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4

잡식동물의 딜레마 | 오늘 뭘 먹지?

The Omnivore's Dilemma by Michael Pollan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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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 마이클 폴란 |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짧은 질문에 대한 긴 대답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기업들은 가축이 이승에서 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애써왔다. “할아버지 때에는 소들이 도축되기 전까지 4~5년을 살았죠.” 리치가 설명했다. “1950 년대에 아버지가 목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에는 그 기간이 2~3년 정도였어요. 지금은 겨우 14~16개월이죠.” 참으로 패스트푸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잡식동물의 딜레마』, p98)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매우 긴 대답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의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는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 질문에 대한 매우 긴 대답이다. 그것은 당신이 즐겨 먹고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고기에 대한 불쾌감을 생성하려는 환경운동가의 지루한 설교가 될 수도 있고, ─ 지극히 낮은 확률이겠지만 ─ 날벼락 맞고 제정신을 찾은 광인처럼 당신을 채식가로 변신시키는 강력한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신을 오늘 저녁 식탁 위에 오를 고기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어떠한 장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세심하게 고려하는 깐깐한 섭취자로 거듭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폴란의 긴 대답은 누군가를 유기농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해방시키는 혁명이자 우악스럽게 싼 음식만 찾아다니던 누군가의 고집스러운 아둔함을 깨우쳐주는 예상치 못한 일침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정부의 원조와 소비자의 무지라는 음침한 장막 뒤에 숨어 각종 모순과 폐해를 양산해 내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과 허울뿐인 산업 유기농 음식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이자, 문명을 도외시한 채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초유기농 농장을 체험하고,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인류를 모방하려는 매우 진기한 시도에서 폴란 자신이 직접 요리 재료를 찾아 사냥 • 채집하는 모든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진지한 모험이다. 이를 위해 마이클 폴란은 손수 트랙터를 몰아 검은 초콜릿색 바다의 물결로 일렁이는 옥수수밭을 위태롭게 행진하기도 하고, 농장에서 일주일간 날품팔이 일꾼 체험을 하면서 직접 닭을 도축한다. 버섯채집꾼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버섯을 채집하러 새벽같이 산행을 강행하기도 하고, 총을 쏘며 직접 야생 돼지를 사냥한다. 그렇게 해서 손수 마련한 고기, 버섯, 채소, 과일, 효모 등의 다양한 음식 재료들로 지인들에게 만찬을 대접하는데, 폴란은 그날의 식사에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인다.

지속불가능한 산업적 음식 시스템

마이클 폴란이 야심 차게 두 주 동안이나 고심하며 준비한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는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그래서 생각하기도 좋은 만찬이었던 점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음식 시스템은 (7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고려하면) 비현실적이며 지속불가능하다. 만약, 지금 당장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가동을 중단하고, 모든 사람이 폴란의 발자취를 따라 거창하게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잡식동물의 조촐한 저녁 식사’를 장만하려고 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류의 끔찍한 인구 팽창을 조장했던 산업적 음식 시스템은 지속가능한가? 옥수수로 1칼로리의 가공식품을 만들려고 화석 연료 에너지 10칼로리가 소비되고, 소고기 단백질 1칼로리를 생산하는 데 있어 석유 에너지가 54칼로리나 사용되고, 재배된 채소나 과일을 냉장하고 씻고 포장하여 소비자나 지역 마트에까지 수송하는 데 수백에서 수천 칼로리의 화석 연료 에너지가 소비되는, 이렇게 배보다 배꼽이 큰 음식사슬이 과연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산업적 음식 시스템이 양산하는 환경오염과 공중 보건 문제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결국, 이 모든 비용과 부담은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으로 이관되어 납세자이자 산업적 음식사슬의 ─ 사실은 가장 큰 피해자인데 ─ 가장 큰 수혜자라는 누명을 안고 사는 소비자의 지갑과 건강에 대한 지속적인 위협으로 때우게 된다. 회복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그 회복에 필요한 시간이 엄청나게 요구되는 환경오염 같은 경우는 이에 아무 책임도 없는 미래 세대도 부담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인

마이클 폴란의 재치있는 지적대로 산업적 효율의 관점에서 정말로 석유를 직접 마시지 못한다는 점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아쉽게도 지구가 나은 최고의 대식가이자 탐식가인 사람일지라도 그 정도까지는 진화하지 못했을뿐더러 앞으로도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설령 석유를 마시며 사는 신인류가 탄생할 수 있을지라도 그때가 되면 이미 석유는 고갈되고 없을 듯싶다.

우리는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가장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여전한 잡식동물이지만, 그렇다고 먹을 수 있어 보이는 모든 것을 몽땅 다 먹을 수는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먹을 수 있다는 축복과 그 가운데서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저주가 공존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말하지만, 현대적인 산업적 음식사슬이 제공하는 다양한 가공식품들은 먹고 나서 바로 죽거나 탈이 날 정도로는 위험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음식들을 먹고 여전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을 팔팔하게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잡식동물의 딜레마’ 문제를 해결하는 그럴듯한 대안으로 보인다. 정말 그럴까?

거대한 산업적 음식 시스템에 가려진 사회적 비용이나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 환경오염 등의 지속불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 의도적이든,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든 어차피 그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려는 용감한 소비자는 거의 없겠지만 ─ 요즘 사람들은 정말 안심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함을 느끼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음식들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일까? 유기농을 집어 들며 나름대로 최고의 선택이라 자화자찬하며 만족해하는가?

이제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라는 태곳적 문제에서 좀 더 분화되고 문명화된 현대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주머니가 가벼운 미식가라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투자한 가격 대비 최상의 맛을 뽑아낼 수 있는지, 현명한 주부라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가족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지, 이상주의자라면 어떤 음식을 구매해야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등등 많은 문제가 우리의 지갑과 장바구니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마이클 폴란의 설명대로 우리는 여전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식탁 앞에 엉거주춤 앉은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The Omnivore's Dilemma by Michael Pollan
<돼지는 가축화된 현실이 행복할까?>

먹는 방식이 바뀌려면 사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 부러지는 어떠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과학자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몇몇 정부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음식은 인류를 지탱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근원이지만, 산업적 음식 시스템은 우리와 음식의 연결고리를, 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우리의 태곳적 능력을 무참히도 파괴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먹든 그 재료가 무엇을 먹으며 어디에서 자랐는지, 그것이 어떻게 도축, 가공되어 내 식탁에까지 왔는지 등 한 생명체의 드라마틱한 일생을 되새겨보며 비위 상할 필요가 없으며 감사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미 현대적인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을 등에 업고 인류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개개인의 삶의 뿌리 깊숙이 들어앉았다. 지금에 와서 산업적 음식 시스템을 거부한다는 것은 전 인류를 기아와 아사의 벼랑으로 밀어 넣는 일과 다름없다. 지속가능한 농장이 분명히 존재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지만, 그러한 농장들이 지독하게도 많은 인류를 먹여 살릴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이 인류의 찬란한 식탐을 그럭저럭 채워주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 얼마 못 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만약 아무런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 세계 3차대전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다.

마이클 폴란은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이 모든 것에 의문의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그가 던져 놓은 사고의 덫에 걸려든 게 한다. 유머 가득하고 재치 만점인 폴란의 문장에 현혹된 나머지 그가 놓은 덫에 일단 한 번이라도 걸리게 되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진정으로 먹는 방식이 바뀌려면 진정으로 사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현실적인 믿음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독자에게 자신이 먹는 음식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리를 규정하는 음식과 그 음식이 먹는 음식에 얽힌 복잡하고도 난해한 음식 사슬을 단순히 먹고 먹히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를 벗어나 철학적이고 윤리적이며 생태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볼 것은 종용하고 있다. 만약에 이 책을 읽고도 오늘 저녁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전혀 불편한 감정 없이 예전처럼 즐길 수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죽인 사냥감이나 채집한 음식에 대해 감사와 예의를 표할 줄 알았던 구석기 시대 조상보다 못한 미개인이다!

육식에 대한 끝나지 않은 도덕적 • 윤리적 논쟁

끝으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이성과 감성을 갖춘 지능적인 잡식동물이 진보된 문명화를 이루고 나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육식에 대한 도덕적 • 윤리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자신처럼 고기를 먹는 사람은 적어도 한 번쯤은 인생에서 육식 때문에 일어나는 살해를 직접 해보라고 요구하는 마이클 폴란은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측의 주장과 사람의 동물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사냥과 육식을 옹호하는 측의 주장을 모두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육식하는 저자의 마지막 논리로 무너진다. 마이클 폴란은 돼지를 한 마리라는 개체로 볼 것이 아니라 종(種)의 개념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 라면 돼지(기타 인류에 의해 가축화된 모든 동물)는 인류가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한 멸종할 일은 없다. 가축화는 그들의 진화적 선택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류와 가축화된 동물들과의 윈-윈(win-win) 관계가 성공적으로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 마리 한 마리 돼지의 집단가축사육시설(CAFO: 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s)에서의 짧은 삶이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하더라도 인류의 썩 괜찮은 과학기술과 변치 않는 식탐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종은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폴란의 주장이다. 육식을 옹호하는 처지에선 썩 괜찮은 논리처럼 들리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영리한 돼지라도 이런 설명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폴란의 주장은 어떻게든 육식에 대한 도덕적 • 윤리적 부담을 덜고자 하는 인류의 수많은 변명거리 중 하나로 들린다. 즉, ‘이성적인 존재’가 될 때 가장 큰 장점은 원하는 무엇에 대해서든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말과 다름없다.

만약 외계의 어느 지적생명체 문명에서 인류의 뇌가 고단백 영양 식품으로 유행한다고 치다. 그 바람에 그들에 의해 인류가 강제로 가축화된다면, 그래서 외계인에 의해 20~30세까지 인도적으로 사육되다가(적어도 그들은 사람을 끔찍한 CAFO 같은 곳에서 기르는 것보다 좋은 음식과 적당한 운동, 괜찮은 교육, 그리고 깨끗한 환경을 기반으로 해서 성장한 뇌가 더 영양가 있고 맛도 더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도축된다면(이런 이야기를 하니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Hannibal Lecter)가 사람의 뇌를 삼겹살 구워 먹듯 요리해 먹는 장면이 떠오른다), 과연 우리는 폴란가 주장한 논리로 한껏 위안을 받으면서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즉, 우리보다 뛰어난 과학기술과 문명을 갖춘 외계인이 우리의 뇌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상 우리는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이 우주에서의 생존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위안 아닌 위안에 만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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