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강 | 차이쥔 | 유령 탐정, 자신을 죽인 자를 추적하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대요.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히 죽었든, 기구하게 살다가 비명횡사했든, 아니면 일찍이 요절했든 그 기억이 남아 있다죠. 기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기억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거예요. 갓난아기들이 밤에 잠도 안 자고 우는 게 바로 그 때문이래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져 나중엔 다 잊어버리고 순수한 아이가 되는 거죠.” (p200~p201)
맹파탕(孟婆湯)을 토하고 기억을 간직하다
어떠한 종류의 어느 정도 고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과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음하고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혼자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좀 두렵지만, 나는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다. 그것은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땐 이미 존재 여부와 존재의 소멸을 느껴야 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으니까. 그렇더라고는 해도 만약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 사후 세계가 어떤 식으로 존재할지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마저 매몰차게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이러한 호기심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존재이기에 앞서 영적이고 문화적인 존재인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근원적이고 문학적인 상상력을 사유로 한다.
사실과 실험으로써 진리를 이해하려는 엄격한 과학은 사후 세계와 환생을 설명하려고도 않지만, 우주의 막연함과 경이로움 앞에 여전히 작은 존재인 인류의 지식이 아직 밝히지 못한, 아니면 결코 밝힐 수 없는 환생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고 있다면,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태어나는 사람들은 그 환생 시스템에서 아주 가끔 일어나는 오류일지도 모른다. 혹은 누구처럼 삼켜야 할 맹파탕(孟婆湯)을 토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생사의 강(生死河)』에는 이런 전설이 나온다. 사람이 죽으면 귀문관(鬼門關)을 건너 황천길로 들어서는데 저승과 이승의 사이에 망천수(忘川水)라는 강이 있고, 그 강에 있는 나하교(奈何橋)를 건너면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나하교를 건너려면 나하교 옆에 앉아 있는 맹파(孟婆)라는 노파가 주는 맹파탕을 마셔야 한다. 맹파탕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하교를 건너자마자 좀 전에 먹은 맹파탕을 토해낸 불량한 영혼이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리고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자신을 죽인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어야만 했던 그 원한도 그대로 이어받은 채 환생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 생애에서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 ‘유령 탐정’이 된다. 그는 바로 차이쥔(蔡駿) 추리 소설 『생사의 강』에 등장하는 요절한 주인공 선밍이다.
사람의 복잡한 삶을 축소해 놓은 듯한 사건의 복잡성
별난 추리 소설이다. 선밍이 학생들에게 ‘마녀 구역’이라 불리는 음침하고 캄캄한 지하실에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뒤에서 급습하여 칼로 찔러 죽인 범인을 추리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이지만, 살해된 사람이 전생의 기억과 원한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환생하여 자칭 ‘유령 탐정’ 노릇을 한다는 점은 추리 소설이기보다는 괴기 소설에 더 가깝다. 살해된 영혼이 다른 인물로 환생하여 전생의 ‘나’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전설의 고향’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선밍이 살해된 사건 전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기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생사의 강(生死河)』에 등장하는 살인자는 한두 명이 아니고, 그에 따라 피해자도 여러 명이다. 선밍 같은 경우는 특이하게도 살해된 피해자이기에 앞서 분노와 증오로 눈이 먼 나머지 애꿎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명백한 살인자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인과응보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소설이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살인처럼 『생사의 강』 속 살인자들도 시기, 질투, 탐욕, 증오, 비밀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 언뜻 보면 각각의 살인은 개별적으로 보일 정도로 사건들을 서로 이어주는 동기나 연결성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언뜻 개별적으로 보이는 각각의 사건과 선밍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어떤 것은 거미줄처럼 매우 가늘고, 어떤 것은 동아줄처럼 매우 굵은 등의 서로 차이를 보일 수는 있어도 사건들의 중심에는 선밍이 있다는 것이다.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길고도 긴 수사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선밍을 죽인 살인자는 밝혀진다. 선밍의 죽음에 직 • 간접적으로 무수히 얽힌 복잡하기 그지없는 우여곡절은 사람의 다사다난하고 복잡한 삶을 축소해 놓은 듯 매우 압축적이며 조밀하다. 독자의 가슴을 찢어발길 수도 있는 선민의 죽음에 얽힌 우연적 요소는 잔인한 운명의 장난 때문에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비극적인 삶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등장인물 간에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와 은원관계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쉽게 갈무리가 안 될 정도다. 마침내 선밍을 죽인 사람이 누구였는지 밝혀지는 순간, 그 운명의 잔인함과 불가해함에 할 말을 잃고, 그런 복잡한 난제를 소설로 풀어쓸 수 있었던 차이쥔(蔡駿)의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Gustave Doré - Dante Alighieri - Inferno - Plate 9 (Canto III - Charon) Gustave Doré / Public domain> |
주인을 서서히 갉아먹는 비밀
따지고 보면 이렇게 삶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개씩 품고 사는 ‘비밀’이다. 선밍의 영혼이 씌운, 한마디로 귀신 들린 소년 쓰왕의 말처럼 누군가는 그 비밀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손에 넣고자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비밀을 숨기려고 살인까지 저지르며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의 입을 막기도 한다. 물론 아름다운 비밀을 간직한 사람도 있겠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자신의 삶을 하루아침에 파멸시킬 수 있는 치명적이고 범죄적인 비밀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비밀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약점으로 잡히는 순간 그 주인에게도 매우 치명적이기에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의 수단과 방법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수단은 바로 살인이다. 그래서 치명적인 비밀을 품는 등장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생사의 강』에서는 살인도 많이 일어난다.
치명적인 비밀을 품고 산다는 것은 자신의 몸속에 흰개미를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삶은 흰개미에 의해 서서히 갉아 먹힐 테고, 그래서 언젠가는 약간의 타격만으로 쉽게 허물어지게 된다. 그것은 운이 나쁘면 비극적인 죽음이 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절망과 좌절에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서서히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두 결과 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살면서 그런 치명적인 비밀을 절대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럴 땐 어찌해야 할까? 나라고 별수 있나? 나도 모르겠다.
마치면서...
차이쥔(蔡駿)의 『생사의 강』은 지금까지 읽어본 추리 소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사건 배경을 가진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복잡성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머릿속으로 작품을 정리하면서 음미하는 과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만, 한편으론 무상하고 기만적인 운명의 얄궂은 장난을 보는 것 같아 알싸한 슬픔에 젖게 한다. 아무튼, 데구루루 굴러가면서 저절로 풀어지기도 하는 실뭉치를 신기한 듯 따라가는 고양이처럼 문장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따라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소설이다. 굴러가던 실뭉치가 고르지 못한 바닥 때문에 요리 튀고 저리 튈 때마다 고양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독자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이야기 전개에 따라 감정이 요동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현대 중국 소설을 읽다 보면 생소하면서도 어딘지 낯익은 과거를 보는 듯한 이채로운 도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2000년대 초에 우체국에서 아직도 주판을 사용하는 것과 자가용 불법 택시, 중학교 근처에 생뚱맞게 자리한 고급 술집은 꼭 우리의 멀지 않은 과거를 보는 것 같다. 반면에,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는데) 중국에는 크리스마스 휴일이 없다는 사실과 고등학교 1학년 첫 어문 수업(우리나라로 따지면 국어?)에 마오쩌둥의 글을 배운다는 점은 역시 혁명으로 탄생한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색을 드러내는 것 같아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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