한 여자를 찾다가 발견한 흙구슬이 든 유리병. 그리고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한 유명인의 죽음에서 발견한 또 다른 흙구슬이 든 유리병. 그 중 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학문 그리고 자살의 권유>라는 기괴한 비디오를 남긴 채 진짜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흙구슬이 이 두 사람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무라노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의뢰인과 계약한 2주라는 기간이 거의 다 소진하면서 ‘리나 찾기’ 의뢰는 오리무중에 빠질 즈음, 대기업 차기 사장의 부인이자 양과자 연구가로 유명한 하쓰타 마키코라는 여자가 사무실에 갑작스럽게 찾아와 ‘리나 찾기’에 막대한 후원을 약속함으로써 조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무라노가 맡은 이번 건수는 호기심에 혹은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성인 비디오에 출연한, 도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탈선한 여자 잇시키 리나를 찾는 평범한 실종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리나 인생 전반에 걸쳐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슬프고 어둡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리나가 겪었던 지독히도 끔찍하고 불행했던 지난 시절의 일들도 점차 그들 앞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리노 나쓰오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리나 찾기’라는 실종사건을 통해 성인비디오 제작이 가져온 인권침해를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분석하고 파헤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성인비디오의 존재 자체나 그것을 찍는 제작자나 배우들을 문제로 삼기보다는 제작에 동참한 여배우에 대한 제작자들의 인권침해를 들춰낸다. 아무리 성인 영화라지만 사전에 계약하고 합의하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을 텐데 무엇이 문제 될 것이냐고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인지하게 된 사실이지만 사전에 합의된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돌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여배우에게 정신적 및 육체적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역시 성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일본이기에 그러한 선택적이고 다층적인 페미니즘도 가능한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여성이고, 탐정도 여성이다 보니 작품에는 성인비디오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의견이 쉽게 일치하지 못하는 일반적 대립각을 언뜻 비추기도 하지만, ‘여성 혐오’가 아니라 ‘남자’가 가지는 추상적인 미덕을 최고로 여기는 호모 도모베를 탐정 이웃으로 등장시켜 모든 남자가 똑같은 시각으로 성인 비디오를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나는 성인 비디오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남자라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무튼, 단순한 실종 사건 같았던 ‘리나 찾기’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방향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흘러가면서, 리나가 그런 비디오를 찍은 것은 단순히 쾌락과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포자기한 리나가 자신을 버린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진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리나의 친엄마였다. 리나의 베일에 가려진 비참한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전까지 독자에게 ‘성인 비디오나 찍는 그렇고 그런 여자’라는 경멸과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을 비천한 처지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리나에게 독자들은 동정 어린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리나가 지내온 환경과 살아온 과거를 보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역시 아이에게는 그 무엇보다 엄마가 최고이고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세상 그 어느 사람이라도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최악의 일로 받아들여질 일을 겪은 유키에(잇시키 리나의 본명)는 위탁가정에서도 파양되면서 또 한 번 상처받는다. 그리고 시설이 바뀌면서 또다시 상처받고, 그렇게 힘든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만난 친어머니 앞에서도 역시 거절당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느꼈을 소외감과 외로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며, 그런 경험들은 유키에에게 회복 불가능한 심리적 상처를 입혔음이 틀림없다.”

작품 중 ‘야마가와 유키에 성장관찰 근무일지’에서 유키에는 자신을 이렇게 비유한다.

비와 재가 결혼해 태어난 것이 빗방울 화석이다. 원래 비와 재의 결혼이란 있을 수 없는데, 우연히 화산 폭발로 결혼할 수 있었다. 빗방울은 모두 사라져버리지만, 그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자기 자신이다. 언젠가 어머니를 만나면 이 화석을 선물할 것이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중에서)

결국, 이 모든 일이 유키에로 하여금 자신을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말아야 할 부정적이고도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였고, 이런 환경에서 아이는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키에가 어머니를 만난다는 희망에 1년 남짓 보여준 변화된 행동은 독자들을 더욱 가슴 저리게 한다. 유키에는 어머니와의 극적인 상봉을 앞에 두고 “유키에는 모든 일에 의욕적이었고 생활태도도 안정적이었다. … 걱정과는 달리, 그 무렵의 유키에는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월급을 저축하고 착실하게 생활하며 어머니를 만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키에가 풍선처럼 희망에 부푼 상태에서 만난 어머니는 숨겨진 진실을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듯 내뱉은 보는 앞에서 친딸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순간 유키에의 마음속 가득 부풀었던 작고 여린 희망의 풍선은 그대로 터지고 그 흔적조차 산산이 부서져 형체 없는 가루가 되어 유키에의 잿빛 과거 속에 묻히고 만다. 그 이후 유키에는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간다. 끝없는 타락의 길로. 이런 유키에를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툭하면 내뱉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다름 아닌 사회가, 바로 우리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에 등장하는 탐정 무라노 미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탐정소설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여자의 나약한 심성과 의지를 대놓고 보여준, 안쓰러운 탐정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이나 형사들에게도 인간적인 단점은 있지만, 작품 속에서 그런 점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왔던가. 무뚝뚝하지만 뛰어난 지능을 가진 움직이는 백과사전인 ‘링컨 라임’, 환한 미소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시선의 ‘신참’ 가가 형사, 셜록 홈스야 말할 것도 없고 엘러리 퀸, 파이로 번스, ‘사고 기계’ 도젠 교수, 어수룩하지만 역시 명쾌한 두뇌의 소유자인 긴다이치 코스케, 점성술사 탐정 미타라이, 회색 뇌세포의 에르큘 포와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 마플 할머니 등등 이들 모두 뛰어난 능력, 즉 특별한 지능의 소유자이다. 이런 빛나는 주역들 덕분에 새로운 추리소설 작품을 접하는 많은 독자가 당연히 명탐정의 명추리를 예상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탐정 무라노는 보통 사람들처럼 나사 몇 개는 빠져 있다. 지금까지 봐온 명탐정들에 비해 부족함이 확연히 보인다. 거기다 의뢰인의 ‘적’이자 성인비디오 제작자인 야시로에게 유혹당해 동침까지 하고, 그렇게 황홀하게 ‘적’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는 의뢰인이 살해당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발생한다. 전직 야쿠자 조사원이었던 무라노의 아버지는 “의뢰인을 죽게 해선 안 된다. 그건 탐정에게 치욕이야.”라고 뒤늦은 충고를 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인간적인 탐정 하면 해리 보슈를 빼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보슈는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했다. 아니 오히려 보슈에게 ‘사(私)’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경찰관의 아내였던 실비아, 전직 FBI이자 중범죄자인 엘리노어와의 좋은 관계를 방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이 무라노를 비난의 눈으로만 본다면 그녀의 심정은 누구보다 안타깝고 속이 탄다. 사실 무라노는 이웃집 남자 도모베를 사랑하지만, 호모인 도모베는 ‘평생 아무하고도 안 잔다고’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이니, 한창 젊음의 뜨거운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무라노가 도모베와의 정신적인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걸 어찌 탓하느냐. 그 상대가 비록 의뢰인의 ‘적’일지라도 육체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남자의 강렬한 유혹 앞에서 사랑에 굶주린 그녀는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어찌어찌 해서 사건은 해결하지 않았는가. 어찌 되었든 무라노는 내가 본 역대 탐정이나 형사 중에서 가장 평범한 탐정이다. 명탐정이 있다면, 어딘가에는 비록 평범할지라도 자신이 갖춘 능력을 ‘재주껏’ 발휘하고 성실함을 무기와 방패 삼아 연명하는 탐정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지막으로,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의 전체적 흐름은 그리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다. 그래서 해리 보슈나 링컨 라임 시리즈 같은 큰 긴장감이나 스릴을 주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어질러진 여러 페이지를 짜맞추다가 실수로 몇 장 빠진 것처럼 이야기 구성이 그리 깔끔하지는 않아 보인다. 특히 무라노 남편이 자살한 동기나 무라노 아버지가 야쿠자 조사원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한 것인지 빠져 있어 조금 아쉬웠다. 탐정 무라노와 그 주변 인물의 과거는 독자가 무라노를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런 부족한 점에도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설정은 꽤 신선하게 다가왔고, 사건을 마무리도 하고 나서보니 그녀와 도모베와의 미래도 자못 궁금하다. 이 둘이 한팀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며 재미없이 길기만 한 이 글을 마치련다.

이 리뷰는 2013년 04월 2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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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8일 목요일

[책 리뷰] 피해자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형사가 있다면? ~ 신참자(히가시노 게이고)

만약 피해자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형사가 있다면?

원제: 新參者(Newcomer) by 东野圭吾(Keigo Higashino)
"… 하지만, 형사가 하는 일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잡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신참자』 중에서)

상 깊게 감상한 드라마 『신참자』의 원작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이 도서관 책장에 보란 듯 진열된 것이 눈에 띄어 나 역시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과장됨 없이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럽고 따뜻한 감동과 산뜻한 기쁨을 얻었다면 당연히 원작소설에도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원작소설의 작가가 다름 아닌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일단 재미는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 아닌가. 다작의 작가이면서도 매 작품 인기를 끌고 많은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일단, 드라마를 본 지 얼마 안 되었기에 페이지는 굳이 서둘지 않아도 가볍게 넘어갔다. 작품을 초반만 읽어도 전체적인 흐름이나 내용이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정도로 드라마는 원작에 충실했다. 특히 책에서 등장하는 가가 형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아베 히로시의 완벽한 연기와 그를 주연으로 뽑은 캐스팅 실력에 놀랄 따름이다. 책 속에서 가가 형사는 캐쥬얼한 차림에 더부룩한 머리카락, 윤곽이 뚜렷한 얼굴, 인상이 남는 울림 좋은 목소리, 하얀 이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 등의 가가 형사를 묘사한 문장을 읽고 독자가 상상 속에 떠올린 이미지와 모델 출신답게 다부진 몸매, 그리고 단호한 인상을 준 아베 히로시와 완벽하게 매칭이 된다. 지금도 드라마 속에서 탐문 수사를 벌이며 만나는 사람마다 선보이는 아베 히로시의 밝은 미소가 눈앞에서 떠나질 않고 아지랑이 피듯 어른거린다.

라마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원작이 주는 감동을 더욱 배가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몇몇 장면은 수정하고 몇몇 장면은 추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매 편 드라마의 마무리 장면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애의 재확인 장면이다. 가족들은 오랜 시간 대화의 단절로 쌓인 묶은 때처럼 거칠고 두터운 오해를 가가 형사의 은밀한 중재 덕분에 없애고 따뜻한 가족애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런 마음 따뜻한 가가 형사는 다른 동료와는 달리 수사에 대한 독특한 그만의 신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직접 가가 형사의 말을 들어보자.

“ … 하지만, 형사가 하는 일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잡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가가 형사는 굳이 파헤쳐 밝히지 않아도 될 참고 조사인 가족들의 숨겨진 말 못할 사연까지 추적하고 수사한다. 그리고 친구 집 마실가듯 때로는 케이크 등 먹을거리를 들고 참고인 집을 찾아가 마냥 푸근해 보이는 미소로 그들을 상대한다. 하지만, 그 부담 없고 다정한 미소 뒤에는 상대방의 모든 걸 투시하는 듯한 예리한 매의 눈이 숨겨져 있다. 따라서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은 가가 형사 미소 앞에서라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다.

최대한 참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감정적인 동요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그 가족들 사이에 쌓인 오해로 말미암은 케케묵은 감정을 화해시킴으로써 당사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 가족애의 재확인을 목격한 시청자나 독자 역시 감동하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가가 형사와 아버지와의 갈등, 경시청에서 근무하는 조카 등에 관한 책에는 없는 배경과 인물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좀 더 가가 형사를 현실적인 이미지로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한다. 특히 매일 붕어빵 가게 앞에서 줄만 서고 끝내 먹어보지를 못하는 가가 형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 이렇게 독특한 개성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아니면 애교 있는 고집스러움을 넘어 억척스럽게 자신만의 규칙을 지키는 철저한 모습이야말로 그의 비밀스러운 수사력의 힘이 아닐까.

부분의 다작 작가가 그러하듯이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문체가 특히 뛰어나거나 문장 하나하나가 예술적 감각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건조하면서도 일본 음식의 특징처럼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그의 문장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책 앞에 있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이 있다. 반대로 평론가들을 위한, 독자가 읽기에는 난해하고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작품이 꼭 좋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래서 그런지 노벨 문학 수상작들을 보면 적당히 난해하고 적당히 읽기 쉬운, 그 절묘한 경계에 있는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오래전부터 추리소설로 명성을 날려온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마다 이야기 전개에 적절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료시켜왔다. 쉽게 말해 한 번 손에 들면 끝장을 보고야 말게 하는 것이 그의 소설이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은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그가 작품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고자 하는 예리한 통찰력 있는 메시지다. 그런 관점에서 드라마와 책의 『신참자』가 주는 메시지는 단호하다. 바로 ‘가족’이다. 현대 사회가 겪는 고질적인 문제점인 가족 간의 소외나 소통의 단절이 가져올 비극을 이혼한 40대 중반의 미쓰이 미네코 살인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외아들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의 꿈을 이루려고 가출하자 자신도 젊은 시절 못 이룬 번역가로서의 꿈을 떠올리고 제2의 인생을 위해 남편과 합의 이혼하고 자립에 나선다. 그녀는 그저 소박하게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의 중년 여성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의문의 교살을 당하고, 가가 형사의 독특하지만, 사려 깊은 그만의 ‘치유’가 시작된다.

요즘은 이런 ‘메시지’가 담긴 추리소설을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하게 ‘추리소설은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다.’라는 과거의 낡은 고정관념을 넘어 작가가 바라본 사회가 가진 보편적인 문제점을 파헤치고 해결해보고자 하는 노력을 담아 추리소설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새로운 추리소설의 한 갈래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족’을 강조하면서 꿈을 위해 도전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도 심어 놓았다. 1장 ‘센베이 가게 딸’에서는 미용사를 꿈꾸는 나호, 2장 ‘요릿집 수련생’에서는 어린 시절 생선초밥집에서 일하는 주방장의 모습에 반해 요릿집에 들어온 슈헤이, 4장 ‘시계포의 개’에서는 어렸을 때 태엽이나 기계로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의 세밀함에 감동하여 견습 시계 수리공이 된 아키후미, 그리고 연기를 위해 극단에 들어간 미네코의 아들과 그녀 역시 번역가로서의 꿈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현실적이자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행운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고 그저 꿈은 ‘꿈’으로만 간직하며 공상으로만 만족하거나, 어렵게 실천으로 옮겼지만 커다란 운명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의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반면에 어떠한 장애나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오직 그날을 위해 오랜 세월 기회를 엿보며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을 간직한 사람도 있다.

꿈을 향한 희망찬 도전을 앞에 두고 운이 좋은 사람은 전폭적인 가족의 지원을 받기도 하겠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만 되는 일은 별로 없다. 바로 여기에서 가족 간의 갈등이 온다. 어찌 보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고우키와 미네코의 독단적인 행동이 미네코의 죽음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길이 현명한 판단일까. 가족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힘들고 긴 여행을 떠나느냐, 바로 여기에서 가족 간에만 얽힌 딜레마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오직 그 가족만이 풀 수 있다.

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꿈을 품지 않은 사람을 어찌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 꿈을 향해 가는 절대 쉽지 않은 긴 여정에 있다. 단순히 집을 나가고 남편을 떠난다고 꿈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로 말미암은 가족 간의 갈등 또한 역시 단순하게 외면하거나 도망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우발적인 행동은 오히려 작품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가가 형사는 살해당한 미네코와 그녀의 남편 나오히로를 떠올리며,

“ … 결국, 두 분 모두 이혼 후에 얻은 것은 가족이었던 겁니다. 가족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죠. 가족이라는 끈은 아주 단단한 겁니다. …”

라고 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은 진부한 말이지만,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살아가다 보면 정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네코는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살해한 범인에게도 피는 물보다 진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신참자』는 소설보다는 드라마를 먼저 추천한다. 아베 히로시의 깔끔한 연기도 볼만하지만, 드라마의 각색 또한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2013년 03월 2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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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4일 월요일

[책 리뷰] 혁명 폭력에 맞물린 한 가족의 비운 - 두 도시 이야기(디킨스)

추천하는 책

혁명 폭력에 맞물린 한 가족의 비운

원제: A Tale of Two Cities by Charles Dickens

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18세기 말에 벌어진 프랑스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지만, 혁명 전체를 조명하지는 않았다. 파리 생탕투안 교외의 어느 한 술집에서 점화된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과 이 거대한 폭풍에 휩쓸린 마네트 박사 가족의 비운을 담은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요 줄기이다. 그리고 그 비운의 시작은 과거 알렉상드르 마네트 박사가 바스티유 옥에서 겪는 18년 동안이라는 긴 독방생활이다.

작품의 시작은 1775년 11월, 태어나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박사의 딸 루시가 긴 독방생활에서 풀려난 박사가 옛 하인이자 이 작품에서 혁명의 중심이자 도화선이 되는 생탕투안 교외의 술집 주인인 드파르주에게 의지하며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텔슨 은행 직원이자 박사의 재산관리인이었던 로리 씨와 함께 런던에서 파리로 오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작가는 이 당시 파리 민중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었는지를 파리 생탕투안 교외의 좁은 거리에 커다란 포도주 통이 깨지면서 포도주가 땅 위로 흘러나오자 그 술 웅덩이에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민중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오므려 포도주를 떠서 홀짝거렸고 … 깨진 사금파리로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떠 마시는가 하면, 심지어 머릿수건을 풀어 포도주에 담갔다 아기 입안에 짜 넣어주는 아기 엄마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가 흘러내려 가지 못하게 흙으로 작은 둑을 만들었고 … 포도주가 밴 통 조각을 손에 넣고 핥아먹거나 포도주가 배어 썩어 문드러진 눅눅한 통 조각을 질겅질겅 씹는 사람도 있었다. 포도주가 흘러내려 갈 배수 시설은 없어도 사람들이 포도주를 모두 마셔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술이 스며든 진흙까지 몽땅 떠가는 바람에 이런 풍경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청소부가 다녀갔다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믿기 어려운 기적 같은 모습이었다. (『두 도시 이야기』 1부 5장에서)

심한 가난과 굶주림은 민중에게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자존심과 수치심도 잊게 하였다. 이렇게 혁명 전 민중의 삶은 이미 피폐해질 만큼 피폐해졌고, 그들은 더는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었다. 박사는 딸과 로리 씨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왔고, 시간은 금세 5년이 흐른다.

이 당시 런던의 모습은 겉으로는 매우 평화로워 보인다. 템플 바 옆에 있는 텔슨 은행의 구식적인 건물과 역시 구식을 고집하는 그들의 업무방식, 그리고 크고 작은 모든 범죄에 사형이 남발하는 모습은 그 당시 런던 빅토리아 시대가 매우 보수적으로 안일하고 나태한 생활에 빠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폭풍 전의 고요함으로 긴장감이 도는 파리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며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혁명 탓에 자신들의 이익에 손실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영국 귀족들의 시대착오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망명한 귀족, 찰스 다네이가 첩자활동을 했다는 고발로 런던에서 재판이 일어난다. 피고인의 충직한 하인이었다던 클라이와 피고인의 친구였다고 자청한 바사드가 다네이를 배신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 간의 사이가 오래된 불화로 말미암은 견원지간 사이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다네이는 사형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죄로 풀려난다. 훗날 프랑스혁명에서 죄가 있건 없건 의심을 받아 고발당하고, 귀족이었다는 죄로 수많은 사람이 정당하지 못한 절차와 적법하지 못한 판사와 검사들에 의해 무수히 목이 잘려나가는 상황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작가는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불안과 혼란에 휩싸인 파리와는 달리 런던은 다네이의 재판을 통해서 최소한의 법치주의는 지켜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처럼 작품 중간마다 두 도시, 즉 파리와 런던을 간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을 독자는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 다른 중요한 장면으로 이 두 도시에서 일어난 폭도들의 서로 다른 뒤끝을 보자.

우선 런던에서 일어난 로저 클라이의 장례 행렬에 발생한 폭도들의 뒤끝을 살펴보자.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여름 별장들 몇 채를 무너뜨리고 울타리를 뜯어낸 것도 모자라 호전적인 사람들은 무기까지 뽑아들었다. 이윽고 경비대가 출동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을 들은 군중은 뿔뿔이 흩어졌다. 경비대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폭도들은 으레 그런 식으로 해산을 했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14장에서)

이번에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풀을 먹으면 되지 않느라고 말했던 일흔이 넘은 풀롱 노인이 숨어 있다 발각되어 시청으로 끌려와 생탕투안 주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다.

… (풀롱은) 자비로운 밧줄에 다시 묶어 공중으로 끌어올렸고,최후에는 풀을 잔뜩 입에 문 머리통이 창끝에 매달렸다. 생탕투안 주민들은 그 모습을 보며 춤을 추었다.
… 사람들을 모욕한 대가를 치른 늙은이의 사위가 오백 명의 강인한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로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사람들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생탕투안 주민들은 종이를 펼쳐 그의 죄목을 적은 다음 그를 포획했다. 풀롱과 저승길에 동행하도록 군대의 심장부에서 그자만 도려내어 머리와 심장에 창을 꽂았다. 그날 사람들은 전리품 세 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22장에서)

런던의 폭도는 역시 최소한의 법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답게 경비대가 출동했다는 소문만으로도 겁을 먹고 해산하지만, 생탕투안 드파르주 술집에서 터진 민중의 분노는 거침없이 퍼져 나갔고, 그들은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무장한 군인들조차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끊임없이 치솟는 분노와 증오는 어디서 온 것일까.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해야 할 인간은 바로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은 무서울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품 속 시대에는 더는 잃을 것이 없었던 가난한 민중으로부터 그 어느 혁명보다 과격했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본주의화 된 현대의 국가에서는 그런 과거에 일어났던 혁명이 발생하기 어려운 이유도 다름 아닌 ‘가진 것이 옛날보다 많아 잃을 것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가난과 굶주림, 핍박에 고통받고 지쳐 구석에 몰릴 대로 몰린 그들은,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게 되고 결국 죽음의 문턱에 서서 꺼져가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희생하여 죽음조차 불사하는 투쟁의 선봉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들에게는 굶어 죽으나, 귀족에게 맞아 죽으나, 아니면 투쟁하다 죽으나 매한가지이다.

작가는 작품 중간마다 프랑스혁명의 잔인함과 폭력성을 작품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거기서 압권은 3부 2장 ‘숫돌’ 장면이다. 자신의 옛 하인 가벨의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고 파리로 건너온 다네이는 결국 신(新)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고, 이 소식을 듣고 파리로 달려온 박사 가족은 텔슨 은행 파리지점에 잠시 머무른다. 그리고 그들은 창문을 열고 숫돌이 있는 뜰을 내다본다.

숫돌은 손잡이가 두 개인데, 남자 두 명이 각각 나눠 잡고 미친 듯이 돌렸다. 그럴 때면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 세상에서 가장 사납게 변장한 최악의 야만스러운 얼굴보다도 더 섬뜩하고 잔인해 보였다. 거짓 눈썹과 거짓 수염이 연신 휘날렸고 오싹한 얼굴은 온통 피와 땀투성이였으며 소리를 지를 때면 흉측하게 뒤틀렸고,짐승 같은 광기와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았다. … 여자들은 그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포도주를 들고 있었고,그들은 칼을 가는 동안 술을 마셨다. 피가 뚝뚝,포도주가 뚝뚝 떨어지고, 숫돌에서 불똥이 튀어 주변 대기는 온통 핏방울과 불빛으로 가득 찼다. 그 무리 중에서 피로 얼룩지지 않은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 사악하게도 여자들에게서 훔친 레이스와 실크,장식 띠 따위도 걸쳤는데,속속들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날을 세우려고 가져 온 손도끼와 칼,총검,검 따위도 모두 피로 붉게 물이 들었다. … . (『두 도시 이야기』 3부 2장에서)

이처럼 프랑스 민중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뿐만 아니라 작가가 표현한 프랑스 귀족의 무능함과 잔인함은 프랑스혁명에서 수없이 처형당한 귀족들에게 동정과 연민보다는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한다.

생탕투안에서 폭발해서 시작된 혁명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혁명의 이름으로 재판 같지 않은 재판으로 학살을 자행하는 민중의 잔인함이 이 작품을 흐르는 배경음악이라면 이 민중의 표적이 되는 프랑스 귀족이자 마네트 박사의 사위, 그리고 이상적인 처녀로 묘사되는 아름다운 루시의 남편인 찰스 다네이는 그 배경음악 앞에서 그저 줄의 당김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마리오네트이다.

다네이는 프랑스혁명을 거론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게 되는 착취와 억압, 야만적인 행위로 비난받는 악덕 귀족 이미지를 가졌던 아버지나 숙부와는 다르게 민중이 겪는 고통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개선하고자 하는 의욕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네이는 런던으로 망명하기 전 민중과 함께 할 기회를 루시와의 사랑 때문에 놓치고, 남은 재산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하인 가벨에게만 맡기는 등 순진하고 나약한 이상주의자이다.

“선생님 … 비참한 사람들을 동정하면서 제가 그들을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한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 스스로 자제하도록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 (『두 도시 이야기』 2부 24장에서)

… 바위에 부딪힐 때까지 항해를 해야 하리라. 그는 바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미완인 상태로 떠나왔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잘 설명하면 프랑스에서도 기쁘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선량한 사람들에게 종종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선행에 대한 낙천적인 환상이 떠올랐다. 심지어 자신이 잔인하고 격렬해지는 분노에 찬 혁명을 바르게 인도하는 환영을 보기도 했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24장에서)

위에서 보다시피 다네이는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순진하게 표면적으로만 드러나 보이는 귀족의 착취와 민중의 가난함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고 작위를 포기하면 선량한 그들과 같이 평등해질 줄 알았다. 그는 수십 년 이상 응축되어 오다 폭발하기 시작한 민중의 분노를 특별한 대책도 없이 자신의 설득만으로 삭일 수 있다는 아이 같은 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 다네이는 성난 민중을 그저 먹을 것에 굶주린 무지하고 선량한 동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을 배부르게 해주고 심술이 난 아이 달래듯 민중을 타일러 폭동을 가라앉히면 자신은 영웅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그는 하인 가벨이 주인이 다네이를 대신해 감옥에 갇히자, 그를 구원하기 위해 혼자 파리로 가는 길에서도 고급 옷차림으로 말을 타는 등 여전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이런 다네이의 행동은 귀족에 대한 동정과 연민보다는 반감만 더욱 부채질만 하는 꼴이다. 특히 이 작품의 열쇠 같은 존재이자 잠재된 미래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카턴이 이런 악독했던 귀족 형제의 후손인 다네이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카턴은 자신의 희생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다네이에게조차 잊힌 비극적인 인물이다.

사랑하는 루시를 위해 루시의 남편 다네이 대신 희생을 하는 카턴은 이 작품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어릴 적에는 수재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쓰게 된 그는 스스로 인지하고 있듯이 방탕한 생활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이런 카턴의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 있다.

…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였다. (『두 도시 이야기』 2부 5장에서)

하지만, 카턴의 숨겨진 뛰어난 능력은 예지를 통해 드러난다.

런던 소호에 정착한 박사의 집은 길모퉁이에서 소리가 울려오는데, 이 길모퉁이에서 들려오는 형체가 없는 소리는 파리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함의 메아리라고도 볼 수 있다.

거리는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에 서둘러 귀가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길모퉁이에는 신기하게도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지만, 아직 누구의 발도 보이지 않았다.
“전 가끔 저녁에 여기 앉아 몽상에 잠겨요. …” - 루시.
“ … 저는 가끔 저녁이면 여기에 혼자 앉아서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어떨 때는 저 메아리가 우리의 삶을 짓밟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로 들려요.” - 루시.
“이 발소리가 모두 우리를 향해 오는 건가요, 마네트 양? 아니면 우리 사이를 뚫고 지나갈까요?” - 다네이.
“그들이 내 쪽으로 오게 해 드리죠!” - 카턴. (『두 도시 이야기』 2부 6장에서)

그리고 루시에게 카턴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 … 아가씨와 아가씨를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 저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만약 제 경력으로 도움이 되어 드릴 일이 있거나 희생할 기회나 능력이 된다면 기꺼이 아가씨와 아가씨가 사랑하는 분에게 희생할 것입니다. … 당신이 사랑하는 생명이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꺼이 목숨을 바칠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두 도시 이야기』 2부 13장에서)

카턴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영국에서는 정신적으로 착취당하는 별볼일없는 존재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작가에 의해 프랑스 귀족을 위해 사랑의 희생을 단행하면서 한 가족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 자신이 잘못 걸어왔다고 생각한 인생길의 씁쓸한 마침표를 찍는다.

품을 읽고 나면 프랑스혁명은 피에 굶주린 무지하고 잔인한 인민들이 오랜 세월 쌓인 증오와 분노로만 가득 찬 듯하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는 굶주린 사자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들의 사냥을 위한 준비된 면책권이었다. 옛 귀족들이 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 박애는 어디에도 없었다. 찰스 디킨스는 프랑스혁명을 그저 억압받은 민중에 의한 폭동으로 보는 것 같다.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처럼 프랑스혁명 역시 보는 이에 따라 평가와 해석에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는 불편한 진실을 보려 하기보다는 잔인한 폭도들의 부정적인 면만 보여주면서 혁명의 의미를 고의적으로 빛을 잃게 하여 퇴색시키는 것 같다. 2부 6장에서 “박사의 딸은 고국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보잘것없는 걸로도 그럴듯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 점은 프랑스인의 가장 유용하고 훌륭한 특징이었다.”라는 작가의 풍자는 그가 프랑스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은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카턴의 죽음만 봐도 그러한 생각이 짙게 든다. 다네이는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형을 받아도 항변할 수 없는 위치였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서 당시 셀 수 없이 기요틴의 제물이 된 몰락한 프랑스 귀족 대신 희생되는 사람이 방탕한 영국인인 카턴이라는 설정은 작품 속 프랑스혁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영국의 관대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혹시 변호사 스트라이버에게 지식을 착취당하는 카턴이라는 괴짜스러운 인물 뒤에는 한때 변호사 사환으로 일했던 찰스 디킨스의 꿈과 몽상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프랑스혁명이 보여준 잔인함은 피의 바다를 이루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 귀족들이 『두 도시 이야기』 등장하는 식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넘어서, 초야권이라든지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지 하는 문제는 너무 과장의 소지가 있으므로 제대로 파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당시 어느 나라를 가든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자행된 횡포는 어느 정도 있었으니 말이다. 책 끝에 첨부된 리처드 맥스웰의 작품해설을 봐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생시몽이 지은 회고록의 축약판인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전』을 예전에 읽어 보긴 했지만, 역시 가물가물한 기억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다음 도서관에 도착해서 잊지 않는다면 프랑스혁명에 대한 책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책 장을 덮는다.

이 리뷰는 2013년 03월 0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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