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30

미스 양의 모험 | 근대화에 난파된 작은 목선

Miss Yang's Adventure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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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양의 모험 | 조선작 | 조국의 근대화에 난파된 이름 모를 작은 목선

Original Title: 미스 양의 모험 by 조선작
난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다만 나는 내 꿈을 좇아왔을 뿐이야. 꿈을 좇아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미스 양의 모험』, p386)

미스 양, 드디어 서울로 상경하다!

집안의 경제적 사정으로 고등학교 1학년 중퇴한 열여덟 살의 양은자는 펜팔을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잘 팔리는 주간잡지에 약간의 양념을 가미한 인적사항을 실었는데, 얼마 후 한두 통씩 도착하던 편지가 어느덧 사백칠십팔 통의 편지가 쌓이게 되었다. 그 많은 편지 중 태반은 시시껄렁한 것들이었고, 그중 마음에 드는 몇 통에 편지에 대해서만 은자는 답장하곤 했다. 은자는 나름대로 비밀을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괜히 참견하길 좋아하는 우체부의 넓은 오지랖과 하필 우체통이 은자를 몰래 사모해오던 소꿉친구 기수네의 라디오방 앞에 있었기 때문에 기수에게 덜미가 잡혀 편지를 압수당하는 수치를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은자의 별거 아닌 펜팔 이야기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온 동네방네로 퍼지는 별 거지 같은 일이 다 일어나 은자의 펜팔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위문편지로 알게 된 육군 병장에 대한 짝사랑의 실패에 따른 쓴맛에 이어 펜팔 사건으로 동네북이 되는 흉한 몰골까지 당한 은자는 정말 자기의 인생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돼버리리라는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은 은자는 고민 끝에 오래전에 막연하게 결심해 왔던 대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바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것이다. 은자의 대결심은 훗날‘대모험’이라 감히 칭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냥 철없는 시골 처자의 ‘가출’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그 시대 무작정 상경한 대부분의 소년 소녀들이 그러하듯, 은자의 서울 진출이 확실한 자각과 뚜렷한 신념을 바탕으로 결정된 것이기보다는 막연한 호기심과 막연한 기대, 그리고 막연한 희망과 막연한 가능성 등이 그들을 움직인 것이다.

때마침 어디론가 사라졌던 양아버지이자 자칭 군납업자가 놀랍게도 삼만 원을 어디선가 마련해 왔고, 가슴 설레면서 그 돈을 훔친 그 날 은자는 바로 서울로 떠났다. 한마디로 야반도주를 한 계집애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 달포쯤 시들시들 풀죽어 있던 기수는 어느 날 마침 기수 아버지가 돼지 팔아 온 돈 오만 원을 훔쳐 가자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은자는 서울로 향하는 입석 기차 안에서 고통스러운 여행을 견디며 내심 이렇게 다짐했다.

‘돌아갈 때는 좌석 번호가 있는 특급열차를 타야지. 아니야, 택시는 대절하지 못 할라구. 또 모르지, 자가용 타고 고향 갈는지도…….’

드디어 혼잡하고 분주한 서울역에 도착한 은자. 은자는 물론 사전에 공중전화 사용법과 서울의 지도를 보고 지리도 연구해 두었다. 또한, 동대문구 전농동에 사는 시집간 언니와 형부의 전화번호와 주소도 수첩에 적어 왔고, 만약을 대비해 이 년 전에 은자보다 먼저 서울로 돌격해 미아리 양말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친구 경혜와 펜팔로 사귀었던 몇몇 남자들의 연락처도 준비했다. 그러나 형부와 경혜와는 도통 통화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전화 통화에 성공한 것은 펜팔로 알게 된 한 남자가 있는 신학대학생의 가정교사 집이었다. 그리고 그 대학생은 기꺼이 은자가 있는 서울역으로 나오기로 약속한다.

우리의 미스 양이 지키고 싶어 했던 ‘선’

우>리의 미스 양, 은자는 그 당시 시골에 사는 소녀라면 한 번쯤 상상했을 법한 일을, 그리고 많은 소년 소녀들이 과감히 저질렀던 ‘무작정 상경’의 대모험을 감행한다. 은자의 서울 상경에 대한 배경은 출세와 돈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념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성공을 거두어서 이제까지 자기를 길러 오느라고 고생한 이리댁의 여생을 편안하게 해주고 동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보자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부모와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동생을 둔 누나, 오빠, 형이라면 누구나 바랄법한 기특하고 소박한 소망이다. ‘어떻게 하든지’라고 은자는 말하지만, 사실 서울 진출 초기만 해도 은자는 막연하게나마 지켜야 할 선을 나름대로 마음속에 그었다.

은자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자 중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괜찮은 한국남자나 외국인을 꾀어 한순간의 신분 상승을 노리는 야심에 찬 기회주의적인 여자들도 있었다. 『영자의 전성시대』로 유명한 조선작의 『미스 양의 모험』에도 은자의 고향 친구 경혜는 양말 공장, 비어 홀을 전전하다 결국에는 소망대로 한국으로 관광 온 50대 일본 남자를 만나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런 경혜를 두고 은자는 돈도 좋지만 그렇게 혼까지 팔아먹을 수는 없다며, 적어도 좋은 남자 하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맑고 투명한 혼만은 고이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다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 권씨 일가의 마나님에게 식모살이를 권유받자 식모살이를 하려고 서울까지 올라왔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모멸감까지 느낀다. 또한, 은자가 아직 시골에 있을 때 서울에서 놀러 와 은자의 가출을 부채질하는 경혜를 보고는 기껏 양말 공장의 공순이나 할거하면 서울 안 간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시대를 불문하는 남자들의 채워지지 않는 정욕

은자는 무작정 상경한 소녀들이 주로 몸담는 식모살이나 공장 노동자는 경멸했으며, 경리 학원이나 타자 학원 같은데 다녀 떳떳한 직장에 취직하고 떳떳한 길을 밟아 성공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 큰 꿈도 아니다. 하지만, 시대가 좋지 못했다. 무허가의 직업소개소는 은자 같은 이들에게 뒷돈을 요구하기 일쑤였고, 요정이라고 속인 다음 반강제로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니라 허름한 니나놋집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햇빛도 들지 않는 음침한 방에서 감금 생활과 ‘여관 출장’을 강요당했다. ‘자립하기를 원하는 여자들’을 데리고 있는 지배인은 회비라는 명목으로 부당하게 착취했으며, 이러한 구조적 악습은 요정, 비어 홀, 카바레, 목욕탕 등 하층 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곳에서 그들을 더욱 고단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부당한 대우 속에서 은자를 더욱 괴롭힌 것은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남자들의 시도 때도 없이 들이미는 정욕이었다.

은자가 상경 첫날 만난 신학대학생이라고 속인 문대성, 장차 일류 가수로 출세할 것이 틀림없는 자기에게 일찌감치 프러포즈를 해두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던 세차원 길병수, 치과대생이라고 속인 소매치기 구상철, 열여덟 살밖에 안 된 다방 주방에서 일하던 머슴애 차군 등 은자를 만나는 남자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 고이고 고인 정충을 쏟아붓고 싶은 동물적 욕망뿐이었다.

누가 그들을 ‘종점’으로 몰아붙였는가?

은자는 상경 때만 해도 나름대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몸을 파는 유혹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림과 불면을, 연금과 약탈을, 배회와 허망을, 실망과 분노를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는 조그마한 소망들과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갈증을 겪으면서” “돈은 가장 어두운 곳에 또는 가장 더러운 곳에 흔하게 널려 있다는 깨우침이라든가 남자는 동물과 사람의 중간쯤 되는 동물이라는 각성, 또는 세상이란 얼마나 어리숙한 인간들의 집합인가 하는 데 대한 인식 따위의 총체가 은자를 가만히 비극적으로 눈뜨게” 한다. 또한, “마침내 자신의 순결 같은 것이 남자들의 애타는 요구에 비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서 슬프게 유념하기” 시작한 은자는 온갖 치졸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끈질기게 매달렸던 남자들의 힘겨운 요구에도 지켜왔던 마지막 보루, 상경 초기 막연하게나마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서게 된다. 그렇게까지 해서 도착한 그곳은 동료이자 고참인 미스 유의 말대로 ‘종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리나라의 산업화 • 도시화에 따른 사람 사는 모습의 변화에 대해 남다른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것이 문학의 주제나 조형의 뼈대가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실한 신념을 가져서는 아니었고, 날로 비대해져 가는 도시의 한 서민으로서 느끼는 소외감과 열등감이 도리어 도전적인 흥미를 부채질하지 않았는가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숨 쉴 틈도 없이 치고 달리는 도시화와 산업화에 편승해 소박한 꿈을 이루고자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청소년들은 ‘조국의 근대화’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근대화나 산업화, 자본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결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음주운전처럼 안전한 속도와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미친 듯이 내달렸고, ‘빨리빨리’라는 단 한마디로 민족성을 대변할 수 있는 시대답게 과속으로 맹렬하게 달리던 산업화를 조기에 이룩하려는 국가적 탐욕은 마땅한 희생이 필요했다. ‘한강의 기적’은 참말로 맞는 말이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Miss Yang's Adventure movie poster
<영화 '미스 양의 모험' 포스터, 출처: 다음 영화>

소박한 꿈조차 체념하게 만드는 잔인한 도시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최인호와 함께 1970년대 하면 떠오르는 작가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성벽』 등의 중단편과 첫 장편 『미스 양의 모험』은 산업화에서 소외된 도시 하층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렇지만 값싼 동정이나 연민에는 휩싸이지 않는 절제된 문장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여기에 그만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 뭍으로 막 올라온 붕어처럼 파닥거리는 생동감과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거칠면서도 재치있는 매우 맛깔스러운 글쓰기는 순수하게 텍스트를 읽어내는 재미만으로도 독자를 유쾌하게 만든다. 참고로 난 소설을 읽을 때 자신만의 개성 있는 글쓰기를 구사하는 작가를 높이 평가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담백한 문장은 평생 잊을 수 없으며, 그 독특한 문장의 멋 때문이라도 가끔 다시 읽고 싶어진다.

아무튼 『미스 양의 모험』에서 조선작은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원대한 포부를 안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수많은 청소년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서울에서 겪어야 했던 다사다난한 삶을 은자의 7년간 서울살이를 통해 대변하고 있다. 상경 초기에만 해도 순결을 지키고자 했던, 진실한 사랑을 믿었던 당차고 억새며 약간의 순박함도 간직했던 우리의 은자가 세상 풍파에 닳고 닳은 여자들이 도달하기 마련인 ‘종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조선작은 딱 잘라 ‘체념’이라고 말한다.

세상 누구도 은자를 진실하게 맞이해 주지 않았다. 비집고 들어가려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냉담한 콘크리트의 벽들 사이에 갇혀 외롭고 쓸쓸했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줄 믿음직스럽고 따뜻한 어깨를 간직한 든든한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은자의 주변엔 어떻게든 은자를 한 번 안아보려고 침을 질질 흘리는 발정 난 양의 탈을 쓴 늑대뿐이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낯선 서울에서 은자는 늘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사방은 어수룩한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적(敵)들이었다.

은자는 피곤했고 이 모든 넌더리에 그만 지쳐버렸다. 그래서 모든 걸 체념했다. 상경할 때 마음먹었던 소박한 꿈이나, 돈을 벌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선 같은 애초에 지키지도 이루지도 못할 것들을 체념했다. 이제는 고액의 수입보다는 터무니없을지라도 안정된 삶과 휴식이 필요했다. 조선작은 은자는 조난당한 난민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조난당했다는 말인가. 그것은 홍수나 지진 따위가 아니다. 차라리 그런 자연재해에 조난당한 난민이라면 구제할 길은 얼마든지 있으니 다행일지도 모른다. 은자가 당한 재난은 바로 조국의 근대화라는 돌풍이었다고 조선작은 말한다. “돌풍의 와중에서 마침내는 형체도 없이 난파해 버린 하나의 작은 목선”, 그것이 바로 양은자다.

‘여름 해가 지다’나 ‘유리문 안에서’도 그랬지만, 거의 3년 전에 쓴 글을 이제야 올리는 이 게으름과 불성실함이란! 된장 고추장처럼 마냥 묵혀둔다고 조악한 글이 절로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3년 전에 쓴 글이라 그런지 ‘리뷰’를 쓰는 방식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줄거리’를 앞에 붙이는 것이 꼭 독후감을 쓰는 것 같다. 지금은 책의 내용에는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감상을 적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튼, 지금도 밀린 ‘책 리뷰’ 글일 수두룩한데 앞으로는 좀 부지런히 글을 올려야겠다. 이러다 내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죽으면, 다른 것은 미련이 없지만, 비록 쓰레기 같은 글이지만 이것만은 좀 미련이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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