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9

진화의 산증인, 화석 25 | 멸종에 대한 묵상

review rating

진화의 산증인, 화석 25 | 도널드 R. 프로세로 | 멸종에 대한 묵상에 잠기다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다. 공룡은 바로 지금 당신의 새장 속 횃대에 앉아 있거나 당신의 마당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그러니 다음에 깃털 달린 공룡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 벨로키랍토르 같은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타조에서 벌새에 이르는 놀랍도록 다양한 새들로 변모한 진화의 경이로움을 음미해보자. 모든 새는 살아 있는 깃털 달린 공룡이다. (p308)

이 자리를 빌려 강력히 추천하는 ‘오파비니아’ 총서

믿고 읽는 과학 도서가 있으니 바로 ‘뿌리와이파리’ 출판사의 ‘오파비니아’ 시리즈다. 2019년 12월 31일 기준, 총 18권의 시리즈가 출판되었는데, 그중 두 권 빼고는 도서관 책장에서 내 눈에 띄는 족족 망설임 없이 바로바로 대출할 정도로 과학 분야, 특히 진화, 생명의 기원, 지구 역사에 대해 뜨겁게 끓어오르는 호기심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독자에게 지적 상쾌함을 전해줄 수 있는,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한 과학 도서다. 두 권을 빼 먹은 것은 고의도 아니고 실수도 아닌, 단지 빌어먹을 동네 도서관이 그 두 권을 구매하지 않아서이다. 결코, 다른 뜻이 있어서 두 권을 빼 먹은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사실 두 권을 빼먹었다는 사실도 오늘 검색하고서야 알았는데, 진즉에 알았더라면 ‘희망 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파비니아’ 시리즈 전부가 장르소설(추리 • 범죄소설 같은) 읽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과학 도서들은 소설가 같은 전문 작가가 쓰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 몸담은 과학자들이 쓰는 것이라 가끔은 딱딱한 대학 교재를 읽는 듯한 곤혹감으로 두통과 졸음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 내 개인적인 소감으론 ─ 과학 분야에서만큼은 영미권 학자들이 국내 학자들보다 문장과 구술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이제 막 독서 취미에 입문한 초심자라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알고 있는 지식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방법은 그 지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얼마나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는데, 아무래도 영미권 학자와 국내 학자 간의 차이가 나는 것만큼 (여기에 독서량이나 학교 교육에 따른 작문 능력 차이도 더해지면) 이들이 쓴 책들에서도 그 차이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일반인에게 온전히 이해시키는 능력 등에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때때로 피터 워드(Peter Ward)나 닉 레인(Nick Lane)처럼 소설가 못지않게 탄탄한 글재주를 지닌 학자들도 만날 수 있으니, 과학 도서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만, 망설임 없이 ‘오파비니아’ 시리즈를 추천하고 싶다.

생태계의 잃어버린 족보, 화석

지금까지 출판된 ‘오파비니아’ 총서 18권 중에서 16권을 읽었음에도 ‘오파비니아(Opabinia)’라는 단어의 의미는 도널드 R. 프로세로(Donald R. Prothero)의 『진화의 산증인, 화석 25(The story of life in 25 fossils)』를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괴이쩍은 이름만으로도 ‘에이리언(Alien)’ 같은 영화에 나오는 외계 괴물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데, 실제 모습도 그에 못지않다. ‘오파비니아’는 캄브리아기 중기에 살았던 이마 중앙에 다섯 개의 눈을 가진 동물로서 ─ 아래 사진으로 알 수 있듯 ─ 우리가 아는 지구상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체제를 가진 생물이다.

<Author: Nobu Tamura(http://spinops.blogspot.com)>

사실 캄브리아기 시대 살았던 다양한 생명체 중 다수가 ‘오파비니아’처럼 기이한 동물들이다. 물론 현재의 새우나 다른 절지동물을 닮은 녀석들도 있었지만, 외계 생명체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오파비니아’ 같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 생명체들이 살았다는 것은 5억 년 전 지구에서는 생명의 다양성을 추동하는 진화 실험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데 가장 적합한 생명체들을 걸러내는, 주관자도 없고 감시자도 없는 무정하고 냉정하고 한편으론 꽤 합리적이기도 한 ‘진화’라는 실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종을 멸종으로 밀어붙였지만, 그 희생의 대가로 이 지구는 ─ 인류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 생명의 다양성과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행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작고 보잘것없는 세포 덩어리에서 해저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 수중을 헤엄치는 물고기, 이제 막 물 밖으로 나온 양서류, 지금의 인류처럼 한때 이 지구를 정복했던 파충류를 거쳐 지구상에 등장했던 그 어떤 종보다도 무지막지한 지능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제각각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세포부터 인류까지 하나의 연결고리인 ‘진화’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

바로 그것은 과학자들에겐 매우 다행스럽게도, 반면에 창조론자들에겐 불행스럽게도 진화의 산증인인 ‘화석’이 인류가 결코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아주 먼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화석에는 ─ 이젠 인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 길고 긴 세월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수많은 종의 신산하고도 애잔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화석은 지구의 수십억 년 삶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변자이자 인류, 그리고 인류와 함께 생태계를 꾸려가는 여러 생명의 족보를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유일무이한 증인이자 목격자다. 화석에 귀를 기울이면 한 생명의 삶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는 멸종과 생명의 다양성이 펼쳐내는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진화의 대서사시를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있다. ‘5대 멸종’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음에도 생명의 다양성이 끊기지 않은 것은, 이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화’가 생태계를 은근하면서도 확실하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은 억겁의 시간과 인류의 오랜 무지 속에 배척되어 있던 화석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The Story of Life in 25 Fossils: Tales of Intrepid Fossil Hunters and the Wonders of Evolution by Donald R. Prothero
<화석이 없었으면 이런 공룡 장난감도 없었겠지...>

‘거대한 존재의 사슬’을 증명하는 전이화석

화석으로 남을 확률이 아무리 희박하다고 해도, 그리고 억겁의 시간 동안 지층 속에 잠들어 있던 별처럼 많은 다양한 종(種)의 화석 중 인류의 발굴로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된 화석들이 제아무리 별들의 일부라고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양이다. 인류가 발굴해 낸 그 많은 화석 중에서 도널드 R. 프로세로는 진화의 산증인으로 대표되는 25종의 화석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어느 한 종이 물에서 뭍, 뭍에서 하늘, 다시 뭍에서 물로 전이하는 ‘거대한 존재의 사슬’을 증명하는 전이화석(Transitional fossil)이다. 물론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진화’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제아무리 진화를 부정하더라도 종교재판이 끝나고 재판정을 나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혼잣말처럼 ‘그래도 지구는 진화한다’. 그것은 한때는 아름답고 푸르게 빛나던 행성 지구가 한 줌의 먼지로 흩어지는 날까지 변치 않는 불변의 진리다. ‘전이화석’을 비롯해 각각의 종을 대표하는 수많은 화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멸종과 생명의 다양성이라는,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들의 관계가 불가분이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유일한 앎의 길이자, 진화를 입증하는 확고한 물적 증거다.

지금은 명확해 보이는 사실들이 과거 한때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때는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편견에 밀려나기도 했고, 느리고 신중한 연구 덕분에 50년 동안이나 세상에 발표되지 않고 묵혀있기도 했다. 불행스럽게도 창조론자들의 되먹지도 않은 억지 주장에 맞서야 했고, 불운하게도 돈에 눈이 먼 사기꾼들의 득세에 밀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진실을 삼키고만 있어야 했다. 잔혹하게도 연구자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정치적인 문제와 혹독한 환경이 가하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압박이 종종 연구를 훼방 놓기도 했다. 이 모든 장애에도 과학자들의 헌신적이고 꾸준한 연구 덕분에, 그리고 이에 응답하듯 진보에 진보를 거듭한 과학 기술 덕분에 인류는 화석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이 우리 앞에서 보란 듯이 펼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화석은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는 수많은 종의 멸종과 그 멸종의 대가로 얻어진 생명의 다양성, 그리고 그 경이로운 전이 과정에 대해 들려주면서, 한편으로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유별난 종의 탄생이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지난 억겁의 시간 동안 진행된 수많은 진화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6600만 년 전에 지구를 강타한 운석이 조금만 비껴갔어도 포유류의 폭발적인 방산은 일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단 한 끗만 비껴갔어도 ‘호모 사피엔스’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작던 포유류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스스로 매우 특별하다고 여기는 지적인 종으로 과정에는 그 어떠한 필연도 없었다. 그저 인류는 존재하게 되었으니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진화의 또 다른 이면, ‘멸종’

무사도를 설명한 『하가쿠레(葉隠)』 라는 일본의 고서에는 매일 죽음을 묵상하는 수련법이 나온다. 이것은 진정한 사무라이는 죽음을 초월하고 명예롭게 죽는 것을 수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죽음을 관조할 수 있는 자만이 세속적인 탐욕에서도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진정한 사무라이는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탐욕에도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자기만큼은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탐욕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사람은 평생을 악바리처럼 재물을 탐내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야 이 세상에서 얻은 것 중 무덤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만약 내일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도 상사의 압박에 못 이겨, 혹은 승진을 위해 야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낼 것인가? 가족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 반대인 사람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죽음에 대한 명상은 우리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화석은 진화의 경이로운 전이 과정과 생명 다양성에 숨은 비밀을 밝혀주지만, 한편으로는 그 경이로움과 생명 다양성에 대한 잔인한 대가처럼 느껴지는 멸종이라는 진화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쥐처럼 작았던 우리의 조상이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멸종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지구를 뒤덮으면서 그 대가로 수많은 멸종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 멸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것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진행 중이다. 작금의 도를 넘어선 듯한 멸종 속도에 대해 누군가는 생태계 진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도태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라고, 또한 인류와는 상관없는 일이며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진화의 한 이면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누군가는 현시대가 공룡을 절멸시킨 ‘다섯 번째 대멸종’에 이은 ‘여섯 번째 대멸종’ 시기라고 큰 우려를 표한다.

진화는 환경 변화를 선택압으로 충분히 고려할 정도로 유연하지만, 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지난 다섯 번의 대멸종도 결국엔 급격한 환경 변화가 일으킨 재앙이었음을 고려하면, 인류가 초래한 환경 변화에 생명체가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의 말대로 이미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진행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6,600만 년 전에 공룡을 멸종시킨 운석처럼 대멸종의 원흉으로 지목되리라.

한 사람이 자기 죽음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진정으로 겸허해질 수 있는 것처럼, 인류 역시 인류의 멸종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세상 모든 생명체에 대해 겸허해질 수 있다. 인류가 지구에게 온갖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은 마치 자기가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한 누군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재물을 악착같이 그러모으는 것과 같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죽고 그 사람이 모은 재물은 그 사람의 손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밖에 없다. 인류도 언젠가는 멸종할 것이고, 그와 함께 인류가 이룩한 모든 업적은 억겁의 시간 속에서 한 줌의 재처럼 스러질 것이고, 우리의 존재는 한때 우리가 열심히 파헤쳤던 화석처럼 지층 속 어딘가에 파묻힌 보잘것없는 뼈다귀로만 남게 될 것이다.

여담이지만, 만약 우리가 멸종하고 난 후, 외계의 지적생명체가 지구를 발견하여 우리가 연구했던 것처럼 지구에 어떤 생명체가 살았는지, 또 그들이 어떻게 멸종하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알고자 화석을 연구한다면, 그리고 이때 그들이 침팬지와 호모 사피엔스의 DNA만을 비교 분석한 정보만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고전 『문명의 붕괴(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의 저자이기도 한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외계인이 인간을 ‘제3의 침팬지 종’이라고 결론 내릴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당신은 동의하는가?

마치면서...

분명 『진화의 산증인, 화석 25』는 재밌고, 놀랍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인류의 멸종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좀 더 겸손해지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꼭 사과나무를 심을 필요는 없겠지만, 인류 역시 진화와 멸종의 대법칙에서 예외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할 수 있을 때, 멀게는 인류와 같이 공존 • 공생하는 지구상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시선에, 그리고 가깝게는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는 다르지만, 결국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의 운명으로 결속된 지구촌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