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귀꽃(ミスミソウ, 2018) | 설원에 핀 살육의 꽃
"나 사람이 불타 죽는 걸 보고 싶어"
겨울로 접어드는 숲은 물 빠진 듯한 누리끼리한 외투를 처량하게 걸친 채 노자키 자매와 아이바를 맞이한다. 아이바는 수북이 쌓인 황토색 낙엽 위로 보란 듯이 삐져나온 엷은 녹색의 앙증맞은 새싹을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이름하여 노루귀꽃. 도쿄에서 전학 온 노자키 자매에게 아이바는 설명한다. 이 풀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뒤 눈을 가르듯이 작은 꽃을 피운다고. 한편, 동급생들에게 심한 따돌림을 당하는 노자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두 달만 참으라고.
노루귀꽃이 겨울을 보낸 뒤 꽃을 피우는 것은 자연의 이치였고, 노자키가 두 달만 더 참으면 졸업과 동시에 따돌림에서 해방되어 새 삶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인생의 이치였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때론 사람의 삶이 자연의 삶보다 더 가혹하기도 하고, 간혹 운명의 여신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불행한 중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짓궂은 장난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아버지가 약속했던 그 두 달이 채 지나기 전에, 그리고 아이바가 언급했던 겨울이 지나기 전에 노자키의 삶은 그야말로 처참하고 잔혹하게 붕괴한다.
노자키와 아이바가 사는 하얀 눈으로 덮인 마을의 정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그윽한 운치를 자아낸다. 그러나 백옥처럼 깨끗하고 비너스처럼 아름다운 그 한 폭의 그림 뒤에서 집념과 애증, 그리고 원한과 복수로 얼룩진 피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단 한 번의 어긋남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잔치를 불러왔으니, 이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몸서리가 쳐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파도처럼 일렁이는 정서는 두려움과 무서움보다는 ‘눈(雪)’과 ‘피(血)’를 주제로 한 어느 갤러리를 감상하는 것처럼 이상야릇한 미의식으로 젖어있다. 산 사람의 눈알이 뽑히고, 예리한 칼로 베어진 뱃가죽 틈 사이로 창자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면서도 무량한 감상에 빠진 나 자신을 깨닫는 그 순간이 더 소름 끼친다.
영화 속 폭력의 행위자와 희생자 대부분은 한창 순수함과 청순함을 만개할 나이의 소녀들이라서 더 충격적이다. 무엇이 그녀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이미 전신 화상을 입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몸에 또다시 석유를 뿌리도록 만들었나? 정말이지 잔악무도함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도 영화는 마치 순백의 미를 찬양하는 제단에 올려질 희생양으로 그녀들을 선택한 듯 이 모든 살육의 참상을 백설의 품속에서 벌어지게 한다. 감정의 깊고도 어두운 골이 끝내 극복되지 못하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극으로 화한 것도 무섭지만, 이것을 애써 미화하는 듯한 작품의 불량한 뉘앙스는 더더욱 무섭다.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자가 젊은이들의 의미 없는 희생을 사쿠라가 피고 지는 것으로 미화했던 것처럼 역시 일본은 미화에는 일가견이 있다.
끝으로 등장인물들의 설정 나이(중3)와 배우들의 실제 나이(중학생에서 고등학생)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영화의 흡입력과 진정성은 먹구름처럼 짙어지고, 그것은 어둡고 음습한 먹구름이 무겁고 낮게 덮쳐오듯 시청자를 은근히 압도한다. 결국, 영화는 비를 내릴 듯 말 듯 간을 보다가 비를 내리지 않는 얄궂은 먹구름처럼 음울한 기분만 슬그머니 남겨놓은 채 무심히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참고로 영화 「노루귀꽃(ミスミソウ, Liverleaf, 2018)」의 원작은 오시키리 렌스케(押切蓮介)의 만화 「ミスミソウ(미스미소우)」라고 한다.
노자키 역을 맡은 야마다 안나(山田杏奈)가 보고 싶다면 「수해촌(樹海村)」을
오구로 역을 맡은 오오타니 린카(大谷凜香)가 보고 싶다면 「하울링 빌리지(犬鳴村)」을
각각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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