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7

장마딩의 여덟째 날 | 인간성의 본질과 변칙의 레퍼토리

Zhang Mading's eighth day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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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딩의 여덟째 날 | 리루이 | 인간성의 본질과 변칙의 레퍼토리

그것은 모든 중국인과 외국인을 모두 다 궁지로 내모는 정신적 사각지대입니다. 나는 그런 막다른 골목과 다름없는 정신적 사각지대에 놓인 인간성의 깊이를 가늠해 보고 싶었습니다. 인간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한 고민과 탐색이 바로 장편소설 《장마딩의 여덟째 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장마딩의 여덟째 날』, 「한국어판 서문」, 6쪽)

끊임없는 재생산을 통한 인간성의 본질과 변칙의 레퍼토리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 자신은 물론이고 아마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조차 딱 부러지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다. 많은 지성인에 의해 무수히 되새김 당한 골동품처럼 케케묵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무수한 인간 행위에 대한 관찰과 단 한 번의 삶에서 체득한 지혜를 철학적 사유 속에 부단하게 담금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간성’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속성과 성질 등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에 문학은 끊임없는 재생산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과 변칙의 레퍼토리를 텍스트로 게워냄으로써 그 자신의 몫을 다해낼 수 있었다 .

리루이(李銳, Li Rui)의 장편 소설 『장마딩의 여덟째 날(張馬丁的第八天)』은 인간의 본성이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참극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고민과 탐색을 진중하게 구상한 작품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참극이란 다름 아닌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며, 작품 속 주요 갈등은 오래전부터 삼신할미를 믿어왔던 하늘어미 강기슭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에서 온 선교사, 그리고 그 선교사에 의해 하느님을 믿게 된 사람들과의 종교적인 충돌이다. 좀 떨어져서 보면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던 토착 종교와 서구에서 건너온 외래종교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다.

삼신할미를 믿건 하느님을 믿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극히 주관적인 믿음을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나 가치를 멋대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결국, 종교적 출동은 자신의 믿음만이 옳다는 오만과 아집에서 발원하여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과 타자에 대한 몰이해로 치달은 불관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믿음이나 가치관이 다른 이들은 타인(他人)이 아닌 타물(他物)로서, 즉 생명체에서 물건으로 격이 현저히 떨어진다. 사람이 아닌 물건이기 때문에 폭력이나 파괴 등 그 어떠한 행위도 허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자원이나 영토 등 경제적 이익을 두고 싸우는 전쟁보다 종교, 이념, 민족 등 믿음에 기반을 둔 가치관의 충돌로 말미암은 전쟁이 유난히 더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영토와 자원은 싸워서 쟁취하거나 상대가 항복하면 끝나지만, -이즘의 충돌로 말미암은 전쟁은 상대가 완전히 소멸하거나 상대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사상이나 가치관을 포기하고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격을 의도적으로 동물이나 그보다 못한 하등의 것으로 떨어트림으로써 파괴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합리화한 역사적 참사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유명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ふくざわゆきち)의 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인, 대만인, 중국인을 개돼지만도 못한 것들이라며 비하하는 선동적인 연설을 일삼았으며 이를 듣고 자란 일본군인들은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은 느낄 필요없이 난징대학살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2차대전 당시 유대인을 동물보다 못한 하등의 것으로 격하시킴으로써 대학살의 물꼬를 튼 연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Zhang Martin's Eighth Day by Li Rui
<의화단 운동, Torajirō Kasai / Public domain>

그래서 난 『장마딩의 여덟째 날(張馬丁的第八天)』 저자 리루이가 언급한 인간의 ‘정신적 사각지대’중 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불관용에서 비롯된 생명의 물질화, 혹은 인간의 비인격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가 먹을 것이 부족해 굶어 죽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배가 불러 더 먹을 수 없다는 이유로 멀쩡한 음식들을 태연스럽게 버릴 수가 있다. 그런데 더 무섭고 중요한 사실은 난징대학살과 홀로코스트처럼 누군가에 의해 이 ‘정신적 사각지대’가 의도적으로, 그리고 바탕 교체(baselines shifting) 현상처럼 무의식적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레 동안 ‘서로 다름’을 창조하고 여덟째 날 모두를 하나로 만들다

저 만 리 먼 곳에서 하느님을 따라 중국에 온, 바발로에서 자란 지오반니 마틴 아니 장마딩은 자신을 자식처럼 거둬 길러준 꼬르 신부 곁을 떠난다. 성당을 떠난다. 성당을 떠나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하늘바윗골로 떠난다. 하늘바윗골에는 하느님과 쌍벽을 이루는 삼신할미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삼신할미의 신내림을 받은, 반은 정신이 나간 장톈츠의 아내 왕석류가 있다. 장톈츠는 장마딩을 죽인 죄로 참수를 당했다. 그런데 장마딩은 살아 있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그가 살아 있다. 묘비까지 세워가며 장례를 치른 사람이,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으니 문제가 없을 리 없다.

꼬르 신부는 이 사실을 숨겼다. 숨겨야 했다. 이교도의 사당을 부수고 그 위에 보란 듯이 성당을 세워 그들의 사악한 우상으로 더럽혀진 신성한 하느님의 땅을 정화해야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꼬르 신부의 믿음은 그러했다. 그러나 장마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마딩은 양심을 속일 수 없었다. 더더욱 하느님을 속여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떠났다. 꼬르 신부에게 쫓겨나다시피 성당을 떠났다. 아버지 같은 꼬르 신부를 떠났다. 때는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오랜 가뭄으로 흉흉해진 민심 속에서 의지할 곳 없는 장마딩은 강도들에게 입던 옷까지 빼앗기는 수난을 당한다. 굶주림과 추위가 그를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져 삶의 마지막 끈을 지탱할 최후의 기력마저 허탈하게 소진시킨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살아난다. 성당을 떠난 지 꼬박 여덟째 날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곳은 바로 삼신할미사당 근처였고, 죽었다 살아난 장마딩을 남편 장톈츠가 부활한 것으로 여긴 왕석류는 온 정성을 다해 그를 보살핀다.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 남편이 죽기 전날 함께 했던 옥중 정사에서 얻지 못한 씨앗을 그에게서 받아낸다. 마을 색시들을 불러 장마딩, 부활한 장톈츠의 씨앗을 고루 나눠준다.

Zhang Martin's Eighth Day by Li Rui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날>

신부는 믿음에 눈이 멀어 양심마저 저버리지만, 장마딩은 믿음을 위해 양심을 거역할 수 없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한다더니 삼신할미를 믿는 왕석류는 노란 머리의 파란 눈을 한 장마딩을 기꺼이 환생한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이들 모두 자신의 믿음을 위해 헌신하지만, 운명의 시련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신부는 의화단 운동에 휩쓸려 비참하게 화형을 당하고, 이교도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장마딩은 겁탈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지만, 끝내 며칠 버티지 못하고 애초에 가야 해야 했을 길로 떠난다. 왕석류는 악몽 같은 지난날이 홍수와 함께 모두 휩쓸려가고 난 다음 어느 날 수녀에게 혼혈아를 맡기고 신선처럼 나무 대야를 타고 하늘어미 강을 따라 둥둥 정처 없이 떠내려간다. 조용하고 근심 없는 데를 찾아, 그저 조용하고 사람 없는 데를 찾아서 말이다.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가치관, 서로 다른 믿음으로 말미암은 충돌로 인간은 서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가하고 역시 큰 고통을 받아왔다. 전쟁, 학살, 테러 등 인류사의 헤드라인은 폭력과 파괴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가히 과언은 아니며, 이러한 충돌로 한번 이성을 잃게 되면 인간은 악마도 울고 갈 정도로 난폭하고 사악한 괴물로 돌변한다. 배부른 사자가 얌전히 있는 것을 보고 사자의 본성을 얌전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평소 안정된 삶에서 무던하게 행동하는 인간을 보고 인간은 무던하고 평화로운 동물이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리루이의 『장마딩의 여덟째 날(張馬丁的第八天)』은 모든 인간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이성마저 내팽개치게 하는 ‘정신적 사각지대’로 내몬다. 그쯤 되면 생존 본능에 잠식된 인간은 괴물로 돌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뻔뻔한 우리는 그 괴물의 몸부림 속에서 그제야 인간성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그러한 고민과 탐색을 모색한 이 작품은 번개탄처럼 독자의 감정을 순식간에 바싹 타들게 하여 잔뜩 긴장시킨 다음, 연탄재처럼 바짝 마른 감정이 희망과 사랑, 연민과 동정으로 이루어진 감성의 양식을 빨아들여 제모습을 찾기도 전에 홍수를 일으켜 모두 쓸어버린다. 한마디로 『장마딩의 여덟째 날』은 인간성에 대한 아련한 미련과 우수 어린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왕석류는 오랜 가뭄 끝에 홍수를 일으킨 하늘에 대고 넙죽 절하며 공평하게 ‘할렐루야!’도 외치고 ‘삼신할미, 보우하사!’도 외친다. 장마딩은 자신을 환생한 남편으로 오해한 왕석류에게 더는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순순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른다. 두 사람은 지고한 시련 끝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분쟁의 씨앗을 제거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장마딩의 여덟째 날은 바로 이날이었다. 즉, 태초의 신이 이레 동안 하늘과 땅, 산과 바다, 강과 들판,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과 무생물 등 이 세상을 창조하며 ‘서로 다름’을 만들었다면, 여덟째 날은 ‘서로 다름’을 하나로 융합하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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