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니아(Before I Wake, 2016) | 기억이 낳은 또 다른 고름, 악몽
"그때 내가 (방아쇠를) 당겼다면 당신의 남편도 다른 사람들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당신이…. 내가 못한 걸 할 수 있을지 몰라요" - 웰란
아이가 꾸는 꿈이 그대로 현실로 재현된다는, 그리 기발하지는 않은 소재를 다뤘음에도 공포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인과 관계를 마치 추리소설처럼 비교적 명확하게 풀어냄으로써 나름 독창적인 감흥을 자아내고 있는 영화 「썸니아(Before I Wake, 2016)」. 새로 입양한 아이 코디의 새엄마 제시는 코디의 악몽 속에 갇혀 있는 트라우마를 쫓는 탐정이 되는데, 그럼으로써 그녀는 코디 친모의 죽음이 아이에게 남긴 씻어낼 수 없는 기억이 단편화와 인상화라는 망각적 변용을 거쳐 끝내 악몽으로 이어졌음을 밝혀낸다. 그렇게 아이의 악몽은 끝난 것처럼 보이고, 두 사람의 운명은 화창한 봄날을 맞이한다.
약간은 무서우면서도, 그것보다 조금 더 약간은 슬프면서도 결말은 해피한 공포영화다. 다르게 말하면, 확실히 무섭지도 않고, 확실히 감동적이지도 않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코디의 악몽을 두루뭉술하게 에두른 것이 아니라 명징하게 추적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렇다. ‘악몽은 다름 아닌 우리 현실에서, 그것도 나의 삶,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의 상처, 나의 기억에서 오는 것이다!’라고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우리는 꿈속에 등장하는 뜻밖의 물건, 상황, 인물과 맞닥트리면서 괜히 놀라곤 하는데, 사실 이들을 역추적해보면 대부분이 (영화 속 코디처럼) 삶에서 받은 여러 인상의 과도한 변용과 예측할 수 없는 단편화가 가져온 결과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변용이 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단순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결국 꿈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꿈을 꾸는 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상할 수 있는 한계점 내로 한정되어 진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사람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컴퓨터’와 연계된 꿈은 꿀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뭐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영화 「썸니아」 는 아버지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잠자는 코디를 권총으로 죽이려는 아찔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뭔 바람이 불었는지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꽝’ 열리면서 남자가 놀라는 바람에 코디는 무사히 그날 밤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나 도리상으로나 아이를 총으로 쏴죽이려 했던 남자에게 코디를 계속 맡길 수는 없는 법. 코디는 입양을 희망하는 젊은 홉슨 부부의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홉슨 부부는 불행한 사고로 아들 션을 잃어버린 가슴 아픈 기억을 여전히 간직한 채 코디를 새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세 살에 엄마를 여의고 어떤 연유로 여러 가정을 전전한 코디는 아이답지 않게 홉슨 부부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다.
코디가 가져온 짐이라곤 달랑 네모난 상자 하나. 코디가 방에 없을 때 침대 밑에 숨겨놓은 상자를 우연히 발견한 제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뚜껑을 열어본다. 아이가 좋아하는 나비에 대한 책과 함께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아직 고삼도 아닌데!) 각성제. 그날 코디에게 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제시는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잠을 자는 게 싫어서 각성제를 먹는다는 코디는 자신이 잠들면 ‘캔커맨’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고 고백한다. 코디는 사뭇 진지하지만, 그냥 캄캄하고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한 제시는 조금만 이해하면 무서운 게 사라진다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코디의 걱정을 잠재우려고 한다.
코디를 잠재우고 거실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부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두 사람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어디선가 갑지가 날아든 가지각색의 나비가 어느새 거실을 가득 채운 것이다. 하지만, 나비는 갑자기 날아든 것처럼 부부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남편과 함께 신비한 현상을 겪자 제시는 용기를 내어 어젯밤에 션을 본 일도 남편에게 털어놓는다. 제시에게 그 일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던 경험이었다. 다음 날 부부는 더욱 놀라운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나비와 함께 이번에는 죽은 아들 션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코디의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어렴풋이 추측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션의 사고 장면, 즉 아이의 발이 약간 위로 들려 있는 상태에서 발버둥치는 것으로 보아 제시가 아이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려 익사시킨 것은 아닐지, 그래서 그녀만 그 충격으로 집단 정신치료를 받는 것이 아닌지 상상해 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코디의 꿈은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던 나비로 시작한다. 그러던 것이 부부가 애타게 보고 싶어하던 션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은 코디가 (또다시 버림받지 않고자) 부부에게 잘 보이려는 무의식이 꿈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션으로 연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날이 갈수록 그것이 부담되니까 ‘캔커맨’을 등장시켜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것은 아닐까? 이러면 잘 보여야 할 사람도 사라지니까 말이다. 결국, 코디는 새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은데, 새 부모는 그런 코디의 애처로움은 외면한 채 코디가 가진 희귀한 재능만을 탐낸 비극적 결과가 사람들의 실종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유추해 보면서 「썸니아」 리뷰를 마친다.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