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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5.

[책 리뷰] 당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과 식민사관의 기원 ~ 조선시대 당쟁사(이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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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과 식민사관의 기원

봉승의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에 이어 이성무의 『조선시대 당쟁사(1, 2)』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가 동네 도서관에서 ‘당쟁’이라는 단어로 검색해 나온 결과물의 어림잡아 반은 되는 것 같다(이 리뷰를 작성한 2012년 기준). 이제 도서관에서 당쟁 관련해서 내가 읽어볼 만한 책은 이이화와 이한우의 책, 이렇게 두 권 남았는데 그것들도 때가 되면 읽어볼 계획이다(하지만, 네이버에 작성했던 리뷰들을 틈틈이 구글 블로거로 옮기는 2017년 지금까지 아직 읽지 못했다).

일단 이 책은 두 권이라 그런지 당연하게도 앞의 두 책보다 더 많은 사료와 의견이 담겨 있다.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일본 학자들과 조선 실학자, 그리고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가 자세히 소개된 점이다. 그리고 앞의 두 책, 즉 신봉승과 이덕일의 책이 정조대에서 순조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끝난 것에 비해 이 책은 명성황후 살해 시점까지의 당쟁과 권력 투쟁을 다루고 있다. 고로 세도정치의 진행과정과 그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동안 식민사관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지만, 식민사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학자들과 조선 학자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소개된 책은, 내가 접해본 여러 책 중에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어찌 보면 내가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인제야 읽게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최소한 이덕일의 책, 신봉승의 책, 그리고 이주한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과 그전에 읽었던 조선시대 관련 역사책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본 학자 아무개가 뭐라고 했다는 주장 정도였다. 그래서 이 리뷰에는 『조선시대 당쟁사』 중 특기할만한 주제이자 식민사관의 정착 과정까지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는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 소개한 한국학자들과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흩어볼 생각이다. 본문에는 이외에도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이 있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선 일제학자들의 견해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자. 다음은 조선시대 당쟁을 처음 정리한 일본인 학자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의 견해이다(이하 인용문들은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한국의 정치는 사권(私權)의 쟁탈에서 유래한다. 정가(政家)는 한 번 정국을 담당해 일을 행하려 하면 여러 의론이 백 가지로 나오고 유언(流言)이 떠들썩하게 퍼지며, 음모를 꾸미면 암살을 꾀하고 한 번 집권하면 정적을 일망타진하는 참화를 불사한다. 대신(大臣)의 교체가 주마등(走馬燈)과 같으니 국정의 개혁을 기할 수 없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 이조 500년의 현상순치(現狀酬致)의 주원인 중 하나가 정쟁인 만큼 이에 관해 누군가는 그 연원을 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반도의 정치와 역사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일고(一顧)를 얻으면, 내 바람은 그것으로 족하다. …… 조선인의 오늘날 작태를 이해하려면,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실의 근원으로 고질적인 것은 당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대저 당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정쟁의 문제를 해결하든 데 가장 편리하고,또 국정(國情)의 심사(審査)에 가장 유익하다. (『韓國政爭志』(한국정쟁지) 敍言,1907)

시데하라는 당쟁의 기원을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로 올려잡고, 그때의 사화를 유파(儒派)와 비유파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리고 동인 서인, 노론 소론의 갈림을 김효원과 심의겸, 송시열과 윤증의 개인 간 감정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당쟁이 한국인의 심성에서부터 생긴 것이라고 보기 위해서다.

가와이 히로다미(河合弘民)는 당쟁의 원인을 경제생활의 곤란, 사회 제도의 문란에서 생겼다고 주장했다. 가와이에 의하면, 조선은 자족(自足) 경제를 벗어나지 못해 생활필수품을 각자의 손으로 생산하여야 하였고 교환의 방법도 발달하지 못했다. 양반들조차 생활난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집안에 40~50인의 대가족이 모여 살았고,그들을 부양하는 것이 문장(門長)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해 양반들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충군애국(忠君愛國)과 같은 관념은 희박했고, 오직 사우(師友) 관계와 자기 집안의 이익만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와이는 조선 후기 당쟁의 원인은 유파나 예론 혹은 개인감정 때문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곤란과 사회 제도의 문란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마디로 조선 문화의 낮은 수준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나가노 토라타로(長野虎太郎)와 호소이 하지메(細井肇)가 편저한 『붕당사화의 검톤』에서 인용한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정권은 곧 생활이다. 정권을 잡지 못하면 생활을 확보하지 못한다. 권력을 잃는 것은 곧 굶어 죽는 것이다. 아사(餓死) 앞에서는 이(理)도 비(非)도 없고,의리도 인정도 없고, 대의도 없고,명분도 없다. 물러나서 굶어 죽느니 적당(敵黨)과 싸워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권을 빼앗아야 했다. 그리하여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 집단적으로 당파를 조직해 군중심리에 책임 회피와 자기 최면으로 당쟁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들은 생활하기 위해 생활을 불안의 정점에 두는 것을 후회할 줄 몰랐다.…… 이것이 당시의 가와이 씨의 논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탁견이라고 생각해 지금도 이 의견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나는 혈액이 굳어 버린 채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 사람의 혈액에 이처럼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다는 것도 조선의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비(是非)를 함께 궁구해 둘 필요가 있다. 여하간 대 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는 없고,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육성된 인격 또는 국격(國格)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꾸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朋黨·士禍의 檢討』 自由討究社, 1921) (붕당·사화의 검토, 자유토구사)

오직 생활을 위해 당파를 만들어 상대 당을 여지없이 몰아쳐 죽인다는 것이다.

미지나 쇼에이(三品彰英)와 시카다 히로시(四方博)의 견해이다. 당쟁이 한국의 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이론은 미지나 쇼에이와 시카다 히로시에 이르러 한층 심화하였다. 미지나는 지리적 결정론이 근거를 둔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론을 주장한 장본인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은 반도로서 북쪽으로는 중국·만주,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일본과 같은 대국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중국의 전례(典禮) 주의적·주지(主知)주의적 지배를, 만주와 몽골의 정복(征服)주의적·주의(主意)주의적 지배를, 일본의 공존(共存)주의적·주정(主情)주의적 지배를 번갈아 받아 왔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는 타율적인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사의 타율성 때문에 한국인은 독립성이 없는 대신 의타성(依他性)·당여성(黨與性)·뇌동성(雷同性, 줏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임) 등의 민족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타율적 권위에 의존해 자기를 주장하는 정신은 독립성을 결여화하고 그곳의 사람이 서로 의존하는 당여적(黨與的) 성격이 육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혹은 특수한 사회 결합에 의존해 당벌(黨閥)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의 국민성으로서 정치·사회 면에서도 다 같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 당여성은 경제생활을 비롯해 제반 사회생활을 통해 금융조합 및 각종의 상호 원조조직을 발달시키고, 혹은 사회의 기본적인 결합력인 혈연관계에 의존해 씨족적 도덕을 발달시키는 등 효과적 측면도 절대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많은 폐해를 남기고 민족적 결함으로 간주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저 이조 500년간 대부분을 점하는 붕당정쟁사, 혹은 사회생활에서 소위 일문일족에 의뢰하는 동족의뢰주의와 같은 것은 그 폐단의 대표적이다. 붕당의 다툼은 스스로 생활 의식의 대립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자학의 원리,특히 예론에 의한바 일종의 의식적 대립인 까닭에 종합되어 진전되는 때가 없고,언제까지나 의미 없는 대립으로서 성과 없는 항쟁을 계속한다. 그 항쟁의 시간적 길이에는 세계적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실로 놀랄 만하다. 또 이 당벌성(黨閥性)이 임기적(臨機的)인 열정을 수반해 나타날 때, 그들의 민족적 특성의 하나인 뇌동성으로 되고,조선의 정치적·사회적 사건이 획기적·조직적인 것보다 오히려 저반(這般, 이와 같음)의 성격에 의해 특색 지어지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 장의 격문, 교묘한 연설이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국민이다. (『朝鮮史槪說』 弘文堂, 1940) (조선사개설, 미지나 쇼에이, 홍문당)

시카다 히로시도 “파벌성이 조선 민족의 특성”이라고 전제하고,당쟁은 주자학의 결벽성을 기계적으로 강조한 데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舊來(구래)의 조선 사회의 역사적 성격」,『朝鮮學報』2, 1951, 조선학보) 시카다의 견해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시이 가즈오의 견해이다. 일제 학자 중에 유일하게 당쟁의 긍정적 측면을 거론한 인물이다.

지금까지는 당쟁을 지나치게 혹평해 그것을 이기적·물욕적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의리라든가 학문이라든가 하는 것은 표면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의 근거는 대부분 당쟁이 고정되고 부패한 후대인들의 붕당관으로 거기에는 오히려 그 필자의 주관에 시대적 제약이 작용하고 있어 그 시대 당쟁의 시대적 특색이 나타나 있다고 할 것이다. 붕당 300년을 통해서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는 관념을 부지 불식 간에 하나의 전제로 깔고,곧 그것을 붕당 원인론의 전부로 삼으며,나아가 그것으로 초기 당쟁시대를 다루려 하는 데에는 찬성할 수 없다. (「後期李朝黨爭史에 대한 一考察」,『社會經濟史學』10-7·8,1940, 후기이조당쟁사에 대한 일고찰, 사회경제사학)

조선시대를 귀족주의적 전제정치 국가사회로 본 이시이는 귀족 세력과 전제 왕권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만 건전한 국가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붕당이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출현했다고 보았다.

사화(士禍) 시대에는 귀족 세력이 우월했기 때문에 왕권은 쇠약해져 양자의 조화가 깨졌다. 지방 하층 귀족 세력인 이학파(理學派, 이학: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철학’을 이르는 말, 성리학)가 새로운 혁신 세력으로 신장해 간 것은 바로 이러한 혼란을 수정한 것으로 붕당은 그 결실이다. 붕당의 출현에 의해 고정·침체하였던 사회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귀족 간에는 대립적인 여러 세력이 형성되어 서로 각축하였다. 여기서 저절로 일종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서 귀족 세력과 전제 왕권은 다시 모습을 바꾸어 이전의 조화를 되찾는 것은 아닐까? 당쟁의 출현은 대외적으로 국력의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내적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역사상 봉건주의적 지배 원칙 - '민중을 분열시켜라! 그리고 지배하라!’ - 은 아니었을까? 조선 후기 300년이 드물게도 태평 시대였던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앞의 글)

그런데 그는 논문 끝에 다음과 같은 사족을 붙인다. 민중 봉기에 의한 귀족주의의 패퇴를 중세 동양적 국가로부터 민족 국가로 발전하는 과도기로 보고 “이것이 조선으로 하여금 황국 일본의 일군만민 정치(一君萬民政治)의 은택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중계 역할을 담당했던 점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광채를 발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조선 후기 이학지상주의 국가사회의 붕괴를 알리는 애처로운 전주곡이야말로 실로 신생의 환희가 넘치는 행진곡 바로 그것이었다".

번에는 조선실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는 시간이다.

이익(李瀷)의 견해부터 살펴보자. 이익은 관직 수는 적은데 관직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 것에 당쟁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이익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면 과거를 줄이고,고과(考課)를 엄정히 하며, 좋은 관직을 아무렇게나 주지 말고,승진시키는 것을 신중히 하며,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체제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이익 자신이 양반 체제에 속해 있는 인물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유수원(柳壽垣)의 견해다. 관직 수는 적고 관직을 바라는 사람은 많아서 당쟁이 심해졌다는 유수원의 견해는 이익의 주장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 해결 방법으로 문벌을 타파하고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이 각각 본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하여 신분제 타파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익보다는 좀 더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이중환(李重煥)의 견해다. 이중환은 이조전랑(銓郞)이 자기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자대권(自代權)과 3품 이하의 엘리트 관료인 청요직의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조전랑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의 여론과 공론 시스템에 대해서는 본문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박제형(朴齊炯)은 서원 때문에 당쟁이 생겼다고 보았다.

이건창(李建昌)의 견해다. 이건창은 당쟁의 원인으로 도학태중(道學太重)·명의태엄(名義太嚴)·문사태번(文詞太繁)·형옥태밀(刑獄太密)·대각태준(臺閣太峻)·관직태청(官職太淸)·벌열태성(閥閱太盛)·승평태구(承平太久)의 여덟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도학태중이란 도학을 지나치게 높이다 보니 자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도학을 핑계 삼아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고 해서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명의태엄이란 명의에 가탁해 상대방을 깔아뭉개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며,문사태번이란 남의 글을 흠잡아 상대 당을 타도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고,형옥태밀이란 상대방을 난적(亂賊)으로 몰아 득세를 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또 대각태준이란 대간의 언론이 지나치게 준엄해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벌열태성이란 문벌 가문이 패거리를 지어 관직을 독차지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며,승평태구란 임진·병자란 이후에 200년간 밖으로 대규모의 외적이 쳐들어온 적이 없어 정신을 못 차리고 당쟁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자.

이태진의 견해다. 그는 일제 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당쟁'이라는 용어는 한국임을 깎아내리기 위한 오염된 용어이니 써서는 안 되고, 그 대신 '붕당 정치'라는 용어를 쓰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붕당 정치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정치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쟁'은 그 의미가 너무 넓다. 또한, 그는 학연성을 바탕으로 하여 공도(公道)를 실현하려는 사림계의 '붕당 정치'를 16세기 이후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김용덕, 정만조의 견해가 나온다.

상으로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대체로 당쟁이라는 용어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되는 것 같다. 신봉승처럼 ‘정쟁’이라는 말은 예송논쟁 이후 벌어진 당쟁의 치졸하고 무자비한 싸움을 표현하기에는 그 의미가 긍정적이고, 좁은 것이 아닌가 싶다. 붕당 정치의 틀에서는 정쟁이라는 단어가 적합하겠지만, 그 틀에서 이탈하여 상호협력과 공존을 기반으로 한 붕당 정치가 무너진 당쟁의 역사에서는 정쟁이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지은이는 붕당 정치를 유발한 조선의 문치주의를 무치주의에 비교하여 너무 좀 크게 띄운다는 느낌이다. 꼭 이럴 때 비교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런데 일본이 아시아에서 일찍 근대화에 성공하고 힘을 키울 수 있던 것도 무치주의의 영향력이 컸다. 조일전쟁(임진왜란) 후 조선의 유교가 포로로 잡혀간 강항, 이진영 등에 의해 일본에 전파되었지만, 현명하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교를 새로운 막부를 창건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도덕적 지렛대나 엘리트층이 익혀야 할 교양이나 학문으로만 사용했지, 조선처럼 맹신적으로 유교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사들에 의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 조선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조일전쟁 같은 큰 불행을 겪었다면 정신을 좀 차릴 만도 했다. 여기에 문치주의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무치주외와 문치주의를 비교해서 어느 것을 우위에 둘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을 우위에 두려고 하다 보면 결국 두 주장 간에 다툼만 유발할 뿐이다. 힘에만 의지하다 보면 백성의 생활이 낙후되고 잦은 전쟁으로 고달플 것이다. 반대로 붓만 가지고 다스리려고 하면 외부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양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균형이다. 하지만, 여운형 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 역사에서 중도주의는 기회주의로 몰려 비난받고 매장되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완벽’이란 단어의 그 존재 자체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건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줄 아는 지혜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 그럼으로써 깨우친 단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다. 이 중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가장 큰 단점을 꼽는다면 당연히 포용력의 부족이다. 특히 학식과 덕을 갖추었다는, 각 당파 간의 화해와 협력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명망이 있는 학자들이 독선과 독단으로 나아가 나라와 더불어 자신의 위기를 자초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송시열이다. 그들은 반대당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을뿐더러 다른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로서의 기본적인 배움의 자세도 안되어 있었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저자 이주한의 말을 빌리면 즉, 학문(배울 학 學, 물은 문 問)의 기초도 몰랐던 것이다. 배우고 물어서 발전해 가는 것이 학문의 기본인데, 주자를 의심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배척했으니 이는 중세 마녀사냥의 다름없으며, 배움이 교조적인 믿음으로 변질하여 종파를 이룬 것이다.

한편, 본문에 일본 학자들은 조선인의 단결력 부족을 조선시대 때 시행된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뽑았던 조선시대의 능력주의 때문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 학자들은 이 능력주의는 계승해야 할 정신적 자산이라 했는데, 양반 사대부들을 위한, 즉 소수 권력층을 위한 능력주의가 과연 진정한 능력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능력주의는 최소한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다수인 백성이 보기에는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능력주의의 표방이라기보다는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었다. 능력주의는 지나치다 보면 엘리트주의를 낳고 엘리트주의는 소외를 불러온다. 이런 사회는 서로 대함에 있어 배려와 협력을 구하기보다는 상대를 밝고 올라가야 할 계단이자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혹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선택적이고 일시적으로 협력하고 필요 없어지면 떨어내 버리는 정떨어지는 사회가 될 위험이 있다. 아마도 지금 그렇게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하이델베르크인을 물리치고 지구의 주류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협력이었다. 곧 인류의 역사는 협력의 역사였다는 말이다.

렇다고, 조선시대 양반들에게서 배울 점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전문 정치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관직을 위해 매진해왔고, 또 그것밖에는 가질 직업이 없었다. 그리고 조정의 주요 관직에 등용되려면 학문뿐만 아니라 도덕적 수양도 필요했다. 지금처럼 돈, 줄 서기, 번지르르한 말로 정치에 뛰어드는 인물들과는 수준부터가 달랐다. 우리가 양반을 명분과 의리만 내세운다며 비난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이 죄가 있건 없건 일단 탄핵을 받으면 관직에서 물러날 줄 아는 염치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비리를 저지르고 부패를 일삼고 선거 공약이나 자신의 주장을 박쥐처럼 줏대 없이 번복해도 어찌 된 것이 고개는 더 뻣뻣해진다. 이젠 그 의리조차 찾아볼 수 없고, 명분은 곧 눈앞의 실리일 뿐이다. 그 실리를 좇아 중상모략을 일삼고 배신과 음모가 판을 치는 사회가 21세기 정치인의 기본자세다. 조선의 붕당 정치가 당쟁으로 변질하면서 나라를 좀먹고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듯이 지금의 정치도 안정을 찾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파국을 가져올지 모른다. 정치는 널리 다스리고 어루만져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단으로 권력을 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요즘의 정치인들은 과연 정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지은이 이성무는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시종일관 깎아내리고 있다. 나라인포테크의 우리말 사전에서는 “'민비'는 일제 강점기에 '명성황후'를 낮추어 부르던 명칭입니다. (2009.6.11)”라고 표기된다. 책을 잘 보다가 ‘민비’라는 단어를 보고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욱’하는 뭔가가 가슴 밑바닥에서 솟았지만, 내 책이 아닌 시민의 재산임을 내 머리보다 먼저 눈치챈 존경스러운 나의 손과 사랑스러운 팔에 의해 책이 파손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사 당한 장옥정도 희빈 장 씨라는 어엿한 호칭이 있는데, 억울하게 외국인에게 암살당한 황후에 대한 지은이의 호칭을 보면서 역사학자로서 가져야 할 객관성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웠다. 출판은 여러 검증을 거치는 걸로 알기에 ‘민비’라는 호칭은 무의식적이라기보다는 지은이의 의도된 표기일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당쟁사』는 읽어볼 만한 역사책인데, 이것은 옥에 티라고 해도 너무 치명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 아는 거라면 꼭 누구라도 좋으니 지적해 주기 바란다.

이 리뷰는 2012년 07월 25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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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9.

[책 리뷰]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민중의 해학 ~ 구덩이(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추천하는 책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민중의 해학

원제: Котлован(The Foundation Pit) by Андрей Платонов
“근절했다고?” 그는 외친다. “오늘은 내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이 끝장날 거 요. 그리고 결국은 당신들 우두머리 한 사람만 살아서 사회주의를 맞이하게 될 거요!” (『구덩이』 중에서)

작품의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는 독특했다. 그리고 난해했다. 인물들이 사건을 구성하고 작품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옮긴이 해설을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후기는 왠지 횡설수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뭐 지금까지의 모든 후기가 나만의 쓸쓸한 횡설수설임에는 부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냥 뭔가를 읽었으니, 뭔가를 써야겠다는 어느 한 인간이 가진 건전한 욕망의 분출이라 봐주면 다행이다.

손을 잡으라고까지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다. 싫더라도 인내심을 발휘해 나와 함께 안드레이 플라토노비치 플라토노프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보자. ‘구덩이’라고 하니까 왠지 못 갈 곳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작품은 구소련 스탈린시대의 실상을 꾸밈없이 작가가 본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준, 보기 드문 소재의 작품이니 인내의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 약속한다.

뚜렷한 주인공 없는 이 작품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서로 만나 섞이고 부딪치면서, 희망이 솔솔 솟아나는 듯하면서도 쉽게 깨지는 구소련 민중의 삶을 담고 있다. 잉고 슐체의 『심플 스토리』처럼 특정한 주인공이 아닌 동네 주민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 가듯 『구덩이』에서도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야기의 시작은 노동 중 사색에 빠지는 이유로 기계 공장에서 해고된 보셰프에서부터 시작된다.

보셰프는 방황하며 거리를 떠돌아다니다 변두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듣고는 "개도 지쳤구나, 단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거야, 나처럼." 라고 혼잣말하는가 하면, 마른 잎을 주워 자루에 담으며, ‘넌 인생의 의미를 갖지 못했구나.’, ‘여기서 쉬어라, 네가 왜 살고 죽었는지 내가 알아낼 테니. 넌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온 세상 안에서 혼자 시들고 있으니, 내가 너를 간직 하고 기억해 주마.' 등 이 세상에 버려진 모든 사물에 빈약한 동정심을 느꼈다.

이런 보셰프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살며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 고민하고, 헤매다가 도착하는 곳이 노동자들을 위한 집을 짓는 건설 현장의 ‘구덩이’이다. 보셰프는 이렇게 노동자들 무리에 합세하여 노동자들과 같이 ‘구덩이’를 파게 된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굴착기 기사 치클린이 등장한다. 치클린은 젊었을 때는 그의 우람한 육체적 매력 덕분에 뭇 여자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불씨를 지피고 그들 모두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려다 그녀들의 질투 때문에 상처를 받았었고, 결국 행패를 부리다 감옥까지 간 과격한 성정이 숨겨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중에 엄마를 잃은 소녀 나스탸의 안락한 잠자리를 위해 아빠처럼 자신의 배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죽은 소녀의 엄마에게는 애도의 입맞춤을, 살해당한 동료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런 치클린에 의해 이야기가 ‘구덩이’를 파는 현장인 노동자 막사에서 ‘조직의 뜰’, ‘조직의 집’이 있는 집단농장으로 이동되는데, 치클린은 집단농장 건설 현장에서 대장장이 곰과 함께 부농들의 집을 습격하는데 앞장서고, 당의 지령에 의해 축출당한 집단농장 책임자인 활동가를 한 방에 죽이게 되면서 과거의 험한 성정을 다시 보여준다.

보셰프가 ‘구덩이’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노동자들로는 사프로노프와 코즐로프가 있다.

사프로노프는 삶의 아름다움과 교양 있는 지성을 사랑하면서, 사회주의가 곧 과학이라고 믿는 인물이니만큼 그는 무가치와 무지를 배척했다. 그리고 야윈 보셰프보다 더 허약한 코즐로프는 그 자신이 터득한 지혜와 식견, 배경 지식으로 여러 정부•공공 기관의 종업원들을 겁주는 방식으로 만족과 이익을 얻는 비열한 기회주의자이다. 그는 건축기사 프루솁스키가 노동자들 틈 속에 섞여 있는 모습을 불평할 정도로 확고한 계급주의자이기도 하다.

여기에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은 건축기사 프루솁스키가 있다. 그는 긍정적인 사회주의 인물상인 치클린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그는 나이 스물다섯에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필요한 인물인지 의심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한 인간적인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비록 시체지만 치클린이 프루솁스키가 잊지 못하는 여자 앞에 데려다 준 장면을 보면 건축기사는 따뜻한 인간적인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러 가지 죽은 사물이 그녀를 지켜 주게 내버려 두세요. 죽은 것도 결국 살아 있는 생물만큼 많으니 그들끼리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치클린은 벽의 벽돌을 쓰다듬고, 알지 못할 오래된 물건들을 몇 가지 집어서 죽은 여인 곁에 놓았고, 두 남자는 밖으로 나왔다. 여인은 그곳에 누워 그녀가 죽었던 그 영원불변의 나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가, 치클린은 되돌아가서 부서진 벽돌 조각과 오래된 돌과 다른 무거운 물건들로 죽은 여인에게 통하는 문을 막았다. 프루솁스키는 그를 돕지 않았고 나중에 물었다.
“왜 힘을 낭비합니까?”
“왜라니 무슨 뜻입니까?” 치클린은 놀랐다. “죽은 사람도 사람이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필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난 그녀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뭔가 아껴 두고 싶어요. 죽은 사람의 슬픔이나 그들의 유골을 볼 때면, 언제나 이런 느낌이 들어요. 나는 왜 살까!" (『구덩이』 중에서)

치클린의 인간적인 모습이 돋보이면서 그 누구보다 지식을 많이 배웠지만, 아직도 따뜻한 인간이 되지 못한 건축기사의 모습은 가정교육 부족과 과다한 경쟁, 대학 입시로 진정한 교육의 방향을 상실한 학교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배려가 부족해진 어린이와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남 얘기 같지가 않다. 작가 자신도 공과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지만, 지식인으로서 살면서 겪어야 했던 탄압과 억압 때문에, 프루솁스키를 통해 작가가 경험했던 허무한 지식인의 삶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러한 치클린의 인간적인 배려는 그를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을 동정할 줄 모르는 기사는 죽기로 마음먹고 하나뿐인 가족인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다짐도 하지만, 결국 그는 죽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편지도 못 보내는, 나약하고 나태한 인물로 비추어진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 지위상 자신의 아래인 치클린에게 보호를 받게 된다.

여기에 치클린의 오랜 동료로서 제국주의 때문에 불구가 됐다고 생각하는 자체프를 빼놓을 수 없다.

자체프는 툭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때리고 넘어뜨리는 폭력적 묘사로 적지 않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그만의 원칙으로 사회주의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다. 또한, 치클린처럼 소녀 나스탸에게는 꼼짝 못하는 부드러운 인간적인 면도 있다. 자체프는 특히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삥을 뜯으며 사는데, 그의 주 목표가 지역 노동조합 자문 위원회 회장 파시킨이다. 파시킨은 전형적인 부패 관료이다. 그렇다고 악한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자체프에게 대책 없이 뜯기기 때문이다. 또한, 마누라에게 잡혀 사는 파시킨은 소심하고 나약한 관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부패관료를 만날 때면 으레 솟아오르는 분노와 불만은 파시킨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무기력하게 자체프에게 강탈당하는 모습은 우습고 불쌍하다. ‘구덩이’ 현장의 노동자 막사 쪽 책임자가 파시킨이라면 지역 집단농장 책임자로는 활동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잠도 자지 않고 당을 위해 개인적인 모든 기쁨과 행복을 멀리하면서까지 온 힘을 기울이는, 출세에만 눈이 먼 관료이다. 그는 부농들을 뗏목에 태워 바다로 보내는 등 과잉 활동, 과잉 달성, 과잉 열성 탓에 당 지령에 의해 지도자의 위치에서 제거된다. 그리고 치클린에 의해 맞아 죽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모든 노동자의 중심에 소녀 나스탸가 있다. 소녀는 옛 타일 공장에서 부르주아였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치클린에 의해 노동자 막사로 오게 된다. 막사의 노동자들은 소녀를 건설 중인 인민들을 위한 집에 거주할 실체로서 떠받든다. 그러나 소녀는 "전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부르주아일까 봐 두려웠거든요.", "그럼 왜 관이 필요해요? 부르주아들만 죽어야 하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고요!” 등 당의 과격한 선전 구호를 남발하는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설 속 깜찍한 소녀의 이미지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아저씨들에게는 어리광도 부리고 투정을 부리는 등 나스탸는 그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따라 하고 보는 아직 철들지 않은 보통 소녀일 뿐이다.

이 작품엔 사람만이 아니라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연상시키지만 조금은 다른, 반(半)인격화된 동물이 등장한다. 바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상징인 곰 미하일이다. 곰은 노동자들을 이끄는 지도자 치클린과 함께 부농 탐지곰으로 활약한다. 곰은 부농들 앞에서 과거의 그들에게 받았던 고통을 떠올리며 부르짖는 ‘으르렁’거리는 부농 발견신호로 탐지곰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하지만, 등장하는 모든 노동자가 그러하듯, 소녀 나스탸 앞에서는 한쪽 눈도 찡긋해 보이고, 부농들 때문에 겨울에도 없어지지 않고 날아다닌다는 파리를 소녀에게 잡아주기 위해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곰에게서조차 소녀는 노동자들의 희망이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처럼 이 작품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극히 인간적이기에 보통 소설의 주요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선과 악의 대립은 없다.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보셰프나 건축기사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실적인 등장인물의 모습은 염상섭의 『무화과』에 등장하는 김홍근처럼 독특한 개성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내가 보기엔 마이클 코넬리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형사 해리 보슈처럼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진다. 고민하며 절망에 빠지다가도 다시 희망을 발견해 희미한 미소와 함께 행복을 꿈꾸는, 아니면 자신만의 일을 발견하고 그 순간만은 모든 고민을 잊고 일에 몰두하는, 이렇게 살아가는 마냥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제나 착한 사람도 아닌,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가진 지극히 인간다운 인간을 이 작품에서 독자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범한 인물들을 통해 작품은 당대 구소련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비판한다.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스탈린의 무리한 욕심으로 영문도 모른 채 국가정책에 휩쓸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농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작가가 그 시기에 직접 본 그대로 생생하게 이 작품에 담아 놨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작품에서 보여준 스탈린 시대의 민중의 삶은 공포 그 자체다.

의무적으로 음식을 섭취하며 즐기지는 않는 일꾼들, 미리 자신들의 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눕는 연습까지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유 재산이 있는 농민들, 노동자들의 대표 치클린에게 한 방 먹고도 치클린에게 자신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까 봐 겁이 나서 쓰러지지도 못하는 교회의 신부, 빈농들이 아무 죄책감 없이 부농의 집들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모습, 그렇게 당하는 부농들은 한 개라도 덜 빼앗기려고 자신의 가축을 먹거나 죽이는 모습,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민중에게 선사해 준 공포 정치의 압권은 활동가 계획에 의해 부농들을 뗏목에 태워 바다로 보내기 전에 부농들이 가족과 이웃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용서할 게 없소, 니카노르 페트로비치. 나도 용서해 주시오.”
모두 줄지어 선 사람들 전체에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고, 이제까지 낯설었던 몸을 껴안았으며,모든 입술은 슬프고도 정답게 모든 다른 입술들에 입을 맞추었다.
“안녕히 가세요, 다리야 아줌마. 제가 아줌마네 곡식 창고를 불태워 버린 거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하느님이 용서하실 거다, 알료샤. 이제 그 창고는 어차피 내 것도 아니란다.”
그때까지 그들은 서로 기억하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으며 살아왔으므로, 많은 애처로운 입술들이 서로 이런 감정을 느끼며 그들의 새로운 친척을 영원토록 기억하기 위해 서 있었다.
“자, 이제 형제가 됩시다, 스테판.”
“잘 가시오,예고르. 우린 서로 적대하며 살았지만 떳떳한 마음으로 헤어지는구려.”
입맞춤이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에게 몸을 낮게 숙여 서로 절을 했고, 자유롭고 텅 빈 마음으로 일어섰다. (『구덩이』 중에서)

이들은 마음껏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뗏목을 타고 강물 위에서 남은 농민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작가는 이렇게 사회주의의 부조리한 모습을 고통과 슬픔으로만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씁쓸한 웃음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자체프가 프루솁스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프루솁스키 동무! 더 발달한 과학을 성취하면 썩어 버린 사람들을 부활시킬 수 있을까요,없을까요?”
“없을 거요.”
프루솁스키가 말했다.
“거짓말. " 자체프가 눈을 뜨지 않고 꾸짖듯이 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레닌이 멀쩡한 몸으로 모스크바에 누워 있겠어?……." (『구덩이』 중에서)

보셰프와 치클린이 집단농장 변두리에 있는 ‘조직의 뜰’ 근처를 돌아보다 사회화된 말들을 발견했다.

말들은 고른 발걸음으로, 머리를 낮추어 땅에서 자라는 음식을 뜯어 먹지 않고, 단결된 집단을 이루어 거리를 지나 물이 있는 산골짜기로 내려갔다. 정상적인 양의 물을 마시고 나서 말들은 청결을 위하여 물속에 들어가 한동안 서 있다가 물가의 마른 땅으로 올라가 대열과 단결성을 흩뜨리지 않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번째 집에서 말들은 흩어졌다. 한 마리는 초가지붕 앞에 멈추어 서서 지푸라기를 물어뜯기 시작했고, 또 한 마리는 고개를 숙이고 빈약한 건초 찌꺼기를 입 안에 그러모으기 시작했으며, 더 불량한 말들은 농장으로 들어가 오래되고 친숙한 장소에서 곡물 다발을 물어다가 거리로 내갔다.

동물들은 각자 능력에 맞게 자기 몫의 식량을 집어 들고 모든 말이 전에 나왔던 문쪽으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처음에 나왔던 말들은 공용 출입구에서 나머지 마집단(馬集團)을 기다렸고,모두 함께 모여서자 앞에 있는 말이 머리로 문을 밀어 열고, 대열 전체가 식량과 함께 뜰로 들어갔다. 말들은 뜰에서 주둥이를 열었고, 건초는 가운데에 한 무더기로 떨어졌으며, 그러자 사회화된 가축들은 건초더미 주위에 모여들어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의 보살핌 없이도 조직적으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보셰프와 치클린이 사회화된 말들을 발견하고 그 뜰 너머에 있는 낡은 오두막을 찾아 들어갔다.

말을 조직에 빼앗기고 누워서 멈춰 버린 남편과 우는 그의 아내. 또 한 집에는 관 속에 누워 반쯤 죽은 채로 있었다. 농부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고, 죽음의 슬픔 탓인 소리를 질렀다.
“죽은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소.”
보셰프가 농부에게 말했다.
“내지 않겠소.”
남자는 동의하고는 정부 시책을 따랐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며 누워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구덩이』 중에서)

해학도 보통의 해학이 아닌 사회주의적 해학이었다.

플라토노프가 보는 현실은 같은 구소련 작가인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창시자 고리키의 소설과는 바라보는 관점이 사뭇 다르다. 고리키가 프롤레타리아를 보는 시선에는 사회주의 사회의 인정과 긍정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들에 대한 각각의 개인적 삶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담겨 있다. 반면에 플라토노프는 이 작품에서 사회주의가 만들어낸,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증과 의문에 지쳐가는 민중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차분하게 분노 없이 바라보고 있다. 고리키의 작품에는 민중 개개인의 개인적인 고민은 있지만, 그 민중 전체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각자 나름의 고민거리를 가진 개인이 모여, 집 없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건설에 동참하여 함께 구덩이를 판다. 이때부터 그들은 이 구덩이가 그들의 이상과 미래, 희망, 곧 그들의 존재와 삶의 이유가 된다. 거기에 엄마를 잃은 소녀 나스탸가 이들의 무리에 동참하여 그들의 마음은 더욱 부풀어 오른다. 집 없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집을 짓기는 하지만, 과연 거기에 누가 살지는 그들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 소녀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남으로써 그들이 완성할 미래의 집에서 살아가면서 사회주의 이상을 완성할 실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의 구덩이에 아이러니하게 소녀의 시체를 묻어버림으로써 그들의 이상과 희망은 무너진다. 그것은 곧 사회주의의 종말과 다름없다.

두 작가 다 같은 사회주의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들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렇게 서로의 시점은 정반대이고, 작품의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리끼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고, 플라토노프는 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토지 개발 기술자로 일했던 지식인 출신이라는, 시대가 만들어 낸 불협화음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렇게 이 작품에는 1920년대 말 구소련 스탈린 독재 시대에 독단적인 경제정책의 여파로 고달프고 처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민중들의 삶을 여과 없이 작가가 보고 느낀 그대로 담겨 있다. 내가 『알라무트』에서 인간이 오만을 넘어 신이 되고자 할 때 생겨나는 그 파장은 주변에 엄청난 불행과 고통을 준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치클린이 부농들을 근절하는 과정에서 한 부농이 그에게 소리치는 말로 끝을 맺으려 한다.

“근절했다고?” 그는 외친다. “오늘은 내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이 끝장날 거 요. 그리고 결국은 당신들 우두머리 한 사람만 살아서 사회주의를 맞이하게 될 거요!” (『구덩이』 중에서)

이것은 몇 년 후에 '당신들의 우두머리’인 스탈린이 실제로 자행한 대숙청을 무서울 만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내가 예전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좋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미래를 예견한다.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다름 아닌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당신들의 우무머리’가 된 것이다.

참고로, 이 후기를 작성하는 데에는 옮긴이의 해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다른 작품의 후기를 작성할 때도 작품 맨 뒤에 있는 해설을 참고할 수밖에 없지만, 이번처럼 난해한 작품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내공으로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더더욱 해설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의 러시아 문학으로 고리키의 작품과 솔제니친의 『암병동』, 『수용소군도』, 그리고 러시아 내전을 다룬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디스토피아 문학으로는 조지 오웰은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추천한다. 우리나라의 그 시기의 작품으로 이기영의 『고향』을 추천한다.

이 리뷰는 2012년 07월 1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Share:

2012. 7. 18.

[책 리뷰] 짓궂으면서도 향기로운 메타포의 향연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짓궂으면서도 향기로운 메타포의 향연

원제: El cartero de Neruda/The Postman by Antonio Skármeta
“시인 동무,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에서)

때 나처럼 고전 영화에 심취했던 영화마니아라면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1994년도 작품 『일 포스티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오래전에 감상한 기억이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는 책과는 달리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책을 보고 나서도 영화에 대해서는 영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중에 다시 한 번 감상해 봐야겠다. 영화 한 편을 끝까지 감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기껏 길어봤자 보통은 두 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책 한 편을 정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영화보다는 몇 배 또는 수십 배 이상 길다. 또한, 영화는 부담없이 편하게 수동적으로도 감상할 수 있지만, 책은 의지와 인내심, 그리고 나름대로 지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각각 한 편씩에 소비되는 시간과 노력이 다르다 보니 머리에 기억되는 정도도 다른 것 같다. 한때 영화광이었을 때에는 영화가 취미생활로나 시간 보내기로나 최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가까이하고부터는 책에서 얻는 감동과 즐거움은 모든 책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많은 책이 읽고 나서 얻은 느낌과 감동 같은 인상들은 살에 깊게 베인 상처처럼 가슴속에 뚜렷하게 새겨진다는 걸 알았다. 이는 청각, 시각 등을 통한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머리와 마음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상상과 공상에서 얻는 내부로부터의 자극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말하고도 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은 가끔 영화를 봐도 한 번에 끝까지 감상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내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한 번에 끝까지 본 영화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건방진 말이지만, 책에 재미 좀 붙이다 보니 영화는 가끔 기분 전환용으로 사용하는 소품 정도로 전락했다고나 할까나. 단순한 재미는 모르겠지만, 영화에 대한 정감은 최신 영화보다는 60~80년대 영화가 더 가는 것 같다.

아무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통해 끈적끈적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고, 거칠면서도 정감있게 다가오는 남미 문학을 오래간만에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번역해서 20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보다는 조금 긴 중편 정도의 분량이지만, 작품에서 얻는 감동의 깊이와 여운은 어느 작품 못지않았다.

가 책을 읽고 이렇게 블로그에 후기를 쓰는 이유는 첫째, 작품이 준 기억과 느낌을 잊어버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게 머릿속에 꾹꾹 집어넣으려고, 둘째, 그렇게 해서 먼 훗날 전에 읽었던 책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대출하는 실수를 막으려고, 셋째, 누군가 이 후기를 읽고 책 한 권이라도 더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소설책 같은 경우 후기에는 전체 줄거리는 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미리 전체 줄거리를 읽고 본다면 당연히 그 감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책을 읽기 위한 좋은 미끼가 되도록 전체 줄거리 중에서 앞부분 정도만 작품에서 말 그대로 빼내어서(나의 중학생 정도의 작문실력으로는 이것이 최선인 것 같다.), 그리고 옮긴이의 해설을 참고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굴려 정리해왔다. 그래서 이렇게 작품의 내용을 마음대로 짜깁기하는 내 후기가 저작권에 문제가 되는지 심히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글을 작성할 때 ‘네이버 오늘의 책’의 선택 칸에도 선택한다. 저작권에 문제가 되면 네이버에서 귀띔해 줄 거라 믿고. 또한, 혹시나 하는 기대심리에. 아무튼, 인간의 그 얄팍한 주변머리는.

이상 이것이 내 뜻이지만 세상일이 어디 내 뜻대로 되겠는가. 그런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전체 줄거리(이 부분은 내용이 너무 길어 구글 블로거로 옮기면서 삭제) 를 넣어야 할까 고민을 좀 했다. 내용이 짧기도 했지만, 작품의 줄거리보다 작품 전체에 생명의 젖줄처럼 달콤하고 매끈하게 흐르는 은유(메타포)가 이 작품 전체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접하기 전에 미리 전체 줄거리를 안다고 해도 작품에서 얻는 재미와 감동이 많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줄거리뿐만 아니라 문장 자체가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작가 스카르메타는 작품의 메타포를 통해 감동만 주는 건 아니었다. 유쾌하고 통쾌한, 그리고 은근하지만 절대 부담스럽지만은 않은 성적인 유머들이 필요적절하게 책 속에 담겨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를 꺼내 보자.

소녀가 마리오에게 사랑 고백을 듣고 집에 돌아와 베아트리스 어머니에게 들볶이는 장면 중 어머니의 욕설.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엉덩짝은 범선 돛,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그리고 마리오의 결혼식 후에 코소메가 부하 직원인 마리오에게 휴가를 주면서 한마디 툭 던진 절묘한 메타포.

“마음이 뽕밭에 가 있는데 어디 나라 생각이 나겠어.”

주점에서 네루다의 노벨상 소상 소감을 들으며 기쁨을 즐기고 있을 때, 코소메가 피서를 온 중년의 여인에게 납치(?)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 다음 날 날이 밝을 무렵에 돌아온 코소메는 중년이지만 삼삼한 여인과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러 그녀를 따라갔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듣고 소녀의 어머니가 툭 던진 입바른 소리.

“쏟아지는 정충 때문에 갔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타포는 아니지만 코소메의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쾌한 유물론 강의.

“유식한 척하는 양반,유물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더불어, 마리오와 시인이 함께 주점에서 본 아름답고 육감적인 베아트리스에 대한 적당히 선정적이면서도 거부감이 없는 묘사, 시인이 마리오에게 선물로 준 비틀스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장면의 생동감에다 신비감을 더한 환상적인 묘사는 이 작품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읽을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진지하면서도 때론 우스꽝스럽기도 한 파블로 네루다는 이 작품에만 등장하는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민중시인이었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에 오른 최초의 인물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피노체트 쿠데타의 의해 살해된 그달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아옌데 대통령은 이사벨 아옌데의 삼촌이기도 하다.

민중시인의 이미지를 보통 떠올려 보면, 투쟁 정신을 바탕으로 조금은 딱딱하고 경직된 인물이 떠오른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을 떠올려봐라. 강직하고 용맹한 그림은 쉽게 떠오르지만, 잔병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가족의 일에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매우 인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네루다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이 작품을 통해 부드럽고 여유로운 친근한 이미지로 재창조되었다. 실제로도 네루다는 칩거생활을 하며 매우 인간적인 이미지를 풍겼다고 한다. 역시 그는 진정한 민중시인이었던 것이다.

게 있어 언제나 남미 문학은 색다른 체험이었다. 비난의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미나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일본 문학과는 색깔과 맛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느끼하면서 바삭바삭한 군만두 같은 영미 문학, 달콤하고도 쌉싸래한 초콜릿 같은 프랑스 문학, 고소하고 향긋한 참깨 같은 러시아 문학, 담백하고 깔끔한 생선회 같은 일본 문학. 그렇다면 남미 문학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람의 발길이 오래전에 끊긴 시골 뒷간에 막 들어갔을 때, 은근슬쩍 기대했던 냄새와는 달리 생각보다 구수하고 정겨운 냄새에 놀랐을 때 받은 그 느낌이라면 어느 정도 맞을 것 같다. 기분 나쁘지 않게 끈적거리는 것이 몸과 마음을 더듬어 소름이 돋아나게 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애절한 사연으로 눈물이 핑 돌게도 하고, 태초의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으로 웃음과 감동을 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괴롭고 힘든 현실을 아예 잊어버리고 몽환적인 환상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기도 한다.

신대륙 발견 이후 남미가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미국의 등쌀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점철된 남미의 불안정하고도 불행했던 민주화가 문제였을까. 그래서 어떤 작품은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을 읽고 나도 가슴속에 엉겨 있는 뭔가가 떨어지지도 않고, 그렇게 묵직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카르메타는 ‘문학은 엄숙하고 진지하기 만 하기보다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는 마리오의 생동감 있는 삶을 통해서는 로맨스와 해학의 ‘가벼움’을, 마리오의 실종과 쿠데타, 네루다의 죽음을 통해서는 ‘무거움’을 창조해내어서 조화로운 화환처럼 보기도 좋고 맛도 좋게 엮었던 것이다. 또한, 옮긴이의 말처럼 마리오가 시를 통해서 의식을 깨우치는 모습과 소녀의 어머니까지 네루다의 시를 인용할 줄 아는 모습은 네루다의 시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칠레 국민의 모두의 것임을 보여준다.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칠레를 대표하는 국민시인이었던 것이다. 이는 네루다라는 시인은 인류의 문명이 존재하는 한 칠레 국민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예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하나의 견고하지만 부드러운 한 편의 거대한 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특징이다.

칩거 중인 칠레의 국민시인 네루다와 네루다와의 만남으로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성장하는 마리오. 그 둘의 아마존 늪처럼 끈끈하고 촉촉한 우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이슬라 네그라의 평화로운 바닷가의 작품 속으로 한여름 무더위를 잊고 시원하게 달려가 보자. 아니 갈매기처럼 두 팔을 활짝 벌려 찰나 속에 숨겨진 영원의 열매를 따러 힘껏 날아가 보자.

참고로 남미 문학에 흥미를 느낀다면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들과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그리고 V.S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를 추천한다.

이 리뷰는 2012년 07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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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2.

[책 리뷰] 르네상스 화가가 예견한 현대인의...~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마이클 코넬리)

르네상스 화가가 예견한 현대인의 어둠 속의 어둠

원제: A Darkness More Than Night by Michael Connelly

래간만에 다시 만난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이었다. TV로 생중계되는 매우 세속적인 모습의 법정에서 증언하는 보슈지만, 아쉽게도 이번 작품의 중심인물은 보슈 형사가 아니라, 전직 FBI 프로파일러 테리 매케일렙이었다. 매케일렙은 『블러드 워크』에 등장한다고 하는데, 아직 그 작품은 기회가 없어서 못 보았다. 그래서 그 작품에서 매케일렙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6년 전 (『라스트 코요테』 참고) 보슈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파운즈 과장에게 한 방을 날리는 바람에 비자발적 스트레스로 휴직을 받았었다. 그 원인은 보슈가 정당방위를 가장한 살인사건이라고 판단한, 에드워드 건의 매춘부 살해 사건을 파운즈 과장의 쓸데없는 참견으로 망쳤기 때문이었다. 이런 보슈를 건을 죽인 유력한 용의자로 매케일렙과 윈스턴은 지목한다. 지난 시리즈들에서도 보슈는 여러 번 내사를 받았었다. 일부는 혐의를 벗기도 했고, 일부는 어빙 국장의 침묵에 그냥 묻히기도 했다. 정말 우여곡절이 많은 보슈의 형사 생활이다. 웬만한 체력과 뚝심 아니고는 버티지 못하리라.

아무튼, 매케일렙은 초반에 증거를 수집하면서 나름대로 프로파일을 해본다. 이런 하나님을 거론한 사건은 하나님의 일처럼 끝나는 법이 없다는 둥, 올빼미 조각상을 추적하며 악마, 지옥 어쩌고저쩌고하는 둥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신통치가 못했다. 팻 브라운의 『프로파일러』라는 책이 기억나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맞아떨어지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참고 정도로만 활용 가능한 게 프로파일이다. 용한 점쟁이가 점치는 것보다 못한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거만 믿고 수사를 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매케일렙이 실력이 없는 건 아니다. 예전에 보슈의 요청을 받아 멋지게 한 건 한 경우가 있었다.

는 10년도 더 전이었던 '길 잃은 여자아이 사건'이었다. 피살자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아이는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 정도로 보였다. 알몸의 산업용 세척제로 씻긴 시체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근처의 경치 좋은 곳 중 한 곳에서 발견되었고 보슈와 당시 파트너였던, 아쉽게도 억울한 누명으로 세상을 떠난 전직 강력반 형사 프랭키 쉬헌이 맡았었다. 보슈가 아직 본청에 있을 때였고, 매케일렙이 콴티코에서 막 돌아와 처음 맡은 사건이었다.

경찰은 피해자 엉덩이에 찍힌 자동차 번호판 중 ‘1, J, H 또는 K 또는 L’라는 문자만을 가지고 용의자를 남자 마흔여섯 명으로 좁혀 매케일렙에게 프로파일을 요청한 것이다. 매케일렙은 두 명까지 좁혔고, 무대 기술자로 일하는 빅터 세권을 세권의 집에서 직접 만나보고는 그를 지목했다. 범인의 집 거실 책꽂이에 낡아 보이는 『컬렉터』라는 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보슈는 끝까지 죽은 소녀를 생각해 준 사람이 없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면서 시엘로 아줄(푸른 하늘) 이라는 이름을 죽은 소녀에게 지어주었다. 혹시라도 하늘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매케일렙도 이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자신의 소중한 딸에게 그 이름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매케일렙은 보슈를 높이 평가했었다. 사회에 꼭 필요한 스타일의 경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매케일렙은 이제 그가 너무 많이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둠으로 들어가면,어둠도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우리가 어둠을 내려다보면, 어둠도 우리를 올려다본다.”- 매케일렙.

여기에 니체의 말을 더하면,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매케일렙이 보기에 보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그렇게 보슈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여기에다 보슈는 확고한 권선징악의 신봉자였다.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세상은 돌고 돌아서 결국 뿌린 대로 거두게 돼 있거든. 비록 자네처럼 하나님의 손을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고 믿어.” - 보슈.

그리고 누구보다도 어둠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이를 찾아내고 나서 우리 모두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이 일을 하면서 그때만큼 들뜬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난 보슈 형사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꼭 아빠가 되세요. 아까 아이한테 말하는 걸 보니까 친딸한테 하는 것 같던데요. '그랬더니 보슈 형사는 대뜸 고개를 저으면서 안 된다고 했어요. ‘난 그저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그러고는 그냥 가 버렸어요.”- 윈스턴.

가 예전에 링컨 라임 시리즈 전부를 보면서 뒤로 갈수록 첫 작품의 충격에서 점점 멀어진다고 말했었다. 그렇다고 맨 마지막 편에 가서는 쓰레기가 되었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첫 작품인 『본 컬렉터』에 비해 약간 재미가 떨어진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해리 보슈 시리즈는 6편 『앤젤스 플라이트』까지는 그런 기미는 없었다. 그래서 내심 만족하면서도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결국, 그런 우려가 이번 작품을 통해 드러났다. 마이클 코넬리는 역시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의 한숨과 안도의 한숨을 동시에 뱉어낼 수 있었지만, 앞으로의 읽어야 할 남은 해리 보슈 시리즈를 생각하며, 내 머리는 망설임과 걱정으로 뒤죽박죽 되어 혼란스러워졌다.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은 보슈가 중심이 아니라 그런지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재미나 긴장감이 많이 떨어졌다. 구성이 어설프거나 억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반전도 약했다. 아무래도 보슈 형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실망에 작품의 모든 요소가 눈에 차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보슈 형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넘어야 할 산인 건 분명하다. 보슈 형사의 억울한 누명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은가.

참고로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 등장하는 화가 보슈는 실존했던 인물이고 화가 보슈의 작품들도 역시 존재한다. 구글에서 검색해서 그림을 감상하면 매케일렙의 생각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갈 것이다.

이 리뷰는 2012년 07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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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4.

[책 리뷰] 신에 대한 도전을 넘어 신이 되고자 하는... ~ 알라무트(블라디미르 바르톨)

신에 대한 도전을 넘어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이 불러온 파멸

원제: Alamut by Vladimir Bartol

라디미르 바르톨의 『알라무트』는 슬로베니아어로 쓰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용감하게 좌파와 우파의 전체주의를 똑같이 거부한 반체제적인 인사로 찍힌 작가 블라디미르 바르톨은 검열을 속이고자 하산을 주인공으로 한 모험소설을 택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책은 나오자마자 사장되었고, 1967년 작가 사망 전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바르톨은 치밀하게 구성한 가상의 역사 뒤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정치 현상을 묘사하는 속임수를 씀으로써, '산중 노인'이라 불리는 이른바 하산 이븐 사바라는 무시무시한 인물을 통해 현대의 '완벽한' 독재자들의 초상을 그리려 했다. 작가 스스로 세 명의 모델인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에게서 영감을 얻어 썼다고 고백했다고 했으니, 독자들은 소설 『알라무트』를 감상하면서 위의 세 인물과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세 독재자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서문’의 설명을 보고 세 명의 인물과 어울리는 인물 세 명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제대로 못 보았을 수도 있겠다. 반대로 독자는 하산 이브 사바라는 인물에서 그 세 명의 독재자의 모습을 찾을 수도 있겠다.

『알라무트』이 늦게나마 발견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거기에 한국어로까지 번역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다름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못 끌었던, 이슬람 자살테러의 시초와 배경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가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준다고 하더니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많은 역사소설이 있지만 11세기 이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니 중동이나 이슬람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한국어로 번역된 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영미나 프랑스, 러시아, 일본 작가들이 주류이면서도 그 지역들에서 좋은 문학 작품과 인기있는 작품 대부분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내가 읽어본 책 중에 이슬람 문화를 배경으로 한 것은 나지브 마흐푸즈의 『게벨라위의 아이들』 정도인 것 같다. 뭐 이 작품도 정확히 이슬람 문화라고 하기에는 좀 그럴 수도 있겠다. 이집트가 오래전부터 서구의 세력 아래에 놓여 있어서 다른 이슬람 국가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탄 테러도 자주 발생하나 보다. 아무튼, 비주류도 좋아하는 난 가끔 남미 문학에서도 진주를 발견하곤 하는데, 이사벨 아옌데가 그런 진주 중 하나다.

이제 암살자의 기원, ‘아사신 Assassin’을 창조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인물인 이스마일교파의 최고 지도자였던 하산 이브 사바가, 왜 그런 조직을 만들고 실행했던 이유와 그 배경을 알아보려고 그가 지배했던 11세기 이란 북부로 떠나보자.

1092년 봄 이란 북부, 부하라에서 팔려온 어린 처녀가 카라반과 함께 낙타 쌍봉 사이에 있는 가마에 실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호라산 북부 지역을 거쳐 엘부르즈산맥 자락에 이르는 옛 군사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가마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에 대해 불안과 동시에 호기심을 느끼는 큰 키에 말라깽이 소녀 할리마가 타고 있었다.

그렇게 할리마는 비밀스러운 곳에 도착하고,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미리암의 안내로 미녀들이 즐비한 정원으로 안내되었다. 깡마르고 엄격한 인상의 여자 아파마가 마중나왔고, 이 정원에 거주하는 모든 처녀의 친구 아흐리만 치타도 있었다. 할리마는 유리 모자이크 천장에서 무지갯빛이 비쳐드는 둥근 천장이 높은 방에서 목욕하고, 긴 여행에 지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고 처음 보는 맛있는 과일들을 맛보며 저마다 팔려온 기구한 사연의 아픔을 간직한 처녀들에게 둘러싸여 즐겁게 지내고, 새 옷을 입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다 생각하는 할리마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부터 처녀들을 위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루 일과를 보낸 할리마는 그날 있었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운율에 맞춰서 말하는 빨강 터번을 한 우스꽝스러운 아디의 코란 수업,몸이 고무처럼 유연한 무용 선생 아사드,괴상하게 차려입고 사랑의 기술과 성교육을 하는 아파마,베일에 싸인 미리암,처녀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흑인 환관들. 오래전부터 미지의 세계를 꿈꿔오면서 경이로운 모험을 해보고 싶지 않았던가! ‘정말 잘됐어.’ 하고 속으로 말하면서 할리마는 잠을 청했다.

할리마가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인의 낙원에 이른 것과 같은 시기에 검은색 당나귀를 타고 널찍한 군사도로로 접어드는 젊은이 아바니가 있었다. 아바니의 할아버지 타히르는 사바에서 이스마일 분파를 설립했던 분이었다. 겉으로는 알리를 숭배했지만, 비밀리에 셀주크 족의 군주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배신자 때문에 발각돼 대재상 니잠 알 물크의 명에 따라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했고 분파는 흩어졌다. 아바니는 아버지의 명으로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분이 운영하는 천연의 요새 알라무트 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기에선 이스마일파 사람들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바위를 깎아 세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수염은 짧고 살집이 좋은 흰 터번을 쓴 50대의 미누체헤르 중대장을 만나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온 자신의 사정을 말했다. 타히르의 손자라는 말에 놀라는 중대장은 타히르가 자기와 최고 지도자의 친구였다며 환대하는 아부 소라케 데이(지도자라는 호칭)에게 아바니를 안내했다. 아바니는 이븐 타히르(타히르의 아들이라는 뜻)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페다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페다인은 최고 지도자의 명에 따라 맹목적으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이스마일교도의 최정예 병사였다.

다음 날 아침부터 기병대의 돌격훈련에 이어 검 다루기, 창던지기, 활쏘기 훈련 등 고된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 중 깡마른 거인에 눈초리가 매서운 압둘 말리크 데이의 맨손으로 수직 암벽 타기나 기절할 때까지 숨 멈추기 훈련은 이븐 타히르 뿐만 아니라 모든 생도에게도 고된 훈련이었다. 거기에 뜨겁게 달궈진 숯불 위를 맨발로 걷는 훈련은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단련이었다. 이러한 육체적 훈련이 전부가 아니었다. 비쩍 마른 험상궂은 표정을 가진 늙은 전도사 이브라힘 데이의 아랍어 문법 수업, 아부 소라카 데이의 시아파 역사 수업, 땅딸막한 그리스인 의사 알 하킴의 인체 구조의 기능과 각 지역 및 국가의 문화 예절에 대한 수업 등 정신적 훈련을 위해서도 다양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븐 타히르는 동료로부터 알라신에게 천국의 열쇠를 받았기 때문에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알라무트의 수장인 하산 이븐 사바 최고 지도자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천국의 이것저것에 의구심을 가지는 이븐 타히르는 혼란과 의혹에 빠져 있었고 그런 그를 동료는 이해하지 못했다. 독특하고 엄격한 계율이 지켜지고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자급자족을 하는 조직화한 세계. 내부로부터 통치를 받는 세계. 이븐 타히르에게 이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미래에 대한 초조감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런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과 동료에게 지지 않아야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이븐 타히르는 어느새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할리마는 짐승이든 사람이든 심지어 그 심술궂은 아파마조차 관대하게 장난과 변덕을 받아주자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 당돌한 할리마의 첫 희생양은 사라였다. 첫날부터 할리마와 같이 지내게 되면서 사랑에 빠진, 흑단처럼 반들거리는 검은 피부의 사라는 할리마가 미리암을 좋아하는 걸 눈치채고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런 사라는 할리마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둘 사이를 눈치챈 미리암에 의해 사라는 벌을 받고 할리마는 미리암과 한 방에서 같이 지내게 되면서 더욱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바짝 쳐들고 다녔다. 한때 기독교도였던 미리암과 지내면서 할리마는 미리암과 더욱 친해지고 거기에 개인 교수까지 받고, 그녀의 과거까지 들었다. 며칠 후 할리마는 정원을 돌아다니다 덤불 뒤에서 사라와 흑인 환관 무스타파가 아파마가 가르쳐준 비법으로 성적 쾌락을 즐기는 모습을 발견하지만 입을 꼭 다무는 것으로 사라에게 진 빚을 갚기로 했다.

알라무트의 새로운 질서에 빠르게 적응한 이븐 타히르는 어느새 우등생들 속에 끼어 있었다. 고된 수업과 기진맥진하게 하는 훈련, 정신 단련으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페다인들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들은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잘하고 명령에 대처할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이스마일파를 위한 봉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부 소라카 데이가 강의한 세이두나(하산 이븐 사바)가 직접 기록한 전기는 생도들에게 경이로운 세이두나의 일생에 감동하게 하였다. 위업이나 위대한 희생으로 두각을 나타내야만 최고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허락되었고, 영화로운 천국을 보상으로 결혼이나 술, 여성이 금지된 금욕 된 생활을 해야 할 운명의 페다인들이었다. 그래서 이븐 타히르는 밤만 되면 시달려야 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시로 달래고 있었다.

"금령은 엄격한데 인간의 본능은 나약하기 짝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 이븐 타히르.

알라무트의 최고 지도자 하산 이븐 사바는 2년 전 술탄의 명으로 메흐디 대위가 지키고 있던 알라무트 요새를 점령했다. 이븐 사바는 간단하게 술책을 부려 금화 오천 냥으로 성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술탄은 이븐 사바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산은 알라무트에 정착한 뒤로는 셀주크 왕조를 쓰러뜨릴 기둥으로써 페다인 양성 학교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아부 알리 최고 데이외에는 아무도 안 만났다. 명령도 그를 통해서만 전달했다. 그런 하산이 데이들에게는 답답했다. 하산은 두 딸은 아부 소라카에게 맡기고 나서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하산의 친아들 호세인은 징계로 강등되어 쿠지스탄의 하산이 신뢰하는 후세인 알케이니 최고 데이가 점령한 요새 주르 굼바단에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좋지 않았다. 강등 조치에 호세인은 더욱 비뚤어지고 고약하게 변해갔다.

한여름의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전 사령관이자 하산이 예전에 박해받을 때 넉 달 동안 숨겨준 아불 파젤 노인이 기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요새로 달려왔다. 아불 파젤은 학자의 방을 연상시키는 검소하게 꾸며진 곳에서 아무리 봐도 예순 살로 보이지 않는 보통 키의 보통 체격의 하산을 만났다. 혈기 넘치는 몸짓 생기 있는 안색, 총기기 흐르는 눈빛 꿰뚫어보는 듯 예리한 눈초리는 예전에 최고 지도자가 유머가 넘치고 묘하게 사람을 웃기는 사람이었음을 상기시키게 했다. 그는 라이의 무추페르 사령관이 최고 지도자에게 전하는 정보를 가지고 왔는데, 그 정보는 다름이 아니라 술탄의 명에 따라 아르슬란 타쉬가 하마단에서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알라무트로 진군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아불 파젤은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하산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수성을 선택했다.

인근 요새의 지도자들이 최고 지도자를 찾아와서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해 회의를 했다. 키 작은 늙은 여자의 곱살한 모습 같은 아부 알리 최고 데이의 주재로 진행된 회의에서 선발대인 튀르크 기병대는 아부 알리가 기습하고 미누체헤르는 요새 방어를 하기로 하고, 압둘 말리크는 성의 식량 비축을 위해 여자와 아이들은 카라반과 함께 라이의 무추페르에게로 피신하기로 했다. 내심 즐거워하는 하산은 전쟁에 대비해 내일 페다인 임관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생도들은 술탄의 진격소식에 뱃속까지 파고드는 불안이 영웅적 행동을 상상하면서 점차 흥분과 잔인한 기쁨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산과 대재상과의 관계: 하산은 60여 년 전 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이스마일파 교리를 배우면서 아버지는 의혹을 사지 않으려고 하산을 니샤푸르로 보내 수니파의 레피크(평신도인 라시크 위의 계급) 무바피크 에딘의 지도를 받게 했다. 훗날 대재상이 되는 니잠 알 물크와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오마르 알 하이얌을 만났다. 이들 세 명은 순나(이슬람교의 교조인 마호메트의 언행과 교도들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의 잘못된 점과 지지자들의 무지를 깨닫고, 찬탈자들을(셀주크 족) 타도하고 이스마일파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그들 중 먼저 성공한 사람이 두 친구가 참된 교리를 위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었다. 하산은 알리의 추종자들 속에서 그 방법을 찾았고 반대로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족을 섬기고 있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오마르 하이얌은 잃어버린 자유를 한탄하면서 온 세상을 비웃고 있었다. 그 후 니잠 알 물크의 소개로 술탄의 궁정에 들어간 하산은 술탄의 거대한 제국의 세입과 지출 명세서 작성에 40일이면 된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술탄 앞에서 보고서를 읽다가 보고서 사이에 가짜 명세서가 끼워진 걸 보고 당황해 우물우물 말하다가 궁정에서 쫓겨난다. 그건 니잠의 짓이었고, 그 이후 두 사이는 원수가 되었다. 하산의 성공을 믿으려 하지 않는 술탄에게 니잠은 예전에 하산을 비방했다고 고백하면서 이스마일파의 수장은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고, 술탄은 니잠을 대재상 자리에서 해고하면서 단시일 내에 하산을 제거하라고 명했다. 빈 재상자리는 니잠의 정적이자 하산과 내통하면서 같은 실리를 추구하고 있었던, 니잠의 정치적 정적인 왕비의 서기관이 임명되었다. 왕비와 서기관은 술탄에 대한 영향력 싸움의 적인 니잠 알 물크가 제거되자 그동안 협력해온 하산을 버렸다.


하산의 방은 도르래 시설로 승강기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승강기를 통해 내려간 하산은 몰래 환관 아디가 노를 젓는 거룻배를 타고 유리정자로 가 미리암을 만나 건배를 하며, 20년 동안 품은 비밀을 미리암에게 털어놓았다.

“우리가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리 혈통의 8대손인 알 마흐디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궁금했었지. 그러다 밤의 정적 속에서 내가 기다리는 구세주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 어느 해 이스마일파 교도 아부 네즘 자라즈가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지. ‘알리와 마흐디의 이야기는 예언자의 사위를 숭배하고 바그다드의 시아파를 미워하는 평신도들에게만 기적이지, 칼리프 알 하킴처럼 코란은 머리가 정상이 아닌 사람들의 산물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아니다. 진리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 나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어. 예언자가……. 머리가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니! 예언자의 사위 알리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마흐디의 신성한 임무에 대해 내가 배웠던 것,구세주의 강림과 관련된 신비가 가득한 훌륭한 그 교리가 평범한 신도들을 위해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니! 나는 분노의 고함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어. ‘그렇다고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속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지만,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지. 자네는 우리가 튀르크족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가? 바그다드는 그들 편이고,민중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가? 그래서 알리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에서는 성인이라는 거야. 우리는 술탄과 칼리프에 대해 봉기하도록 민중을 선동하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오직 그뿐이야.' 내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고 말았지. ”

“이십 년 동안 어릴 적 신화에 대한 향수, 마흐디의 강림에 대한 확고한 믿음, 예언자 계승에 관한 엄청난 비밀들을 가슴 깊이 간직해왔다. 군중에게 진리를 전파해서 인류를 착각으로부터 해방해 주자는 계획에 반대하는 이스마일교 지도자들은 나를 경계하기 시작하더군. 그래서 민중에게 직접 그들이 믿는 것은 모두 가짜라는 걸 증명하겠다고 외치면서 그들이 지어낸 얘기와 거짓말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진리에 굶주려 죽을 것이라고 설파하다 욕설과 돌팔매질을 받았지. 평신도들은 자기들도 의심이 들긴 하지만 영원히 불확실한 것으로 방황하거나 헛된 반대를 고집하기보다는 확실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다고 대답했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끈 화제는 지식의 가능성에 관한 검토였지. 오마르는 이렇게 주장하더군, ‘그래, 맞아. 마호메트는 대중의 행복을 바라셨지만 대중의 치료할 수 없는 어리석음도 알고 계셨어. 오로지 연민 때문에 마호메트는 이승과 저승에서 괴로워하는 온갖 시름에 대한 대가로 천국을 약속하셨던 것이야.' ‘그럼 마호메트는 왜 수많은 사람이 그의 교리 때문에 죽을지언정 신화에 따르는 걸 허락했다고 생각하나?’'나는 사람들이 훨씬 저속한 동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서로 죽인다는 걸 마호메트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마호메트는 그럭저럭 지상에서의 행복을 약속해주고 싶어했지. 그걸 이루고자 마호메트는 대천사 가브리엘과의 대화를 지어냈던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죽은 다음에 천국에서의 행복도 약속했던 것인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지!’ 그때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말했지. ‘오늘날은 나중에 천국에 간다는 약속 하나만으로 기꺼이 죽음을 향해 달려갈 사람은 더는 없는 것 같은데.' ‘민중도 나이를 먹고 있고, 천국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무뎌지고 있어서 더 이상은 예전의 흥분을 일으키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나태함 때문에, 새로운 것에 매달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는 천국을 믿지 않아.’ ‘그러니까 자네는 이 시대에는 사람들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대중에게 천국을 설교하는 예언자는 실패할 거로 생각하는 건가?’ 오마르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지. ‘물론이지. 같은 불길은 두 번 타오르지 않고, 시든 튤립은 다시 꽃을 피우지 않는 법이니까. 민중은 작은 기쁨으로 만족하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줄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언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야.' 쉽게 말하더군. 맞는 말이야. 민중은 신화와 부질없는 말을 좋아하고, 무분별함 속에서 방황하기를 좋아해. 오마르는 술을 따르고 있었지. 그 순간 내 가슴속에 강력하고 엄청난 계획이 떠올랐지. 세상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 인간의 맹목성을 한계에 이를 때까지 시험해보는 것! 힘의 절정에 오르기 위해서 그걸 이용하고,세상 사람들에게 예속되지 않는 것! 신화를 구현하는 것! 아주 먼 훗날까지도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도록 신화를 현실로 바꿔놓는 것! 인간에게 엄청난 시험을 하는 것!”

“그다음에 어떻게 했느냐고? 신화를 현실로 만들 가능성을 궁리했지. 마침내 나는 알라무트에 오게 되었어. 신화는 생명을 얻었고, 천국이 만들어졌고,이제는 손님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지."

하산은 미리암과 헤어지면서 천국에 있는 듯이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처녀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 미리암의 임무라고 강조하고, 어길 때에는 참수에 처할 거라고 경고했다.

또 다른 유리정자에서 여전히 화장으로 떡칠한 아파마가 하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산은 정원에서 손님 접대에 대해 당부를 하고 정원을 떠났다. 하산에게 많은 말을 들은 미리암은 하산의 정신을 사랑하면서도 그가 두렵고, 이미 조금은 증오하고 있었다. 그 날밤 미리암의 침실에서는 술탄의 공격 소식에 산이 무너지는 듯 느끼는 미리암과 짜릿한 공포를 느끼는 할리마가 잠들고 있었다.

다음 날 페다인 생도들 모두 무사히 임관시험을 마치자 하산은,

“이제 생도들을 임관할 시간이 되었으니 어서 가보게. 자,이것이 그들이 선서해야 할 맹세문일세. 엄숙한 순간임을 강조하면서 영웅적인 순교에 대해 열렬히 설교하여 젊은 영혼들을 고양시키고,열정을 선동하고,결의를 다지도록 하게. 그리고 그들이 불복했을 때는 무시무시한 벌과 함께 파멸시키겠다고 위협하게! 페다인들을 주축으로 강력한 체제를 세우려고, 내가 구상한 신봉자의 개념에 맞춰 그들을 교육해서 본성을 고치고 목표를 바꿔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꿈꿨는지 몰라. 마침내 그 순간이 왔어!”

라고 말하며 더 큰 작전을 위해 페다인을 아끼라고 명령했다.

최고 지도자의 궁전 내 회의실에서 생도 모두의 임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븐 타히르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두 손으로 기를 받아들고 나서 페다인들의 선두에 가서 섰다. 인생의 절정을 상징하는 순간은 어느덧 사라지고,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감미로운 느낌이 차츰 쓰라린 고통에 굴복했다. 황홀한 순간이 불현듯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깨달았다. 방금 경험한 덧없이 짧았던 그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하산은 성 뒤쪽의 정원에서 미리암과 아파마를 만나 내일 저녁 정원의 밤을 천국처럼 신비한 모습을 가지도록 꾸미라는 명령을 내렸다. 처녀들은 손님들 앞에서 진짜 천국이라고 천국의 여인임을 목숨을 걸고 연기를 해야 했다.

하산이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 이십 년.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현실로 만들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신화 같은 인생을 위해서. 청년기에는 공상 속에 살았고, 중년기에는 지적 탐구에 열중했다. 그리고 지금 말년에는 그의 오랜 꿈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수천 명 신도의 수장이었다. 아직은 한 가지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온 세상의 권력자들과 군주들이 두려워하는 공포의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현재 꾸미는 계획은 그걸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과 나약함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계획.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계획. 치밀하게 계산된 신중한 계획. 하산은 불현듯 그 치밀한 책략이 수포로 돌아갈 만한 소지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했다. 혹시라도 계산착오를 했다면? 하산은 깊은 강물의 유혹에 홀리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체제는 모든 적,필요하면 전 세계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강력해져야 하네. 그래서 우리 체제가 이승의 일들에 대한 최고 의회 같은 것이 되어야 해. 하지만, 우리가 그 목적을 이루려면 우리 신도들이 미친 듯이 죽고 싶어해야 하고, 대신에 우리는 그들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야 하네. 물론 결말을 그들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우리가 허락하는 모든 죽음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득을 가져와야 하니까. 이상이 내 계획의 골자이자 내가 오늘 자네들에게 밝히는 유언일세."

"알라신의 작업실에 들어가 늙고 병든 그분의 일을 내가 계속 하고 싶단 말일세. 그러고는 그분과 겨루는 거야. 진흙을 다시 빚어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거야."

마침내 하산은 페다인의 첫 암살 임무를 이븐 타히르에게 준다.

렇게 하산은 인간의 본성과 나약함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을 세워 인간이 만든 최초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천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짜 천국을 이용해 자신의 페다인들을 죽음도 불사하는, 죽음을 간절히 원하게 하여 암살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알라신을 대신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그 소망을 이루고야 말았고, 그의 견고한 세계는 훗날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에게 함락될 때까지 166년 동안이나 살아남았다.

이 작품에서 하산은,

“우리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를 위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뭐든지 마음대로 해도 되고,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의 열정에 전념할 수 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라고 말했다. 이미 그에게 진리는 무의미해졌으며, 진리는 단지 대중들을 현혹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들에게 제공될 잘 포장된 미끼에 불과했다. 하산 자신이 곧 진리였고, 하산은 대중들의 수준에 맞추어 ‘달콤한 진리’를 창조해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견고히 다졌다. 어떻게 보면 현대의 사이비 종교의 시작과 세력확장 과정을 보는 것 같다.

하산은 체제의 계급별로, 추종자들을 만족하게 할 수 있도록 별도의 지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 추종자들 대부분은 그 불충분한 우화에 만족하고 있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까다로운 추종자들에게는 경이로운 비유로 코란을 설명하고 있지.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도자는 주저치 않고 코란과 이슬람에 대한 믿음이 헛된 것임을 입증해주지. 그 이상으로 파고드는 사람은 어떤 종교든 진실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 결국, 극소수의 사람만이 모든 교리와 모든 전통을 부정하는 최후의 원칙에 입문할 수 있는 것이야. 가장 용기 있고 가장 힘 있는 추종자가 갖춰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단계에 이르는 것이지. 그때부터는 발을 내디딜 단단한 땅이 없어도,걸음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없어도 인생행로를 가야 하니까. 따라서 그 원칙이 폭로되더라도 효력을 잃지 않으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지. 어차피 대다수 사람은 원칙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는 종교도 지식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하산의 말대로 종교인 중에서 그 원칙과 숨은 배경을 이해하는 사람은 소수 중의 소수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진화론 관련 책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만약 지금까지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21세기에 생겼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거다.”라고. 종교는 과학의 빈틈을 파고들어 대중의 무지를 이용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하산은 대중이 신화를 좋아한다는 점, 어렵고 애매모호한 진리보다는 대중의 눈앞에 확실하게 보이고 잡을 수 있는, ‘잘 만들어진 진리’를 좋아한다는 점을 깨닫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그들의 입맛과 눈높이에 맞추어 체제를 구성하고 완성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맞춤 진리’’맞춤 교리’’맞춤 신화’ ‘맞춤 기적’을 생각해낸 것이다.

하산은 의식 수준이 낮을수록 예언자의 기적이나 신화에 더 열광하고 그 맹목적인 힘으로 체제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어느 종교인들의 행동을 보면 너무나 예리한 지적이지 않은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생각난다. 쉽게 말해 종교는 대중이 우매하다 보니 지도자들이 만든 신화나 전설에 쉽게 휩쓸리고, 천국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점을 간파한 독재자나 소수 권력자의 지배를 받아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르톨은 11세기 하산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는 작가가 이 작품을 집필했던 시기의 독재자들을 풍자하고, 하산을 따르는 신도들을 통해서는 20세기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맹목적으로 빠진 어리석은 대중들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둘 모두를 통해 2차대전 당시 전 세계를 강타했던 전체주의를 말했다. 이렇게 그 당시 주류였던 전체주의 속내를 하산을 통해 풍자할 정도의 의식이 깨어 있었으니 반체제적인 인사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번에는 하산이 회상하는 하산과 그의 친구 오마르의 대화를 살펴보자.

“.......오마르는 이렇게 주장하더군, ‘전적으로 결정적인 지식이란 있을 수 없어. 우리의 감각이 거짓말을 하니까. 하지만, 감각은 우리를 둘러싸는 것들과 우리의 이성이 알아차리는 것 사이에 있는 유일한 매개체들이지.’ 나는(하산) 이렇게 응수했지, ‘데모크리토스와 피타고라스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거야.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불경하다고 비난하면서 신화로 사람들을 고양 시켜준 플라톤을 격찬했지.' 오마르는 이렇게 말을 받았지. ‘군중은 어느 시대나 그랬지. 군중은 불확실성을 꺼리기 때문에 어찌나 차원이 높은지 확증을 주지 않는 완전한 지식보다는 명백한 거짓말을 더 좋아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야. 대중을 위한 예언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부모를 대하듯, 자식을 대하듯 행동해야 하네. 신화와 부질없는 말로 그들을 고양시켜야 하니까. 그 때문에 지혜는 언제나 대중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네.'”

불교의 진리는 ‘자비’, 가톨릭과 기독교의 진리는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압축될 수 있다. 단순하고 간결한 걸 좋아하는 대중들을 위한 이 얼마나 명확하고도 확실한 진리란 말인가. 기독교의 순교자 만들기와 신화 만들기는 단순히 신을 찬양하고자 하는 것을 넘어서,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산)하지만, 마호메트는 대중의 행복을 바라셨지.' ‘그래, 맞아. 마호메트는 대중의 행복을 바라셨지만 대중의 치료할 수 없는 어리석음도 알고 계셨어. 오로지 연민 때문에 마호메트는 이승과 저승에서 괴로워하는 온갖 시름에 대한 대가로 천국을 약속하셨던 것이야.'”

천국과 지옥은 실존한다기보다는, 천국으로 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지옥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주어서 신자들을 완벽하게 손아귀에 넣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예수가 한 말이 아니라 중세를 지배했던 교회와 영주들이 결탁하여 노예나 다름없었던 신자나 백성을 착취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성서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그 시대를 지배했던 지배자의 욕망과 오만이 고스란히 스며들고 번지면서 예수가 말했던 조건 없는 ‘사랑’의 초심을 잃어갔다.

아무튼, 교회는 중세를 거치면서 타락했고, 대중들에게 만족감을 주려고 마련한 ‘쇼’였던 마녀 사냥으로 그 타락과 광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악에 유혹에 빠지는 건 쉬어도 헤어나오기는 어렵다. 마약처럼 악의 달콤함은 뼛속까지 파고들며 영혼까지 병들게 하기에 한번 맛 들이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은 그 자리를 막연한 천국이 아닌 좀 더 현실적이고 체감할 수 있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서 종교를 지배하는 또 다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산)오늘날은 나중에 천국에 간다는 약속 하나만으로 기꺼이 죽음을 향해 달려갈 사람은 더는 없는 것 같은데.' ‘민중도 나이를 먹고 있고, 천국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무뎌지고 있어서 더 이상은 예전의 흥분을 일으키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나태함 때문에, 새로운 것에 매달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는 천국을 믿지 않아.’

그럼, 이제 천국과 지옥의 효과는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아직 가끔 우리 동네 장날에 시장에서 “하나님 믿으면 천국 갑니다.”라고 외치며 다니는 사람이 있기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이제는 그 천국이 가지고 있었던 달콤한 유혹의 맛은 많이 엷어졌고, 그 빈자리는 현대적이고 실속있는 것들로 채워졌다. 바로 ‘나’ 또는 ‘가족’의 성공을 위한 기회와 연줄이다. 신은 믿지 않아도 자신이나 가족의 성공은 믿는다. 아니 믿고 싶을 것이다. 아주 현실적인 판단 아닌가.

바르톨의 작품이 지금에서야 빛을 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살폭탄 테러의 예언이다. 하지만, 하산은 죽음을 달콤하게 여기는 페다인들을 오로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군주급 제거에만 사용했다.

“자신의 머리가 위험하다는 걸 아는 군주는 더 순순히 양보를 하지.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세상의 모든 군주를 휘어잡는 사람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고. 하지만, 강력한 수단이 있어야 그 두려움이 효과적이 될 수 있네. 막강한 보호를 받는 군주들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갈망하는 존재들밖에 없네……. 그들을 단 한 방에 시간과 공간을 정복하는 자객으로 만들고자 말일세. 그들은 곳곳에 두려움과 공포의 씨를 뿌리고 다닐 것이며, 그 대상은 군중이 아니라 왕관을 쓴 군주들이란 걸 잊지 말게.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권력가들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떨게 되지."

하산은 군주들을 목표로 자객을 보내 깔끔하게 끝내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했다. 하산은 대중들을 계몽이 필요한 무지한 존재들로 보고, 자신의 세력 형성을 위해 이용하긴 했지만, 죽여 없애 버려야 할 무가치한 존재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전후에 벌어진 자살폭탄 테러는 그 목표가 무차별적이고 대부분 희생자가 민간인이었다. 한마디로 참혹했다. 20세기에 벌어졌던 전쟁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한 전쟁이 2차대전도 아니고 한국 전쟁이었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보다 민간인들이 더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렇게 증오스럽다면 하산처럼 깔끔하게 주요 인물들을 공격하라고 말하면 너무 선동적인가? 아무튼, 암살자와 자살테러의 원조격인 하산은 그렇게 생각했고 행동했다는 것이다.

하산과 오마르가 대중을 지도해야 할 의식 수준이 낮은 개체로 봐왔던 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일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런 식으로 대중을 보는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가진 게 있으면 사람은 자기만족과 자만을 넘어서 쉽게 오만에 빠진다. 이들은 지식의 겉만 핥고 지식인인척하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가 종잇장만큼이나 얇다는 것을 알기에 배우면 배울수록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듯이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의 미덕을 배운다. 여기서 잠시 이주한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 정의되는 지식인의 면모를 살펴보자.

“자신을 전체 중 일부로 보고 구체적인 삶의 의미를 물으며 책임을 지는 사람이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약자에게 눈과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이다. 터부와 금기에 도전하는 삶이 지식인의 책무이자 운명이다. 지식인은 공동체가 처한 삶의 고통과 질곡을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해 대중과 더불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은 경쟁을 통해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저명한 지식인'이 곧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촘스키.

을 보면 볼수록 궁금해지는 건 더 많아지고 호기심의 욕구는 끝이 없다. 천재가 죽을 때까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공부만 해도 한 인간이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린 그 중 일부인 극히 적은 지식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실로 자신이, 아니 인간이 이 우주에서 얼마나 미천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겸손을 배우게 된다.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뭔가 아는 것이 나오면 우쭐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역시 나도 그 수많은 어리석은 인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부끄럽기만 하다. 이런 블로그도 그런 인간 욕구의 발로나 다름없다. 아무튼, 이런 문제에는 책을 멀리하는 대중들의 책임도 있다.

아주 오래전 우리 조상이 인간인 자신을 본떠 완벽한 신을 창조한 이유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벽한 존재인 신을 찬양하면서 그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되돌아 볼 수 있었고, 신을 생각하며 인간의 부족함을 메우고 일보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고 신의 권위에 도전할 때에 바로 문제가 생긴다. 신의 퀴즈 두 번째 시즌 마지막 편의 주제도 이것이었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이들은 신을 대신해 자신이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오만과 자신만이 옳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독선과 독단 때문에 주변에 엄청난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 작품 중에서 신이 되고자 자살을 결심하는 인물이 떠오른다. 이렇게 인간의 오만함으로 신이 되고자, 또는 신을 넘어서고자 할 때, 오만함은 그 극치에 다다르고 그 오만함은 곧 파멸을 불러온다.

블라디미르 바르톨의 『알라무트』에서 특별한 교훈 같은 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단지 어느 독재자의 광적인 기질의 생성과 그 원인, 실천과 그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교훈보다 더 많은 걸 남겨주었다. 종교 체제든 국가 체제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역사에서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뭔가 섬뜩한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리뷰는 2012년 07월 0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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